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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원 Oct 17. 2024

16. 단순하고 대단하지 않은 하루

갓생과 멀어지는 나의 일상

2030 세대에게 '갓생'이라는 용어는 익숙할 것이다. 신을 뜻하는 'God'과 인생의 '생'을 합친 단어로 매우 부지런하고 생산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일컫는다. 유튜브나 SNS에서 한 번쯤 이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갓생을 사는 이들의 하루는 보통 새벽에 시작된다. 새벽 4시쯤 개인 공부와 아침 운동을 하고, 출근 준비를 마친다. 출근 후 점심시간에는 그 틈에 못다 한 운동이나 해야 할 업무를 마치고, 퇴근 후에는 수업을 듣거나 제2의 직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인데, 나만 이렇게 하루를 아무 의미 없이 보내고 있나 싶었다. 지각하지 않고 성실히 출근해 일을 하고 퇴근 후 운동을 꼬박꼬박 해도, 갓생을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한참 모자란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스스로에게 무언의 압박과 실망감이 커졌다. 그리고 나의 이 하루가 더 빼곡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어진 일상도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데 말이다. 이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며, 대단한 하루를 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09월 28일

시골길을 내리 걷는 순례길에서 도시는 정말 흔치 않다. 그래서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순례자들은 도시를 만나는 날만을 기다린다. 오늘은 순례길의 마지막 대도시 ‘사리아(Sarria)’로 향하는 날이다. 사실 마지막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에 도착하는 날이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관광객들과 사리아부터 시작하는 100km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곳. 그 조용하던 길을 벗어나 만나는 이 도시가 마냥 반갑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이 조용한 시골길이 꽤나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흙 밟는 소리만 가득한 이 적막함에 익숙해진 것이다.


순례자의 하루는 참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거나, 조금 걸어가 다음 마을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그날 목표 마을까지 걸으며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는다. 중간에 만나는 길은 오르막일 수도, 평지일 수도, 내리막일 수도 있다. 그 길을 지나 마을에 도착하면 씻고, 빨래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전의 일상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처럼 느껴지겠지만, 순례길에서의 하루는 결코 무의미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하루 중 가장 큰 일정이 걷기와 식사, 빨래여도 오히려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물론 길이 짧지 않다 보니 물집, 무릎 통증, 발목 통증 같은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길의 일부였다.


나는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대단하지 않은 이 일상이 너무 좋았다. 무리해서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아침,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상쾌함, 친구들과 소통하기 위해 더듬더듬 영어를 말하려는 나 자신이 좋았다.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몸이 개운해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오늘 아침은 한국식 시래깃국을 파는 집에서 시작했다. 물론 스페인 사람이 만드는 시래깃국이니 우리가 아는 맛과는 달랐지만, 하얀 공깃밥과 서툴게 적힌 메뉴판 덕분에 한국이 떠올랐고, 빵이 아닌 쌀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행복했다.


오랜만에 보는 산은 또 어떤가? 오르막길인데 밉지 않았다. 초록색이 가득한 이 길을 평탄히 걸어갈 수 있는 내 두 다리가 고마웠다. 작은 마을에서 보라색 자판기에서 뽑아먹는 콜라는 너무 달콤했고, 기부제(Donation)로 운영하는 장소를 보면 순례자들을 위해 선을 베푸는 그들이 참 좋았다.


스페인에서 즐기는 시래기국 밥
아침에 바라볼 수 있는 산
순례자들의 오아시스, 자판기
기부제로 운영되는 카미노쉼터
햇살이 내리쬐는 순례길


대단한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내 하루를 누구와 비교해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아니, 비교하려고 하지 않았다. 길을 걷다 밭에 보이는 큰 호박만 보아도 즐거웠기에 굳이 누구와 비교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은 참 단순하구나. 평화로운 길을 걸어 맛있는 식사를 하고 두 다리로 즐겁게 걸을 수 있으면 참 기쁘구나.


곧 이 여정의 마지막 큰 도시인 사리아에 도착한다. 그렇다고 내게 달라질 건 없었다. 관광객들에 비하면 사실 누구보다 허름한 복장이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내가 좋았고, 대단하지 않아도 이 단순한 하루하루들이 충분했다. 넘치도록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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