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다시,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사라진 봉투 자리, 시작선으로 돌아온 두 엄마와 환하게 웃는 지안

by 지구 외계인


바닷가 밤공기엔 아직 지난일의 짠내가 엷게 남았다.

그러나 새벽 사분, 해풍은 어김없이 비닐하우스 문을 흔들었다.

문을 여는 손놀림이 며칠 전보다 한결 단단했다.

모은 돈을 한순간에 잃은 자리엔

다시 흙냄새와 잎사귀 부딪는 소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루시아가 작업용 바구니를 꺼내며 웃었다.

“우린 늘 처음부터였지.

이번이 두 번째 처음일 뿐이야.”

마이라는 한숨 대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파도 냄새가 폐 끝까지 차오르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다시 모으자. 이번엔 매주 봉투 두 배로 넣어.”

“허리 좀 부러지겠는데?”

루시아는 장난스럽게 웃었고

마이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어깨 부러지는 것보다 낫잖아.”



학교 끝난 오후,

지안은 보라색 가방 끈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흔들며 달려왔다.

컨테이너 앞에서 엄마 둘을 보자

가방이 뒤로 확 젖혀질 만큼 활짝 팔을 벌렸다.

“나 오늘 과학 시험 85점이야! 할아버지가 또 딸기 한 상자 주신대.”

루시아가 놀란 척 눈을 크게 뜨자

지안은 더 크게 웃었다.

“점수보다 웃어 준 두 분이 더 좋아.”


지안이 자꾸 엄마들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라는 말을 글자 대신 살결로 적는 듯 부드러웠다.

마이라는 아이의 손을 가볍게 잡고

이번엔 먼저 털어놓았다.

“우리가 조금 속았어. 네가 그린 새집은 당분간 종이 속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지안은 잠깐 눈을 깜빡였지만, 곧 환하게 웃었다.

“그럼 더 크게 그리면 돼. 칸 두 개짜리가 아니라, 세 개짜리로!”


두 엄마의 웃음이 거의 동시에 터졌다.

허전함이 아니라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

지안의 이마에도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지만

입꼬리는 여전히 맑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저녁 식탁 위엔 장 씨가 주고 간 딸기와

텃밭 상추가 올려졌다.

지안은 딸기를 반으로 잘라

빨간 단면이 서로 마주보게 접었다.

“이건 하트야. 두 번 접어야 하트가 돼.”

루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안은 장난스럽게 설명했다.

“우린 두 번 시작하니까, 두 번 접어야 사랑이지.”


바람이 컨테이너 벽을 스치며

도마 위 상추 잎을 살짝 흔들었다.

마이라는 그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새하얀 봉투 한 장을 넘겨 보였다.

앞면에는 또박또박 새 글씨.

<지안이 커가는 집>

전보다 글씨가 더 크고 뚜렷했다.


“이번엔 네 이름을 더 크게 넣었어.

우린 네가 커지듯이 집도 키울 거야.”

지안은 손가락으로 봉투 글씨를 따라 쓰며

입술 끝에 웃음을 걸어두었다.

환한 웃음이 주홍빛 딸기보다 더 붉고 달콤했다.


새벽 두 시,

지안이 잠든 뒤 두 엄마는 다시 금고 상자 앞에 앉았다.

첫 주 봉투엔 아직 만 원짜리 세 장뿐이었지만

두 사람은 낡은 상자를 닫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풍이 또 한 번 창문을 두드렸다.

마치 박수를 치듯,

다시 시작하는 삶을 축하하듯.


숫자로 잴 수 없는 숨과

성 없이 적힌 이름,

그리고 한 번 더 커진 웃음이

밤공기 속에서 부드럽게 번졌다.

길을 잃는 날이 있어도

세 사람 목소리가 만나는 곳마다

처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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