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길 끝에 빈집이 있었다

여전히 모으는 주간 봉투, 졸업장을 쥔 지안, 그리고 월세가 필요 없는

by 지구 외계인


바닷바람이 여느 때보다 따뜻해진 봄.

토마토 순은 벌써 풋내를 풍기지만 하우스 비닐은 아직 덮여 있다.

루시아는 새벽 일 끝에 장갑을 벗자마자

금속 공구 상자 자물쇠부터 확인한다.

‘두 칸짜리 집’이라 쓴 흰 봉투가 벌써 열다섯 장.

지폐는 땀에 눅진해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안은 이제 중학교 신입생이다.

졸업식 날, 김 선생이 건네준 졸업장 속

두 글자 이름 아래에는

여전히 임시 학번이 적혀 있지만

지안의 글씨로 적은 사인만은 당당했다.

“이제 중학생이니까, 내가 용돈 봉투를 꾸며 줄게.”

지안은 팡팡 부푼 보라색 마커로

상자 옆면에 별을 그려 넣었다.


장 씨는 어느 날 작업 쉬는 시간

음료 자판기 앞에서 두 엄마를 불렀다.

“읍내에서 한참 들어간 산골에

노부부가 두고 간 빈집이 하나 있다.

지금은 흙먼지만 가득한데

농장 일 계속해 주면 살라고 허락했다.”

마이라는 깜짝 놀라 물었다.

“월세는요?”

“내가 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뭘.”


그날 밤,

해풍 금고 위 봉투를 모두 꺼냈다.

두 엄마는 지폐를 눌러 펴며 세었다.

“전기 공사, 수도 공사, 페인트—

그래도 남는다.”

루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월세 없는 집이라니, 잘만 하면

지안이 방 하나, 우리 방 하나, 창문 두 개.”


일요일, 세 사람은 장 씨 트럭 짐칸에 올라

해안도로를 달리고, 다시 산길을 돌았다.

길 끝에 서 있는 작은 흰 집.

문짝은 삭았고 창문은 먼지로 흐렸다.

그러나 처마 밑엔 바다에서 밀려온 듯한

소금기 어린 바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지안은 마른 낙엽을 밟으며

현관 마루에 앉아 창문을 밀어 보았다.

먼지가 푹 날아오르자 기침이 터졌지만

파란 하늘이 틀 안에 드러나는 순간

아이의 목소리가 바람보다 먼저 울렸다.

“여기 좋아! 여기 살자.”


마이라는 현관 기둥을 쓰다듬었다.

“붓질 몇 번이면 흰 벽이 다시 숨쉴 거야.”

루시아는 뒤뜰을 돌아보고 손뼉을 쳤다.

“상추랑 고추는 여기 심자. 학교 마치고 지안이랑 따면 돼.”

세 사람의 말이 겹치며 작은 마당이 왁자했다.


집 안으로 비치는 햇살에

먼지 입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지안은 가슴에 달고 온 이름표를 살짝 잡아당겼다.

중학교 교표 밑에서

‘지안’ 두 글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은 여전히 숫자를 요구하지만

아이의 목소리가 먼저 빛나는 곳.

그곳이 새집이면 충분하다.


해질녘, 컨테이너로 돌아와

해풍 금고 자물쇠를 한 번 더 잠그고

‘집 수리 예산’이라고 새로 적은 노란 포스트잇을 붙였다.

여전히 은행 통장은 없지만

봉투는 밤마다 불어나는 파도처럼 두꺼워진다.


창문 너머 바다는 제자리서 일렁이고,

바람은 오래 묵은 비닐을 스치며 속삭인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도 좋다.

월세 없는 작은 흰 집,

창문 두 개 사이로 드는 햇빛,

그리고 세 사람 입김이 고르게 이어진다면

그곳이 곧 ‘등록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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