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5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일본 아소산에서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일본인 A의 몸을 2박 3일 동안 빌리기로 합니다.
"48시간에 5천 달러? 38살에 오토바이 몰 줄 아는 남자?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난 지난번에 42살 아저씨 빌리는 데 거의 만 달러 가까이 들였는걸. 배가 남산만 했어. 식탐이 얼마나 심하던지, 돌아서면 배가 고파지는 몸이라 여행 내내 먹은 기억밖에 없어. 차라리 비행기 타고 내 몸으로 직접 왔으면 하고 생각했다니까. 원래 그렇게 많이 들어. 운이 좋네. 축하해."
J가 일본인 A를 예약했고 간밤엔 통화도 했다고 이야기하니 스미스는 잘했다고 추켜세워 줬다. 너무 큰돈을 들인 게 아닌가 싶었는데, J는 스미스의 말을 듣고 슬그머니 안심했다.
"그나저나 외국에서 오토바이 여행이라니, 멋진 걸"
"나도 일이 이렇게 착착 풀릴 줄은 몰랐네. 다 자네 덕이야. 고마워"
"그런데 왜 하필 오토바이야? 굳이?"
"아, 동영상에서 오토바이 타는 남자를 봤는데 멋있더라고. 요즘 이상하게 옛날 생각이 많이 나기도 하고"
"역시 갱년기였구먼"
스미스는 킬킬대며 J를 놀렸다.
"여행 가서 연애라도 해보는 건 어때, 서른여덟이면 젊은 나이잖아. 어디 보자, 15살이나 젊어지는 거네?"
스미스가 뭘 상상했는지 몰라도 왠지 음흉한 표정이 되어선 J에게 말했다. J는 일본에서 자신이 '15살이나 젊어진다‘는 건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터라 잠깐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15년 전이면 딱 엘리자베스가 죽은 해다.
스미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유리 생각나네."
"엥, 뜬금없이 갑자기?"
"응, 유리가 한국 사람이었잖아. 일본하고 한국하고 바로 근처 아냐?"
"아 그랬지. 유리 씨는 잘 살지?"
"응, 뭐 잘 살겠지, 뭐 흥"
유리는 스미스의 첫 번째 부인이다. 대학 동창이던 두 사람은, 아마도 상대방이 제2의 부모가 되어 자신의 응석을 받아줄 것이라 '서로' 기대하고 결혼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니, 아직 자신들은 '태어날 아이'의 부모가 될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딱 한 달 만에 친구 사이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하여튼 그 뒤로 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잘만 지내는 것에 반해, 스미스는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가끔 저렇게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세상에 아버지가 될 준비를 해놓고 결혼하는 남자가 어디 있냐고, 자기는 억울하게 이혼-당한 거라며 ) 본인은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결혼하고도 말이다.
스미스와 J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친할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회사엔 자기들을 끼워줄 곳이 더 이상 없단 걸 눈치채고, 알아서 붙어지내고 있는 중이다. 지내다 보니, 두 사람에겐 구질구질하게 첫 번째 부인 (혹은 유일한 부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길 좋아한다는 점, 가족 없이 처량한 신세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이가 좀 더 돈독해졌다. (스미스는 엄마가 다른 딸이 둘 있었지만 아빠를 찾지 않는다)
두 사람은 연애에 있어서도 궁색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스미스는 의욕은 넘쳤으나 진열대에 올려지지 못할 악성 재고가 되어가는 중이었고, 반대로 J는 아직 가끔 이거 얼마냐는 문의는 받았지만, 판매자의 의욕이 다소 부족한 편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 다 퇴출을 앞둔 신세가 된 건 마찬가지다.
J는 50세 이후의 만남은, 너무 탁한 나머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 뒤로 뛰어들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환호하며 시작하더라도 곧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용기와 의욕을 잃어버리고, 금방 서글픈 신세가 되곤 했다. 그 뒤에 찾아오는 고단함과 실망은 사람을 폭싹 늙게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50대의 불륜은 뜨겁긴 해도 연애보단 형편은 나아보였다.
그러고 보니 15년 전의 연애는 참 좋았다. 40대의 시큼한 냄새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20대의 투명한 느낌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콘돔을 써 달라며, 렌탈한 상태라는 걸 꼭 밝혀달라며 부탁했던 '풋풋한' A의 얼굴이 떠올라서, J의 머릿속에 오토바이 외의 것들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15년이 젊어져도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J는 포기했다. 스미스와 유리가 함께 찍은 사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부터 부풀어 있던 스미스와 기껏해야 50kg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유리가 함께 한 사진을 볼 때마다 J는 어색하고 불편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미녀와 야수, 혹은 주토피아에서 닉과 쥬디의 밤을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하게 느껴져서 두 사람에게 미안해졌다. J는 그랬다. 이상하게 동양인 여성들과 성적인 무엇을 하는 것이 큰 죄를 짓는 것 같이 느껴졌었다.
'15년이나 젊어질 줄 알았다면 유럽 쪽으로 갈걸 그랬나'
J는 썩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사고를 치려면 더 크게 칠 걸.
예전에 J는 엘리자베스에게 이런 이야길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J를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라며 놀렸었다. 하지만 그녀도 아시아인들은 가끔 너무 어리게 보이긴 한다고, 자신이 꼭 소아성애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뭘 더 하기가 어려운 경험은 있었다고 고백했다.
"동양인들은 어느 순간까진 기껏해야 대학교 신입생 정도로 보이다가 순식간에 노인으로 바뀌어져 있더라. 심지어 성격까지 말이야."
또다시 J의 머릿속이 엘리자베스 생각으로 차오른다. 지난번 AI가 오래된 노래를 꺼내준 이후부터 J의 무의식 어딘가에 엘리자베스가 단단히 자리를 잡아 버린 것 같다.
J는 엘리자베스가 어떤 식당에 턱하니 앉아 끈덕지게 주문을 받으러 오기를 기다리며, 직원에게 눈치를 주는 광경을 상상했다. 심지어 그 식당은 아직 영업 전이라서 전등도 몇 개만 켜 놓은 터라 어둑한데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종업원을 난처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건지도 모른다.
물론, 종업원 'J'는 누가 쳐다보고 있거나 말거나, 뒤통수가 따갑거나 말거나, 아직 일을 시작할 생각이 없다.
J는 여행에 대해 궁금했던 것에 대해서나 스미스에게 묻기로 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랜만에 오토바이를 모는 거라 걱정이 되고, 혹시라도 오토바이에 실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짐을 어떻게 싸야 할지 모르겠어."
"아이고, 별걱정을 다 하신다. 우리가 가는 게 아니잖아. 그쪽에서도 '자기 몸'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준비해서 보내놓을걸. 어차피 우리가 여기서 준비해 봤자 그쪽 사정은 어찌 될지 모르니 크게 도움 안 될걸. 맘 편히 그냥 영혼만 가."
스미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배탈이나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
"너보다 젊다며? 게다가 그 몸이 살던 곳이니까 익숙한 거 먹는 건데 배앓이할 리 없지. 그리고 아프더라도 우리가 예상 한 거랑은 완전히 다른 쪽으로 아플 수도 있어. 무좀이 심하다던가, 성병이 있어서 소변 눌 때마다 고통스럽다든지. 크크크"
스미스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J는 큰돈을 들이긴 했지만, 호텔에서 몸을 바꾸기로 한 건 확실히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네가 일본인의 몸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게 될걸. 그 친구 담배 태운다디?"
"응 담배 태우는 거 같더라."
"아마 너도 여행 내내 담배 생각이 날 것이다. 흐흐흐. “
스미스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J는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필요한 짐들을 대충이라도 거실에 한 번 내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불편을 겪을 사람은 자기니까. 아, 아닌가? 일본인인가? 어쨌든.
일단 추워질 수 있으니, 외투를 계절 별로 내어놓고, 비가 내릴 수도 있으니, 비옷도 하나 꺼냈다. 다른 옷들도 더 챙겨 가고 싶었지만, 아마 일본인에게 클 것 같아서 관뒀다.
창고 어딘가에서, 오토바이를 처음 탈 때 썼었던 무릎보호대, 팔꿈치 보호대 같은 초보자용 안전 장비도 찾았다. 아무리 일본인의 몸이 알아서 오토바이를 몰아 줄지 몰라도 자신은 초보자니까, 사고가 나더라도 몸을 다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J는 내심, 자신의 영혼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일본인의 신체에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 '염려'하고 있었다)
J는 평소에 쓰던 화장품과 선크림도 가져왔다. 트래킹을 해야 될 수도 있으니, 신발을 챙길까? 하다가, 발 치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갖다 놓았다. 대신에 물통과 포터블 스피커는 꺼내놨다.
오토바이 운전을 하면 전화 통화를 하기는 어려울 테니 핸드폰은 챙기지 않기로 했다. 배탈은 안 나겠지만 일본 음식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으니 음식 캔을 두세 종류 챙기고, 스미스는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감기몸살약과 설사약도 챙겼다.
그리고 평소 잘 듣는 수면제, 수면 안대, 보습제도 가져왔다.
그러고는···,
거실에 내어놓은 짐들을 보니 막막했다. 이걸 보내는 것도 일이지만, 이걸 다 보낸다 해도 충분할 것 같지 않았다.
'이거 여행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의 몸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제야 J는 사람의 몸을 빌려 여행한다는 것이 단순히 휴머노이드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 이상이 될 것이고, 어쩌면 여행의 성격까지 좌지우지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J는 필요한 게 있으면 일본에서 사서 쓰기로 마음먹고, 작고 오래된 그레고리(Gregory) 등산 배낭만 하나 보내기로 했다. 도저히 오토바이를 못 몰 것 같으면 트래킹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토바이 운전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 만한 크기로 고르다 보니 짐이 얼마 안 들어갔다. 발렌드레(Valandre) 외투랑 비옷, 물통 정도 넣고 나니 끝이었다. 한겨울 패딩은 과한 것 같기도 했지만, 어중간한 걸 보내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면 안대나 오토바이 안전 장비가 마지막까지 고민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뺐고, 보호장비가 필요한 지경이라면 오토바이를 안 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J는 예약한 호텔로 전화해 10만 엔을 이체할 테니 도착하면 자신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들어간 일본인에게 전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필요한 것들을 현지에서 사 쓰려면 현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호텔 직원이 흔쾌히, 가능하다고 말해서 곧 이체했다. 얼추 직접 가는 것보다 돈이 더 들어가고 있었다.
"더 부탁하실 것은 없을까요?"
J는 일본인 A가 이야기한 것이 생각이 났다.
"아, 제가 렌탈하기로 한 분이 오토바이를 몰고 올 예정입니다. 저도 그 오토바이로 여행할 예정이고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오토바이 주차장이 따로 있으니 렌탈하시는 분이 도착하시면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제 짐을 담은 배낭을 하나 보내려고 합니다. 호텔 주소로 보내면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렇게 해 주셔도 됩니다. 그 외에는 도와드릴 것이 없을까요?"
"네, 필요한 게 생기면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고객님이 방문하시는 동안 날씨가 좋을 것으로 예보되고 있습니다. 4월 5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