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소산, 오토바이, 그녀 1-6
* 지난 이야기
: 영혼을 첨부파일 보내듯 인터넷으로 전송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기계에 넣을 수도 있게 된 2040년, 주인공 J는 영혼으로만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자기 몸을 맡겨둘 병원을 방문합니다.
4월 5일, J는 자기의 몸을 입원시킬 병원에 와 있다.
오후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병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너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J는 십 년은 쓰였을 법한 낡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 아무렇게나 놓인 홍보물들을 대충 넘겨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요즘엔 입원을 하더라도 몸만 맡기는 것이 유행인지, 광고의 대부분이 영혼 분리 기술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델의 얼굴 위로 '마취약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라던지 '시술받는 중에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쓰인 문구를 보며, J는 '이쪽이 돈이 좀 되나 보네'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J는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와는 구면이다. 의사는 영혼 없이 몸만 입원시키는 것과 관련해 추가로 작성해야 할 동의서가 있다며 서류 몇 장을 건넸다. 그중에는 홀로 남겨진 몸을 2박 3일 동안 금식 상태로 두는 것에 동의하느냐를 묻는 것도 있어서, 뜻밖에 다이어트를 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J는 기분 좋게 서명했다.
J가 농담조로 '본인이 없는 동안 자기 몸을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듣은 의사는 알겠다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J는 의사가 자기 앞에서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의사 입장에서도 주인이 떠난 몸을 다루는 게 부담이 적은가 보군'라고 생각했다.
진료실 밖으로 나와보니 휴지통처럼 생긴 로봇이 J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랑한 목소리로 '병동까지 안내해 드리겠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로봇의 뒤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닌 끝에 J는 오프라인(몸에서 영혼을 분리한 상태) 환자 전용 병동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방금 건너온 본관과는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인테리어도 최근에 신축한 것인지 퀴퀴하던 밖과 달리 최신식이고 그럴싸했다.
둥글고 넓은 대기실은 천장이 높아 시원시원했고, 아마도 의도했을 테지만 전체적으로 꼭 공항의 탑승장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건물 내부는 일반적인 직사각형의 박스 형태가 아니라 반구형이었고, 벽체를 반투명한 재질로 마감하고 내부에 설치한 조명을 일렁이듯 빛을 내게 만들어 꼭 벽 건너편에 공항을 오가는 승객들을 보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근무하는 직원도 스튜어디스를 떠올리게 하는 근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의 표정도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받게 될 시술이나 치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한 설렘과 흥분, 걱정이 더 크게 느껴졌다.
'왠지 근처엔 면세점도 있을 것 같은걸'
대기실을 사이에 두고 J가 들어온 입구 반대쪽에는 낮은 조도로 밝히어 은밀하게 느껴지는 긴 복도가 보였는데, 아마도 분리 시술실과 입원실로 연결되는 길 같다고 J는 짐작했다. 아마도 이곳을 지은 건축가는,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 복도를 보며 탑승교(공항 터미널과 비행기 출입구를 연결하는 다리 모양의 통로)를 떠올려 주길 바랐을 것 같다.
천장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화면엔 영혼 분리 시술에 대한 소개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J는 영상보다 비행기 이착륙 현황이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감동적인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이 전환되고 휠체어에 탄 전신마비 환자가 누군가와 체스를 두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2024년, ’뉴럴링크‘라는 회사에서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칩을 개발해 사람에게 이식했습니다. 칩은 뇌에서 나온 전기신호를 기계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환자는 이식된 칩으로 컴퓨터를 조작해 게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원시적 이게도 톱으로 머리뼈를 열고, 물컹거리는 뇌 조직 안에다가 직접 칩을 심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애써 설치한 칩은 뇌가 '이물(異物)'로 판단하고 내보내려 하는 탓에 연결마저 불안정했습니다."
실망하는 관객들의 소리가 효과음으로 나오며 장면이 전환되었다.
"이제 더 이상 몸 안에 칩을 심지 않아도 됩니다. 피부 밖에서도 뇌의 신호를 감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신율을 높이고자 패드를 피부에 최대한 밀착하여 부착해야 하는 탓에, 실험자는 민머리가 되어야 했지만, 생각만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고,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면에 사진이 띄워졌습니다.
이때부터 피부 밖 신체의 전자기장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세 번째 영상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게 된 기계'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화면에는 눈을 감은 요리사가 건너편 방에 누워 '기계를 통해' 간을 보고 '기계로'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동안 뇌로부터 수신만 하던 컴퓨터가 반대로 송신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던 신호를 기계 언어(Code)로 변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공 눈이나 인공 귀와 같은 장치를 설치해 감각을 얻는 것보다 진보된 기술입니다. 인공장기는 신경다발을 통해야만 뇌에 연결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은 컴퓨터의 명령어를 뇌에 바로 전달하는 것이니까요. 이제 기계에서 보내는 정보는, 마치 신경을 통해 수집한 것처럼, 똑같이 뇌에서 해석됩니다.
카메라로 수집된 정보를 대뇌피질의 시각영역에 보내면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느껴지고 처리됩니다. 그것이 수만리 떨어진 곳이거나 심해 깊숙한 곳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로봇을 달과 같은 곳에서 조정하는 작업도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물론 통신은 원활해야겠지만요.
그리고 뇌와 기계의 쌍방향 소통 기술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불가사의했던 뇌의 구조를 우리에게 익숙한 '기계의 구조'로 바꾸어 조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뇌가 어디에 무엇을 저장하고 있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보는 연구는, 컴퓨터로 1이라는 숫자를 넣었을 때 반짝이는 뉴런을 1이라고 명명하는 식의 지루한 작업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끈기 있게 뇌의 수많은 거리를 탐사하고 주소를 부여했다. 860억 개의 뉴런과 그 뉴런들이 신호를 주고받으면서 생겨나는 수백조(10^12) 개의 시냅스들은, 인내심 많은 과학자들의 수고로 상위 폴더, 하위 폴더, 폴더 내 파일, 응용 프로그램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직관적으로, 그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네 번째 영상은 '인간의 운영체제(OS)는 과연 어디에 설치된 걸까?'라는 제목과 함께 시작됐다.
"기계를 통해 뇌를 직접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뇌 안에 보관된 기억까지 꺼내어 볼 수 있게 됩니다. 비록 그 용량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엔간한 성능의 컴퓨터로는 엄두도 내기 어렵지만 이제 숭고한 뇌를 일종의 '외장하드'처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마치 파일 탐색기와 같은 '창'을 띄워서 말입니다. 어느 독재국가에서는 사람의 뇌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마음대로 편집하는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곧 본인들의 자아, 즉 인간성의 본질 또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운영 프로그램이 설치된 폴더를 곧 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숭고하고 소중한 것이니 뇌의 어딘가에 꼭꼭 숨겨져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아마도 마지막의 마지막 퍼즐로 맞춰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 시스템 파일만 찾고 나면 인간은 영생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등장하였습니다. 이미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은 모두 기계로 재현할 수 있으니, 새로운 하드웨어에 뇌를 통째로 옮기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의 뇌에 저장된 모든 정보를 찾아냈음에도, 뉴런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시냅스 패턴에 주소를 붙였음에도 그것들의 합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컴퓨터로 옮겼음에도 그것이 사람의 자아는 되지 못했습니다. 무언가가 부족했습니다. 뇌의 주인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소한 일마저 가상현실에서 생생하게 구현해 낼 수 있었지만, 그것들을 합해도 사람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과학자들은 뇌만 가지고는 인간성을 구현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상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뇌가 아닌 다른 곳에 인간성의 중추가 있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과학자들도 생겨났다. 어떤 과학자는 척수 신경에서, 어떤 과학자는 대장의 점막 세포에서 인간성을 이루는 마지막 조각을 찾으려 시도했으나 다들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 것도 없었고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망했고, 일부의 사람들은 안심했다. 인간이라는 존엄성을 대체 디지털 신호로 변환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입장의 근본주의자들은 인간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이제 중단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답보 상태에서 마침내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의 윤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한 과학자가 인간성은 뇌나 다른 인체의 장기에 있지 않고 피부 표면에 얇게 덮인, 막과도 같은 '전자기장'의 형태라는 것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전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한 곳과 떨어진 곳에서 후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난다는 점, 그리고 그때는 이미 혈액과 산소의 공급이 중단되어 신체 내부의 장기들은 그 기능을 잃은 후라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체 내부에서 그 마지막 조각을 찾을 수는 없다는 논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천재적인 과학자는 신체 외부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생리적, 화학적 신호들이 중간에 섞여 있기는 하지만, 결국 사람의 몸도 전기적 명령으로 움직이는 유기체임에 주목했고, 막 태어난 아기의 피부 표면의 전압과 성인의 표면 전압이 아주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연구를 시작한 끝에 인간성이 숨겨져 있던 곳을 마침내 찾아냅니다.
인간성은 우리 몸의 표면을 둘러싼 전자기장의 형태로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운영체계는 뇌에 하드웨어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원격 서버에서 스트리밍 되는 클라우드 기반의 서비스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탐색기로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영혼(GHOST)이라고 불렀습니다."
J는 화면에 뜬 '사기꾼으로 몰리던 과학자, 영혼의 존재를 마침내 증명하다!'라는 신문 기사 제목을 보고 피식 웃었다.
"영혼은 신체와 분리되어도 일정 동안 기억과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특별한 방식을 통하면 사람들과 대화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기적 신호가 점점 약해지고 공중에 흩어지게 되는데 그런 영혼이 닻을 내려 수십 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다름 아닌 뇌, 그리고 신체의 역할이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보통의 영혼은 신체에서 분리되면(즉, 사망하면) 하루 이내에 흩어지게 마련이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때로 한 달까지도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달라이라마처럼 말이죠!"
다섯 번째 영상은 영혼 분리/유지장치의 발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살아있는 몸에서 영혼을 분리해 내는 법을 알아냈고, 분리한 영혼을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장치도 개발했습니다. 신체가 사망한 이후에도, 전원만 제대로 연결되면 영혼 데이터의 용량과 내용은 실시간으로 변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이죠.
얼마 후 과학자들은 분리된 영혼을 기계에 옮겨 담을 수 있는 법도 개발했습니다. 용량이 크긴 하지만 영혼은 기본적으로는 데이터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J가 이번 여행에서 이용하려 하는, 분리한 영혼을 네트워크에 저장하고, 전송하는 기술이 소개되고 있었다.
"여러 해의 치열한 논쟁 끝에 세계정부는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영혼을 분리하여 저장하고 이송하는 것을 허가했습니다.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은 안전한 가상현실에서 지내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가상현실, 즉 메타버스는 영혼이 '살아'가기에 충분히 적절한 환경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을 가상현실에서 살게 하는 데 꽤 많은 돈이 들긴 하지만요. 몸에 갇혀 제약을 받던 수많은 영혼은 자유를 찾았습니다!
더불어 영혼 전송 기술은,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기대되었습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직접 이동하는 것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에너지 소모가 적기 때문이었지요. 세계 각국은 분리한 영혼을 네트워크로 전송하는 데 필요한 규칙과 방식을 통일시키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혼만 보내어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영혼을 인터넷을 통해 이곳 저것 보낸다는 것에 대해 인간성을 저해하는 기술이라며 비난하고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른 혁신적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분리 기술 또한 결국 사람들의 생활 속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제 '영혼 분리 전송 기술'은 예전의 증기기관의 발명만큼이나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었다.
영상에 말미엔 '본 병원은 영혼 관리 지침을 준수하는 공인된 모범시설'이라는 문장과 함께 병원의 마크가 멋진 이펙트로 띄워지며 끝이 났다.
간호사가 J의 이름을 불렀고 J는 자리에서 일어나 탑승교처럼 보이던 복도로 향했다.
뉴럴링크 '뇌에 칩 이식' 연결부위에 문제…"성능 감소했다 회복"
https://www.yna.co.kr/view/AKR2024050908660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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