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 대신 흰 봉투, 그리고 두 칸짜리 집의 꿈
햇볕이 강하게 들던 토요일 정오,
읍내 농협 지점 자동문이 열리고 두 엄마와 지안이 들어섰다.
창구 안은 에어컨 냉기에 가득 차 있었다.
여름 토마토밭에서 올라온 체온이 순간 식으며
손끝이 얼얼해졌다.
창구 직원이 환한 미소로 물었다.
“통장 만드러 오셨어요?”
루시아가 준비해 온 작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지안 이름으로 적금하고 싶어요. 매주 현금으로 부을 거예요.”
직원은 서류를 넘기다 페이지를 멈췄다.
“주민등록번호가… 비어 있는데요?”
마이라가 조용히 설명했다.
“출생신고를 못 했어요. 교육청 임시 학번으로 학교만 다니고 있어요.”
직원의 미소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복사본 서류를 덮으며 말을 아꼈다.
“죄송합니다. 금융실명법상 계좌 개설은
국적·생년월일이 확인돼야 가능해요.”
투명 유리 너머 공기가 뚝 떨어졌다.
지안이 두 손으로 종이봉투를 꼭 쥐며 중얼거렸다.
“우리 적금… 못 해?”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태양이 다시 달궈진 공기로 몰려왔다.
은행 앞 가로수 그늘에 서서
봉투 속 현금 뭉치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지안은 뺨이 붉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우리 집부터 바꾸자.
방이 두 칸이면 책상이랑 침대랑 나눠서 놓을 수 있어.”
말끝에 묘하게 단단한 힘이 실렸다.
루시아가 놀라 지안을 바라보았다.
“두 칸짜리 집?”
“응! 친구들처럼 방에 창문 두 개 있는 집.”
마이라는 지안의 손을 잡았다.
“통장은 못 열어도, 봉투는 열 수 있지.
‘이사 적금 봉투’ 만들자.”
다음 날 새벽,
두 엄마는 천막 아래 작은 선반을 놓고
하루 품삯 중 4만 원씩을 흰 봉투에 접어 넣었다.
봉투 앞면에는
<두 칸짜리 집>
자잘한 토마토 잎 먼지가 묻은 글씨가 쓰였다.
“현금은 도둑맞으면 어쩌지?”
루시아가 물었다.
장 씨가 며칠 전 버린 낡은 금속 공구 상자가 생각났다.
마이라는 그 상자를 씻어
자물쇠를 이중으로 달았다.
“은행 금고 대신 해풍 금고.”
며칠 뒤,
지안은 성당 보육방에서 그리기 숙제를 받았다.
‘우리 집’이라는 주제 아래
지금보다 넓은 방, 창문 두 개,
빛이 많이 드는 책상, 엄마 둘의 웃는 얼굴을 그렸다.
보라색 크레파스로 굵게 된 ‘집’ 테두리가
종이 가장자리까지 이어졌다.
수녀가 그림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사 계획이 있니?”
지안은 빙긋 웃었다.
“곧이요. 저희만 아는 금고에 돈 넣고 있어요.”
그날 저녁,
컨테이너 벽엔 지안의 그림이 붙었다.
해풍이 스칠 때마다 종이가 살짝 흔들렸지만
보라색 집은 떨어지지 않았다.
밤마다 해풍 금고 뚜껑을 확인한 뒤
두 엄마는 지안과 한 이불에 누웠다.
창문 밖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가 자주 들렸다.
멈춤 없는 바다처럼
봉투 속 지폐도 조금씩 늘어가리라 믿으며
세 사람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사할 날을 상상했다.
방 두 칸, 창문 두 개,
그리고 여전히 성 없이 꿋꿋이 적힌 이름표.
숫자가 없는 삶이라도
바람이 불 때마다
새집 창문이 활짝 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