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통장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적금 대신 흰 봉투, 그리고 두 칸짜리 집의 꿈

by 지구 외계인


햇볕이 강하게 들던 토요일 정오,

읍내 농협 지점 자동문이 열리고 두 엄마와 지안이 들어섰다.

창구 안은 에어컨 냉기에 가득 차 있었다.

여름 토마토밭에서 올라온 체온이 순간 식으며

손끝이 얼얼해졌다.


창구 직원이 환한 미소로 물었다.

“통장 만드러 오셨어요?”

루시아가 준비해 온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지안 이름으로 적금하고 싶어요. 매주 현금으로 부을 거예요.”


직원은 서류를 넘기다 페이지를 멈췄다.

“주민등록번호가… 비어 있는데요?”

마이라가 조용히 설명했다.

“출생신고를 못 했어요. 교육청 임시 학번으로 학교만 다니고 있어요.”

직원의 미소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복사본 서류를 덮으며 말을 아꼈다.


“죄송합니다. 금융실명법상 계좌 개설은

국적·생년월일이 확인돼야 가능해요.”

투명 유리 너머 공기가 뚝 떨어졌다.

지안이 두 손으로 종이봉투를 꼭 쥐며 중얼거렸다.

“우리 적금… 못 해?”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태양이 다시 달궈진 공기로 몰려왔다.

은행 앞 가로수 그늘에 서서

봉투 속 현금 뭉치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안은 뺨이 붉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집부터 바꾸자.

방이 두 칸이면 책상이랑 침대랑 나눠서 놓을 수 있어.”


말끝에 묘하게 단단한 힘이 실렸다.

루시아가 놀라 지안을 바라보았다.

“두 칸짜리 집?”

“응! 친구들처럼 방에 창문 두 개 있는 집.”


마이라는 지안의 손을 잡았다.

“통장은 못 열어도, 봉투는 열 수 있지.

‘이사 적금 봉투’ 만들자.”



다음 날 새벽,

두 엄마는 천막 아래 작은 선반을 놓고

하루 품삯 중 4만 원씩을 흰 봉투에 접어 넣었다.

봉투 앞면에는

<두 칸짜리 집>

자잘한 토마토 잎 먼지가 묻은 글씨가 쓰였다.


“현금은 도둑맞으면 어쩌지?”

루시아가 물었다.

장 씨가 며칠 전 버린 낡은 금속 공구 상자가 생각났다.

마이라는 그 상자를 씻어

자물쇠를 이중으로 달았다.

“은행 금고 대신 해풍 금고.”


며칠 뒤,

지안은 성당 보육방에서 그리기 숙제를 받았다.

‘우리 집’이라는 주제 아래

지금보다 넓은 방, 창문 두 개,

빛이 많이 드는 책상, 엄마 둘의 웃는 얼굴을 그렸다.

보라색 크레파스로 굵게 된 ‘집’ 테두리가

종이 가장자리까지 이어졌다.


수녀가 그림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사 계획이 있니?”

지안은 빙긋 웃었다.

“곧이요. 저희만 아는 금고에 돈 넣고 있어요.”


그날 저녁,

컨테이너 벽엔 지안의 그림이 붙었다.

해풍이 스칠 때마다 종이가 살짝 흔들렸지만

보라색 집은 떨어지지 않았다.


밤마다 해풍 금고 뚜껑을 확인한 뒤

두 엄마는 지안과 한 이불에 누웠다.

창문 밖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가 자주 들렸다.

멈춤 없는 바다처럼

봉투 속 지폐도 조금씩 늘어가리라 믿으며

세 사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사할 날을 상상했다.

방 두 칸, 창문 두 개,

그리고 여전히 성 없이 꿋꿋이 적힌 이름표.

숫자가 없는 삶이라도

바람이 불 때마다

새집 창문이 활짝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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