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km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갈래길에 서서 어느 길을 선택할지 정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인간이 겪는 고통 중 하나가 선택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며, 특히 성인이 된 이후로는 모든 결정이 오롯이 나의 몫이 되기에 그 무게는 더욱 커진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하고도 반년이 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제는 어려운 일보다는 지겹고 이미 알고 있어 더 고통스러운 일상만 남았을 무렵. 평소 여행영상을 즐겨보던 나는, 어느 날과 똑같이 출근 준비시간에 <걸어서 세계속으로>으로 라는 프로그램을 틀어놓았다. 이번 회차에 소개된 여행지는 스페인이다. 정열과 순례의 길? 흥미를 돋우는 제목이었다.
이제는 하루 일과 중 일부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틀어놓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순례의 길이라는 글자는 내 머릿속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고 이후로 어느 여행자의 영상을 통해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니트 원피스를 입고 홀로 걷는 여성. 모든 단어와 풍경이 새롭고 신선하였으며, 영상 끝에서는 마음 깊은 곳에 여러 생각을 남겼다.
그 이후로 나는 순례길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접어 넣었던 것 같다. 나아가 어쩌면 그 길 위에 내가 서있으면 어떨지까지 상상해 온 것 같다. 길이 나를 부른다 하였던가? 갈래길에 서게 된 나의 시작이었다.
나에게 '퇴사'는 일이 쏟아져 내려와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지루할 때쯤 생각나는 존재인 듯하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일한 지 2년, 나는 또다시 퇴사를 결심했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직이 아니라 그저 퇴사 후 휴식을 하고 싶었다.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러 가고 전쟁과 같은 일이 끝나면 운동을 하고 1초 같은 휴식의 밤이 지나면 또 일을 하러 나가고. 정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사 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히 말하면 무계획 퇴사인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나의 선택에 대해 여러 평을 늘어놓았다. 그래 쉬는 것도 좋다는 의견과 너 참 용감하다 그리고 간혹 들리는 나의 선택이 '오류'에 가깝다는 말까지.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주위에 물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며, 그들의 대답에서 나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묻는 과정 속에서 나 스스로에게 한 번 더 물었고, 그 과정 끝에 답이 있었다.
내 선택에 대해 불안해?라고 물으면 당연하다. 어느 누가 이 선택에 대해 안도를 할 수 있을까. 선택의 결과 끝에 있는 불투명한 문을 열어보는 것은 항상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 더 이상 시간이 지나면 너무 겁이 날 것 같은 일, 지금 너무 하고 싶은 일, 오랜 시간 동안 상상해 온 일. 그러면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갈래길에 서서 결정을 내렸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800km의 그 길. 익숙한 일상을 떠나, 새로운 그 길 위에 서서 걸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