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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나라 Oct 26. 2024

1) 인연의 시작

2018년 5월 26일, 나는 한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


내가 결혼을 하다니... 평생 한 번쯤은 상상해 봤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이라니! 이래서 인생은 종잡을 수 없는 모험인가 보다.


결혼식장에서 시아버지 손을 잡고 싱글벙글 입장하는 남편을 보며 나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까?


사실 우리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비즈니스 네트워킹 플랫폼, '링크드인(LinkedIn)'을 나는 나름대로 잘 활용하고 있었다. 구인구직뿐만 아니라 인맥을 쌓는 데 유용했고, 언제 어디서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내 이력서도 종종 업데이트했다. 또 인맥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링크드인이 추천해 주는 인물들과 연결 요청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2017년 1월, 링크드인 추천 인맥으로 연결한 한 사람이 뜬금없이 나에게 영어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연결 요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가워요. 혹시 한국에 사세요?"

솔직히, 링크드인에서 연결 요청을 보내고 나면 ‘수락’이나 ‘거절’ 버튼만 누르는 게 전부였지, 이렇게 바로 메시지를 보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의아해하며 그 사람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은 가늠이 잘 안 되었지만 태국에서 일하고 있는 듯하였다. ‘태국에 사는 사람이 한국에 무슨 볼 일이 있나?’ 싶어 답장을 보냈다.

“네, 저는 한국에 살아요. 혹시 한국에서 비즈니스 하시나요?"라고 물었다.

“한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한국에 에이전트를 고용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당신은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어라, 꽤 진지하네?’ 그래서 나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패션 무역회사에서 해외영업을 하고 있어요. 혹시 어떤 일을 하세요?”

“저는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어요. 독일로 출장을 가신다고 적혀 있던데, 독일 어디로 가시나요? 사실 저도 독일 출신이거든요.”

갑자기 독일? 신기했다. 나는 독일 사람들과 호주에서 같이 일한 적도 있고,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도 독일 거래처와 일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독일 사람들과 인연이 깊다고 생각하여 반가운 마음에 답을 보냈다.

“정말요? 저는 뒤셀도르프로 출장을 가요. 그런데 독일 분이신데 어떻게 태국에 가서 살게 되셨어요?”

그의 답장이 빨랐다. “저는 원래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살다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네덜란드, 멕시코를 거쳐 지금 태국에서 살고 있어요. 당신도 외국 생활을 해본 것 같은데, 맞나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점점 더 흥미로워졌다. 그저 링크드인에서의 평범한 연결 요청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처음엔 짧은 메시지였는데, 날이 갈수록 그 길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현대판 펜팔 친구라도 된 것처럼 매일 메시지가 오고 갔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공통점이 많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마다 서로 깜짝 놀라곤 했다. 나는 외국 생활을 꽤 해봐서 그런지, 상대가 외국인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대화의 중심에는 늘 인간 대 인간의 교감이 있었다. 물론, 문화적 차이는 있었겠지만, 그런 건 대화하다 보면 별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특히 나는 보수적이지 않은 열린 마음을 좋아해서인지, 그의 사고방식과 태도는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긍정적인 말투와 열린 사고방식,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진지한 자세가 참 인상 깊었다. 사실 그는 나보다 9살 많았는데, 그 나이 차이가 오히려 대화에서 성숙함을 더해주었고, 그 점이 나에게 꽤 편안하게 다가왔다.


처음엔 두 줄씩 오가던 메시지가 어느 순간 20줄, 30줄로 늘어났다. 그냥 대화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그 메시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어느새 나에게 작은 설렘이 되어버렸다.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나는 자동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우리는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만큼은 그가 내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신기했다. 외모는 여전히 미스터리였지만, 그가 보내는 메시지 속에서 그의 마음이 아주 단단하고도 따뜻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며, 나와 친구가 되어 기쁘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직접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3개월 동안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이렇게도 사람을 만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의 대화가 깊어지면서, 내 마음도 점점 그를 향해 커져갔다. '아,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어느새 이성적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나와 같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한 감정을 꺼내는 건 두려웠다. 이제까지 좋은 말동무로 지내온 그와의 관계가 어긋날까 봐, 혹은 비행기로 6시간이나 걸리는 거리 때문에 이 모든 게 무의미해질까 봐 마음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휘몰아쳤다. 나는 남자 경험이 없는 초짜가 아니었고, 어떤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력도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이 사람, 뭔가 달랐다. 오로지 대화만으로 나를 이렇게 깊이 끌어당긴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특별했다. ‘내가 링크드인에서 운명을 만난 걸까?’ 하는 기분도 들기 시작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대화한 지 3개월 만에 결국 용기를 내어 내 호감을 살짝 표현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가 내 감정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부담스러워지면? 우리 관계가 깨지면 어떡하지?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다음날... 답장이 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몰려왔다. '내가 너무 급하게 다가갔나?', '그냥 친구로만 생각했나?', '이제 연락이 끊기는 거 아닌가?'라며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밀려왔다.


답장을 기다리던 두 번째 날, 나는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틈만 나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 한심하다고 느꼈다. 그러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을 때, 드디어! 핸드폰에 링크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떴다. 그런데 너무 긴장돼서 바로 열 수가 없었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마시고 나서야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메시지를 열어 보았다. 메시지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한 문장이 있었다.


"나도 당신에게 호감이 있어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불안과 초조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 전화번호를 남기며, 왓츠앱으로 더 자주 연락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당장 그의 연락처를 추가했다. 이제 우리의 대화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직감하며,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지기도 했고 더 떨리기도 했다.


우리는 드디어 링크드인 메시지가 아닌 실시간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음성 통화를 하기로 했다. 무척이나 떨렸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그동안 보던 자막이 갑자기 음성 지원되는 느낌이랄까? 이상하면서도 신기했다. 그의 목소리는 예상한 대로 뭔가 차분하고 진지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뭔가 더 떨렸지만 덕분에 그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다음 관문이 남아 있었다. 드디어! 첫 화상 통화를 하기로 한 것이다!


통화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마치 첫 데이트를 앞둔 사람처럼 거울 앞에서 분주했다. 평소보다 진하게 화장을 하고, 집에서 조명은 어디가 가장 나아 보일지 테스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스로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실감했다.


드디어 통화가 연결되었고, 화면 속 그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주 평온했다. 그는 수영 후 썬베드에 앉아, 물에 젖은 머리를 삐죽거리게 한 채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엄청 찌푸린 표정이었다. 내가 뭘 특별히 상상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얼굴은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별로 외국인 같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나는 떨려 죽겠는데, 그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어서 살짝 당황했다. 나는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냐고 묻자, "햇빛이 너무 강해서 눈을 잘 못 뜨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선글라스를 쓰라고 했더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벗었어요”라며 쿨하게 답하는 그가 어이없게도 귀여웠다. 나는 "괜찮으니 그냥 쓰세요!"라고 했고, 그가 다시 선글라스를 쓰자 찡그림 없이 여유롭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웃겼던 건, 서로 처음 얼굴을 보는데도 외모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에게 외모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는 꾸밈이 없었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줬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얼굴 지원"도 되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로맨스에는 한 가지 큰 장애물이 있었다. 서로 보려면 6시간 비행기를 타야 했고, 공항으로 가고 대기하는 시간까지 더하면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내에서도 서울-부산 거리만으로도 만나기 힘들다는데, 과연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과 비행기까지 타고 만나는 게 가능할까? 게다가 돈도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건 무슨 ‘러브 액추얼리’도 아니고, 정말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때는 그런 현실이 까맣게 잊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서 왓츠앱으로 메시지가 왔다.


“안녕?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고 있어요? 어디예요?”

“네,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오늘은 좀 한가해서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죠?” 그가 물었다.

“네, 당신은 지금 출근했겠네요?” (태국이 한국보다 2시간 느리니까)

“네, 저 한국으로 출근했어요. 점심 먹고 당신 회사 근처 카페로 올래요?”

“뭐라고요? 당신 지금 한국이에요!?” 내가 놀라 되물었다.

“네. 지금 공항에서 그리로 가는 중이에요.”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한국에 왔다니, 반가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내 몰골을 보니.. 오마이갓... 나 오늘 별론데.. 하며 내 얼굴과 차림새를 점검했다. 점심은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도 모르게 조금만 먹고 이를 세게 닦고 화장을 고치고 약속한 카페로 달려갔다. 카페에 도착하자, 정말 그가 있었다! 처음으로 전체 실물을 보았는데, 공항 맞춤형으로 입고 온 편안한 옷차림부터 눈에 띄었다. 이쯤 되니 꾸밈이 없는 게 아니라 꾸미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반면 나는 그를 만나려고 신경을 잔뜩 쓰고 떨고 있었는데 말이다. 뭔가 나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억울했다! 


그의 얼굴은 아주 작았고(내 얼굴보다 훨씬 작았다!), 키는 170 초중반 정도로 평범해 보였지만 그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음성 지원, 얼굴 지원에 이어 실물 지원까지 되니 처음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커피를 시키고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했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대화하던 그 사람이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갑자기 한국에 오게 됐냐고 물었더니, 회사 비즈니스 차 출장 왔다며 겸사겸사 나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점심시간이 짧아서 많은 얘기를 나누진 못했고, 그냥 서로가 신기해서 키득거리다 첫 만남을 마무리했다. 너무 짧은 만남이어서 마치 허깨비라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페에서 잠깐 그를 만났을 땐 솔직히 뭔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일 끝나고 내가 자주 가던 아늑한 선술집으로 그를 초대했다. 저녁이 되고 우리는 소주 한잔을 들고 정식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때, ‘아, 맞다. 이런 사람이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가 주고받았던 모든 메시지, 나눴던 대화, 그리고 그의 모습이 하나로 완벽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는 친구들과 허겁지겁 먹던 안주들도 그날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오롯이 그와의 대화에 빠져들었고, 그와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흥미로웠다. 


많은 대화 후, 선술집을 나와 소화도 시킬 겸 우리는 한강 근처를 함께 걸었다. 밤하늘 아래 한강의 불빛들이 유난히 반짝이는 날이었다. 그렇게 한가롭게 걷고 있던 찰나, 갑자기 옆에서 자전거가 빠르게 지나갔고, 그는 내가 다칠까 봐 순식간에 나를 확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수줍게 그를 바라보았고 그와의 첫 키스를 하게 되었다. 무슨 영화 속 한 장면인 줄! 떨리는 마음과 어색함도 잠시, 그가 말했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듯, 나는 숨을 고르고, 마법이라도 걸린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그날 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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