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우리 관계를 의심하던 내 친구들도 2주마다 한국으로 날아오는 그의 진심을 알아차리며, '이건 진짜 사랑이야'라며 그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우리가 이 험난한 장거리 연애를 잘 버텨내고 있는 걸 보며 "와, 너네 정말 독하다!”라고 감탄을 연발했다. 그리고 우린 독일-한국 커플이라서 자연스럽게 '독한 커플'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이쯤 되니 나도 한 번쯤 그를 직접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말을 이용해 방문을 계획하고, 그가 살고 있는 태국 방콕으로 날아갔다. '독한 커플'답게 이번엔 내가 먼저 그의 마음을 독하게 공략해 보기로 한 것이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그가 살고 있던 아파트로 향했다. 솔직히 그의 공간을 처음 본다는 생각에 은근 기대가 되었다. 그는 멋진 야외 공용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공간은 딱 한 사람이 편히 지낼 만큼이었고, 깔끔히 정리정돈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내가 온다고 해서 치워놨겠지만...
태국의 더위가 장난이 아니어서 우리는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나는 준비해 간 래시가드를 입고 수영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때, 어떤 여자가 탑승해서 남자친구에게 아주 반갑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어라?' 남자친구는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바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나를 소개하지 않는 거다. '뭐야, 나 여기 있거든?' 하며 속으로 생각했고 그 여자가 내리자마자 나는 바로 물었다.
"저 여자 누구야?"
남자친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어, 내가 말했던 전 여자친구의 친언니야. 좀 어색할 것 같아서 소개를 안 했어."
아니, 뭐? 전 여자친구의 친언니라고? 나는 좀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 그래? 근데 자기 동생이랑 헤어졌는데도 저렇게 쿨하게 인사하네? 신기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헤어지고 저렇게 웃으며 인사하기 쉽지 않거든."
남자친구가 웃으며 답했다.
"응, 서양에서는 헤어지고 나서도 쿨한 편이 거 같아."
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전 여자친구'라는 단어만 들어도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웃인데 더 이상 인사를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더 이상 파고들지 않고 대화를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조금씩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야기구나 싶었다.
오랜만에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니 정말 즐거웠다. 마치 어린 시절로 순간이동한 듯 온몸으로 신나게 물을 튀기며 그 순간을 즐겼다. 나는 수영을 잘하지 못해서, 남자친구가 수영하면 그의 등에 얹혀 마치 조종사라도 된 듯 물 위를 떠다녔다. 남자친구의 발동작이 꼭 개구리 같아서 나는 이걸 '개구리 트레이닝'이라고 불렀다. 남자친구는 힘들어 보였지만, 힘들다고 먼저 그만하자고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웃음이 계속 터졌다. 결국, 그는 숨을 헐떡이며 "이거… 한 번만 더 하고 이제 올라가자, 응?"이라고 말했다. 나는 "봐봐. 연애가 이렇게 힘든 것이야.."라고 짓궂게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도 우리에게는 유쾌한 추억이 되어갔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낯선 땅 태국에서 살면서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물어봤다. 그는 처음 6개월이 정말로 고비였다고 고백했다. "음식, 언어, 문화...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어,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국 음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무슨 메뉴를 시켜야 할지 몰랐던 그는 6개월 동안 같은 메뉴만 반복해서 먹었다고 했다. "그게 뭐였는데?"라고 물어보니, 심플하게 돼지고기 덮밥이었다고 했다. 나는 배꼽이 빠질 듯 웃으면서 "이제 태국에서 돼지고기 덮밥 챔피언이겠다?"라고 놀렸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는 한동안 빨래를 할 때마다 옷에서 이상하게 유난히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섬유유연제였다. 알고 보니 6개월 동안 세제가 아니라 섬유유연제로만 빨래를 한 것이었다. "어쩐지 빨래가 깨끗하게 되진 않더라... 하지만 냄새는 정말 좋았어, "라고 멋쩍게 고백하는 그를 보니, 그때의 어리둥절함이 지금은 그저 추억이 된 듯했고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는 태국인들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문화에 점점 매료되었다고도 했다.
태국에서 내가 느낀 것도 비슷했다. 항상 사람들이 미소를 짓고 다니고, 찡그린 얼굴을 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태국의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태국은 부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행복지수를 유지하는 나라로 유명하다. 남자친구가 태국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해줬는데, 정말 흥미로웠다. 그는 "태국의 '살롱'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건 ‘천천히’ 또는 ‘여유롭게’라는 뜻인데, 태국 사람들은 이런 느긋한 삶의 방식을 통해 스트레스와 걱정보다는 작은 즐거움에 집중한다고 해."라고 말했다. 이런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감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았고 한국의 '빨리빨리'와 대조되는 느낌이었다. 또한, 태국은 가족 중심의 문화가 깊이 뿌리 박혀 있어서, 가족과 친구들 간의 강한 유대가 마치 큰 가족 파티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이런 감정적인 안정감이 행복감을 더해주는데, 이게 태국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야"라고 그는 강조했다. 태국사람들은 거의 불교를 믿는데 불교의 가르침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불교는 내면의 평화와 삶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태국인들이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거지."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따로 시간 내서 해야하는 요가나 명상이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 있는 느낌인 듯 했다. 그리고 태국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따뜻한 기후, 저렴한 생활비는 외국인들에게도 크나큰 매력이지만 태국인들에게도 큰 장점이라도 설명했다. 이런 좋은 환경이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감을 주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태국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서적, 사회적 행복을 중시하며 높은 행복지수를 유지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도 많은 걸 느꼈다. 내가 과연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집중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었다. 태국 사람들의 행복 비결이 단순히 경제적 부유함에 의존하지 않고, 삶의 본질적인 부분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점이 정말 인상 깊었다.
그날 저녁, 남자친구는 드디어 자랑하던 그의 시그니처 요리, 라자냐를 선보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좁은 주방에서 진지하게 요리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라자냐가 이렇게 복잡한 요리일 줄은 몰랐다. 층을 쌓는 그의 손길은 마치 미슐랭 셰프 뺨치게 섬세했고, 나는 옆에서 슬쩍 '아주 잘하고 있어!'라고 응원했다. 드디어 라자냐가 완성됐고, 그는 접시에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세팅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한 입 먹게 되었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그의 요리 실력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때 맛본 라자냐는 그야말로 어나더 레벨이었다. 첫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부드럽게 녹아드는 풍미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원래 느끼한 음식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그는 매콤한 변주를 더해 내 입맛을 완벽히 맞췄다. 그 매콤함과 함께 조화롭게 퍼지는 진한 치즈와 육즙의 맛이 감미로웠고, 마치 내 입안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펼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의 라자냐는 단순한 요리가 아닌, 나에게는 그의 마음이 담긴 예술 작품인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그가 특별히 준비한 고급 와인이 있었다. 아직 자기도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것이라며 신중히 병을 꺼내는데,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와인잔에 붉은 액체가 천천히 채워지자, 공기 중에 퍼지는 깊고 진한 향이 우리를 압도했다. 나는 당시 와인에 대해 잘 몰랐고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한 모금 마시자마자 지금까지 내가 마셨던 모든 와인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풍부한 과일 향에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 넘김이 완벽했다. 순간 나는 '이런 와인이라면 매일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반응은 더 극적이었다. 첫 모금을 넘기고 난 후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와우! 와우!'를 반복했다. 그날 우리가 마신 와인은 아르헨티나산 말벡이었고, 그날 이후로 말벡은 우리의 최애 와인이 되었다. 완벽했던 라자냐와 와인 덕분에, 우리의 사랑도 깊고 진하게 무르익어 갔다.. 으흐흐
다음 날, 무더위 속에 걸어 다니며 관광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남자친구가 자주 간다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근처에 있는 그의 회사 사무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태국에서 제일 좋은 빌딩에 있다는 그의 사무실... 솔직히 얼마나 좋을까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가보니 그 쾌적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큐비클은커녕, 넓고 여유롭게 배치된 공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다 갖춰져 있는 부엌과 잠자는 공간은 기본이고, 게임방까지? 아침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간식까지 제공된다고 하니... 내 책상에서 간신히 커피 한 잔 마시는 내 모습과 비교되는 순간, 부러움이 차올랐다. 이렇게 일하면 스트레스도 별로 받지 않을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자신이 어떻게 일하는지 보여주겠다며 노트북을 들어 자신의 자리가 아닌 휴식 공간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편안한 자세로 일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이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태국에서 그가 살고 있는 집과 사무실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집에 딸린 수영장에서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사무실은 꼭 호텔 라운지 같은 분위기였다. 일할 때도 이렇게 편안한 환경에서 일한다니, 괜히 내가 출근할 때 지옥철 타는 생각이 떠오르며 살짝 억울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사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라며 더없이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너무 부러웠고 '나도 여기서 일하고 싶다!'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이후, 배가 고파진 우리는 현지 음식을 먹어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맛집을 찾았다. 해산물 킬러인 나는 태국음식을 매우 좋아했고 해산물 초보자인 남자친구를 위해 다른 메뉴도 파는 맛집으로 향했다. 메뉴판을 보다 보니 입안에 침이 막 고였다. 정말 모든 메뉴를 다 먹고 싶었지만 그중 나는 푸팟퐁커리와 새우회를 시켰고 남자친구는 6개월 동안 먹었던 그 돼지고기 덮밥을 또 시켰다. 이건 무슨 '난 한놈만 팬다'도 아니고 그렇게 먹고도 질리지 않는 게 더 신기했다.
음식이 나왔는데, 와... 이건 그냥 게 하나가 통째로 황금빛 카레 소스에 빠져 있는데.. 너무 황홀한 모습이었다. 마늘 소스를 얹는 새우회는 정말 싱싱해 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비주얼이 너무 환상적이라, 나는 이미 배가 고프다 못해 정신없이 흥분한 상태였다. 남자친구는 처음엔 푸팟퐁커리를 보고 "오, 색깔이 좀... 질감이 좀..."이라며 거리 두기를 실천했다. 그래, 나 혼자 다 먹을 테니 걱정 말라며 밥과 함께 한 입을 크게 떴다. 맛도 역시나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게를 손질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소스를 잔뜩 묻힌 게를 칼로 툭툭 치는데, 손가락이 미끄러지고 소스는 여기저기 튀기고 난리가 났다. 남자친구는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보더니, "다 먹을 수 있겠어?"라고 물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지만 "그럼! 아무 문제없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새우회는 반찬처럼 곁들였고 푸팟퐁커리의 게살을 하나하나 발라먹으면서 소스까지 싹싹 긁어먹다 보니, 어느새 혼자서 새우회와 푸팟퐁커리 한 접시를 다 해치우게 되었다. 남자친구가 그걸 보고는 엄청나다는 듯 나를 쳐다보더니, "진짜 다 먹었네? 대단하다!"라고 놀랐다. 나는 배를 두드리며, "이거 진짜 맛있다니까! 왜 안 먹는 거야!" 하고 한껏 자랑했지만, 솔직히 속으론 '너무 배불러서 일어날 수가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친구는 내 반응을 보며 웃더니, "내가 해산물을 잘 못 먹어서 다행이다. 내가 같이 먹었으면 모자랄 뻔했네! 그리고 당신이랑 오길 잘했네.. 먹을 줄 아는 사람이랑 와야지 이런 음식을 제대로 즐기지!"라고 말했다. 폭식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던 나는 바지 버튼을 살짝 풀러야 했지만 그런 모습까지 귀여워해주는 남자친구에게 고마웠다. 너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먹느라 사진도 못 찍었다...
우리에게 주말은 너무 짧았지만, 남자친구와 태국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남자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를 보며 안심할 수 있었고, 그가 일상에서 겪는 작은 행복들과 삶의 질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긍정적인 태도와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면서, 그가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나 역시 그의 삶의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소중한 경험 덕분에 우리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고, 앞으로도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또한 태국의 문화와 생활 방식, 사람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직접 경험하며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태국에서의 기억과 깨달음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앞으로도 이 특별한 경험을 잊지 않고, 더 깊이 있는 여행을 계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