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남쪽으로, 숨결이 옅은 곳

악덕 농장주의 그림자를 벗어나 ⁄ 남해 해풍 속 새 비닐하우스와 성당 부

by 지구 외계인


밤이 깊어지자 반지하방의 전등 불빛만 남았다.

달력 위로 병원 잔금 12만 원, 밀린 월세 8만 원,

그리고 세 번째 미뤄진 품삯 28만 원이 붉은 펜으로 적혀 있었다.

마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아가 남해 지도 이미지를 휴대폰 화면에 띄웠다.


“남면 쪽 해풍 하우스. 일급 8만 5천에 주 6일 51만 원.

현금 지급, 서류 묻지 않는다고 해.”

“진짜 줄까?”

“농장주가 착한사람이래. 적어도 지금보단 낫겠지.”


지안은 요 위에서 새로 받은 크레용을 움켜쥔 채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아이의 고른 숨을 들으며

떠나야 할 이유를 더는 말로 확인하지 않았다.


새벽 세 시 반,

불 꺼진 골목을 빠져나올 때 들고 나온 건

여름옷 네 벌, 지안의 빨대 컵,

성 없이 적힌 이름표 스티커,

그리고 손에 남은 현금 6만 5천 원뿐이었다.

빛바랜 가방이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철컥 소리를 냈다.


동이 트기도 전,

시외버스는 남쪽으로 몇 시간을 달렸다.

창밖으로 철선 울타리와 마지막 도심이 사라지자

바다 냄새 같은 바람이 차창을 타고 스며들었다.

지안은 처음 맡아 보는 짭짤한 공기에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작은 코끝을 실룩였다.


남해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

흔들리는 파란 지붕 트럭이 두 사람을 태웠다.

불규칙한 비포장 길 끝, 비닐하우스 지붕이 두껍게 이어졌고

바람때문인지 하우스 벽이 바사삭 소리를 냈다.


농장주 장 씨는 칠십이 넘어보이는 몸으로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해풍 덕에 당도 좋다. 대신 문 여닫는 시간은 꼭 지켜야 해.

품삯은 토요일 오후마다 봉투로 현금 지급, 약속 은 안 깨.”

지갑을 툭 열어 보이는 손놀림과 말투는 거칠었지만 눈빛은 단순했다.


숙소는 하우스 옆 낡은 컨테이너였다.

곰팡이 대신 김 빠진 바다 냄새가 묻었다.

창문을 열자 파도 소리 비슷한 바람이 가만히 들어왔다.

그 낡은 바람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첫날 품삯 봉투를 건네받은 건 해 지기 전이었다.

만원짜리가 차곡차곡 들어찬 두툼한 봉투를 손에 쥔 루시아는

무게를 확인하듯 펴보고 접었다.

“일주일이면 지안 병원비 끝.”

마이라가 속삭였다.


장 씨가 일터를 돌다 말고 물었다.

“그 애 맡길 데는 찾았나?”

“아직요.”

“읍내 성당 지하에 보육방 있어.

외국인 애도 받아. 내 헌금 계좌로 비용 이미 냈으니 가봐.”


다음 날, 두 사람은 지안을 데리고

성당 곁 돌계단을 내려갔다.

낡은 지하 복도 끝에 작은 교실이 있었다.

담당 수녀가 다정하게 말했지만 질문은 분명했다.

“아이 이름이 지안… 성이 안적혀 있네요 뭐예요?”

“…그냥 지안입니다.”

수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하얀 명찰스티커에 ‘지안’ 두 글자만 적었다.

명찰을 받아들고 지안의 가슴에 붙여 주는 순간,

마이라는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서류 한 줄 없는 아이 이름이

바다와 성당 사이에서 처음으로 ‘공식’이 되었다.


컨테이너로 돌아가는 길,

지안은 잠들어 있던 눈을 비비며 빠른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볕에 익은 소금기와 토마토 잎 냄새가 함께 섞여 있었다.

루시아는 봉투 속 지폐를 조심스레 다시 세며 말했다.

“숨이 트인다, 밝은 빛이 생기는것 같아.”


밤이 되자 바람은 더 거칠어졌지만

창문 틈으로 들어온 냉기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냉장고 자석 앞에는

성 없이 적힌 이름표 스티커가 다시 붙었다.

모서리가 살짝 뜨려 하자

마이라가 손바닥으로 눌러 주었다.

“이번엔 더 단단히.”


루시아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지안이 자라는 만큼 우리 집도 조금씩 넓어지네.”

“집이 아니라 삶.”

마이라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숫자로 안 적혀도, 우리는 계속 기록하고 있잖아.”


해풍이 컨테이너 철벽을 살짝 흔들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숨은

어둔 방 안에서 잔잔히 이어졌다.

숫자는 없어도,

지안이라는 이름이 바다 바람과 함께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크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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