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첫 이름표

주민번호 없는 8살, 교문 앞에 서다

by 지구 외계인


겨울이 끝나기 전, 고 선영 사회복지사가 남해 컨테이너를 찾았다.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올해 3월부터 ‘의무교육 사각지대 아동 보호 조치’가 시범 실시돼요.

주민번호 없어도 교육청이 임시 학번을 발급해 주거든요.”


마이라는 말없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살아오며 본 법령 문구가 손가락 안에서 푸르게 빛났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19조 3항,

출생신고가 어려운 아동도 교육감 확인서로 취학 가능.

굵은 자음과 모음이 처음으로 지안을 향해 ‘가능’이라 말했다.


“필요한 건 학교장 추천서와 보호자 동의서예요.

동의서는 제가 준비했으니, 학교만 다녀오면 돼요.”

사회복지사가 건네 준 연필 서류는 얇았지만

두 사람 손끝에서 묵직했다.



읍내 초등학교 교무실.

교감이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추천서를 훑어보았다.

“출생증명서 대신 교육지원청 확인서라… 올해 처음 보는 서류네요.”

교감은 잠시 침묵하다 서류 맨 끝에 도장을 찍었다.

“의자 하나 더 놓으면 됩니다.

아이 이름이… 지안? 성은요?”

“지안, 두 글자입니다.”

마이라는 담담히 대답했다.


교감은 눈만 살짝 커졌다.

“아이들에게도 그냥 지안이라고 부르면 되죠?”

“네.”

그 대답이 교무실 공기 위에 자리를 잡았다.



개학 전 날, 학교 앞 문구점에서

루시아가 보라색 연필 깎이와 12색 크레파스를 골랐다.

마이라는 노란 교통카드 줄을 집어 들었다.

“통학버스 대신 걸어도 되는데 왜?”

루시아가 웃었다.

“지안이 저 줄 흔들며 뛰어올 걸 생각했어.”


그날 밤, 두 사람은 지안 앞에 흰 종이를 펼쳤다.

“학교 가면 이름표를 만들어야 해.”

마이라는 사각사각 연필로 네모 칸을 그리고

‘지안’ 두 글자를 쓰려다 멈췄다.

“너, 어떤 글씨가 좋아?”

지안이 잠시 고민하다 굵은 보라색 크레파스를 집어

스스로 이름을 적었다.

둥글고 삐뚤한 두 글자.

마이라가 크레파스 자국을 오래 바라봤다.


“성은 없지만, 글자가 더 예뻐졌네.”

루시아가 말하자

지안은 어른들 웃음과 다른 투박한 웃음을 터뜨렸다.



입학식 날 아침,

해풍보다 먼저 컨테이너 문이 열렸다.

새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은 지안이

학교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을 뛰어 내려갔다.

토마토 하우스 위로 해가 떠오르며

비닐 지붕을 유리처럼 반짝였다.


교문에서는 담임 오 선생이 안내표를 들고 서 있었다.

“지안? 맞지? 여기 줄에 서렴.”

아이들이 쑥스러운 얼굴로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왕, 김, 이, 박… 그리고 두 글자 ‘지안’.

귓가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일었다.


“이름이 짧다.”

“성 없대.”

“멋있어.”


지안은 잠깐 머뭇했지만

오 선생이 부드럽게 등을 밀어 주자

줄 끝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국기 게양대 위 태극기가 부는 바람에 크게 펄럭였다.



학년 첫 수업 시간,

출석부가 교실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번호 대신 하늘색 임시 학번 ‘888-0123’이

지안 이름 앞에 박혔다.

“여기 있다”라는 뜻의 숫자였다.


오 선생이 천천히 이름을 불렀다.

“지안.”

미등록자도, 외국인도 아닌

그냥 초등학교 1학년 아이로서

지안이 일어나 또렷하게 대답했다.


“네!”

교실 창이 활짝 열리자

멀리서 파도 소리가 내려와 교탁을 스쳤다.

아이들 손끝엔 아직 연필 흔들림이 서툴렀지만

지안의 두 글자는 흰 공책 위에 처음으로 곧게 섰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길,

마이라와 루시아는 학교 앞 평상에서 지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안은 두 엄마를 보자마자 웃으며 달려왔다.

“내 이름표, 선생님이 칭찬했어.”

이름표 종이가 바람에 흔들렸다.

두 글자만으로도, 교실 한가운데에 서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루시아가 이름표를 만져 보았다.

“오늘이 첫 기록이네.”

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는 아직 임시였지만

지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임시가 아니었다.


파도는 낮고 잔잔했다.

해풍이 학교 운동장을 비닐하우스 쪽으로 밀어내며

세 사람 가슴팍에도 엷게 스며들었다.

숨은 조금씩 깊어졌고,

삐뚤빼뚤한 두 글자는

교문을 넘어, 하늘 쪽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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