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보증금 없는 창문

깨끗한 아파트라는 말, 사라진 봉투, 그리고 텅 빈 복도

by 지구 외계인


바다 바람이 덜 차가워진 4월 어느 토요일,

읍내 버스터미널 근처 부동산 앞에서 기다란 그림자가 손짓했다.

“이 동네에도 새 아파트가 곧 입주라는데,

잔여 세대 전세만 미리 잡으면 월세 걱정 끝이라니까요.”

반갑게 인사했던 중개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외국인 신분이라도 현금 보증금만 있으면 입주 가능해요.”


두 엄마는 멈칫했다.

서류 없는 삶에 낯선 ‘전세’라는 단어가 낯설고 달콤하게 빛났다.

현관 중문이 두 겹, 방이 세 칸,

창문에서 바다가 보이는 모델하우스 사진이 흐릿한 태블릿 화면에 뜨자

지안은 “우리 집이랑 창문이 다섯 개네!” 하고 환호했다.


장롱 속, 해풍 금고 속 봉투는 열아홉 장이 되었고

봉투마다 ‘전세’라는 손글씨가 새로 붙었다.

두 사람은 한 주, 두 주를 더 일하고

마침내 모든 돈을 한 봉투에 모아

중개사무소에 내밀었다.


“계약서는 내일 등기 서류랑 같이 드릴게요.

입주 청소 끝나면 키도 받아두고.”

중개인은 봉투를 서류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때부터 마음 한편에 스며든 묘한 불안은

연기로 번지듯 서서히 퍼졌지만

두 사람은 “믿어도 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틀 뒤,

약속한 시간에 찾은 모델하우스 앞은 인기척이 없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로비 관리실엔 ‘임시휴무’라는 간이 팻말만 달랑 걸렸다.

전화기 화면에는 ‘서비스가 중지된 번호’라는 짧은 안내성 음성이 반복됐다.


마이라는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감싸 쥐고

목구멍이 뜨겁게 좁아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한 번 더 찾아보자. 내일 다시 오면…”

루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계약서도, 서류도, 다 없잖아.”


그러고는

메고 있던 가방 지퍼를 내려

텅 빈 속을 보여 주었다.

봉투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풍처럼 무거운 침묵만 남았다.



해가 지기도 전에 남해로 돌아온 길,

하우스 끄트머리엔 아직 토마토 꽃이 노랗게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철제 의자에 앉아

장갑을 벗지도 못한 손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돈은 없지만 지안은 있어.”

마이라가 힘겹게 웃어 보였고

루시아는 한숨을 삼킨 채

지안이 그려 붙인 다섯 칸짜리 ‘새집’ 그림을 바라보았다.

종이 모서리가 바람에 파닥거리다가

찢어질 듯 흔들렸다.


지안은 아직 사정을 모른 채

붉은 토마토를 따서 엄마들 손에 얹어 주었다.

“이거 제일 달콤해.”

두 사람은 억지로라도 씹어 삼켰다.

그 달콤함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어쩐지 더 쓰게 느껴졌다.



밤이 되자

컨테이너 천장은 파도 소리 같은 바람에 한껏 요동쳤다.

해풍 금고는 비어 있었고

‘전세’라 적은 포스트잇만 덩그러니 남았다.

루시아가 메모를 떼어내려다

다시 테이프를 눌러 붙였다.

“두 칸짜리 집, 다시 모으면 돼.

다음엔 낡아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장 씨한테도 물어보고.”


마이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이 깨지 않도록

봉투가 있던 자리 위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통장은 없었고

이젠 봉투도 없었지만

세 사람을 묶는 숨은 아직 눅눅하게 남았다.

비닐 지붕이 흔들리며

달빛이 구겨진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사라진 돈 대신 스며드는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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