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태국으로 돌아갔지만, 마치 거리라는 개념이 우리 사이엔 없는 듯 매일매일 연락을 해왔다. 아침엔 '잘 잤어?'로 시작해, 밤엔 '잘 자'로 끝나는 그의 메시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고, 덕분에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은 늘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솔직히 거리 문제는 우리 두 사람의 마음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이 관계가 진짜 계속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머리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링크드인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던 시절, 그는 나에게 한 번 아주 당당하게 “저는 비혼주의자예요”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라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눈이 번쩍 떠지면서 '어라? 나랑 뭔가 통하는데?' 싶었다. 사실, 나 역시 결혼에 큰 집착이 없었고, 오히려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비혼주의자? 음, 한국에서는 좀 생소할 수도 있지만, 외국에서는 결혼 없이도 아이 낳고, 사랑하고, 잘 사는 사람 많잖아?” 그때 나는 그저 ‘결혼이 필수는 아니지’라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책임감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뭐 사람마다 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때 나를 불안하게 했던 건 사실 '비혼'이 아니라 거리였다. 우리는 비행기 6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거기다 공항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까지 하면... 말 그대로 태평양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것 보다 당장의 이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였다. 주변 친구들 반응도 시원치 않았다. '장거리 연애? 그것도 국제적으로?'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친구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들의 말처럼, 자주 만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재벌 2세도 아니었고, ‘비행기 타고 곧 갈게!’ 할 정도의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나보다 일적으로 경력은 많았지만, 태국 물가에 맞춘 월급을 받고 있어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그런 내 불안함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는 2주에 한 번씩 나를 보러 한국으로 날아왔다. 금요일이 되면 회사 일정을 마친 후 바로 공항으로 향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일요일 새벽에는 다시 태국으로 돌아갔다. 이게 얼마나 피곤하고 돈도 많이 드는 일인지 아는 나로서는 그의 헌신이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만큼 나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고, 회의적이었던 친구들조차 그가 진심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고, 때때로 함께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교적인 성격의 그는, 말이 완벽히 통하지 않아도 내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고, 내가 친구들과 만나는 동안 편안히 놀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심지어 그 좁디좁은 내 원룸에 친구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그는 우리를 위해 손수 요리를 해주고, 우리가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면서 수다를 떨 때는 침대 위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면서도, 술이 떨어지면 정성스럽게 따라주곤 했다. 이런 세심한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난 참 복도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한국에 올 때마다 그의 노력에 보답하듯, 나는 그에게 한국을 제대로 경험시켜 주고 싶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 경복궁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 같은 전통적인 명소들을 방문했다. 처음으로 간 곳은 인사동이었다. 인사동 거리를 걷다 전통 찻집으로 남자친구를 안내하자, 그는 “여기 정말 분위기가 평화로워서 힐링되는 것 같아!”라며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추천한 오미자차를 들고 한 모금 음미하던 그는, “이 차는 정말 신기하게 다섯 가지 맛을 다 갖추고 있네!”라며 감탄했다. 그 표정이 마치 신비로운 물약을 마신 듯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거기에 구운 가래떡과 조청을 먹어본 그는 이건 세계적으로 수출해야 한다며 왜 아직도 안 하고 있냐고 나를 다그쳤다. 인사동 거리에서 여러 공예품을 구경하며 전통 부채를 발견한 남자친구는, 무더운 태국에 딱 맞춤이라며 친구들을 위해 부채를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부채를 펼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춤이 어째 ‘왕의 남자’의 이준기와 겹쳐 보였던지.. 한 손에는 부채를, 다른 손에는 상상의 왕관을 쓴 듯한 자세로 휘두르던 그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나는 조금 창피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이 보기 전에 만류해야 했다! 우리 관계가 더 편해지니 남자친구는 생각보다 더 장난기와 애교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복궁에 갔을 땐, 그는 전통 목조 건물의 웅장함에 완전히 매료되어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댔다. 한참 사진을 찍던 그가 갑자기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이 궁궐, 마치 영화 세트장 같아! 제임스 본드가 여기서 액션 신 하나 찍으면 대박일 것 같지 않아?” 나도 생각지 못했던 그의 상상력에 웃음이 났다. 그는 또 진지하게 건물 곳곳의 세밀한 조각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유럽의 궁궐들은 주로 석재와 벽돌, 금속 장식으로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여기는 정 반대인 것 같아! 한국은 목재와 기와를 사용해 뭔가 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 같고 화려함 보다는 겸손함이 묻어있는 것 같아!" 그는 경복궁이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훨씬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하며 문화적 차이에 신기해했다. 그러다 나오는 길에 궁궐 대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들을 보고는 “저 의상도 진짜 멋있네! 근데 저 모자(갓) 쓰면 키 커 보이는 데 도움 될 거 같아! 나도 하나 써보고 싶은데!”라며 진지하게 훑어보는데, 그 모습에 나는 박장대소했다.
우리는 삼청동을 통해 북촌 한옥마을로 들어섰고 골목을 통해 전통 가옥들이 있는 마을 위로 올라갔다.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며 남자친구는 “이 길은 정말 미로 같네~ 우리 꼭 보물찾기 하는 것 같아!”라며 흥미진진해했다. 위에서 본 북촌 한옥마을의 모습은 남자친구뿐 아니라 나도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투어 하는 모습에 남자친구는 “여기는 마치 과거로 타임슬립한 느낌이야!”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북촌 한옥마을의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우리에게 도시의 분주함과는 다른 평화로운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의 건물들이 다 한옥 스타일이었으면 어땠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마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되지 않았을까?'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각 명소마다 그의 신기하고 흥미로운 반응을 보며, 나 또한 한국의 전통을 새롭게 느끼는 동시에 서로의 감정을 더욱 깊게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서울의 전통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매력도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첫 번째 장소로 우리는 서울타워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서울타워에서 연인들이 다 해본다는 자물쇠도 사서 이름을 새겨 채워보았는데, 그는 “유럽에서는 보통 강가에 자물쇠를 채우고, 강에다 키를 던지는데, 여기서는 산속에 던지는 게 신기하네!”라며 웃었다. 서울타워의 끝에 올라 서울 전경을 본 그는 "서울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 높은 건물들이 엄청 많고, 산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서 너무 멋지다!"라고 말했다. 그가 눈을 반짝이며 360도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독일에서는 남쪽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낮은 집들과 평지라 지루하다고 투덜댔던 그는, 서울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을 보고 황홀해했다. 마치 그곳이 그의 새로운 놀이터가 된 듯, 사진을 찍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서울의 심장’에 있는 것 같다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도 자연스레 마음이 들떴다. 행복이란 정말 전염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남자친구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로 데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와, 이거 완전 우주선 아니야? 외계인은 어디 숨어있지?'라며 장난을 쳤다.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에 완전히 빠져든 그는 전문가처럼 카메라 각도를 맞추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이런 건축물은 진짜 처음 봐! 완전 신기해!'라며 자신이 찍은 사진을 뿌듯하게 자랑하기도 했다. 마침 그날은 수천 개의 LED 장미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푸드트럭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장밋빛 조명 아래에서 그는 '우와, 여기 진짜 로맨틱하네! 오길 잘했다!'라며 나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푸드트럭 구역으로 가서 새우와 부챗살 꼬치, 김말이, 고추튀김 등 여러 음식을 맛보았는데, 다행히 모든 음식이 우리의 입맛에 잘 맞아, 우리는 행복하게 배를 채웠다. LED 장미가 별처럼 반짝이는 광경 속에서 그는 '여긴 진짜 축제분위기다! 오늘 밤 진짜 잊지 못할 거야!'라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 다 그 황홀한 밤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오래도록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이번엔 전통과 현대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익선동으로 향했다. 남자친구가 골목길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마치 보물 상자를 발견한 듯 멈춰 서더니, "여긴 뭐지? 너무 독특한데!"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전통 한옥 외관과 현대적인 인테리어가 어우러진 카페와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에 "이곳은 진짜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옛날과 현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느낌이야!"라며 마치 시간 여행 중인 듯 주변을 신기한 눈으로 둘러봤다. 그중 한 가게에 들어가 맥주 한잔을 했다.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는 남자친구는 “이런 곳만 돌아다니면 없던 창의성도 막 솟아날 것 같아!”라고 말하며 자신이 창의력의 샘을 발견했다고 자부했다.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한국에 이런 젊은 생각이 반영된 공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너무 멋지지 않아? 그러면 나도 창의력 천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실없는 소리도 해댔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전통과 현대를 믹스한 공간이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어서, 남자친구를 데려갈 만한 멋진 장소가 많이 생기고 있는 추세였다. 그래서 앞으로도 많은 흥미로운 곳들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음식! 남자친구에게 한국의 진수를 제대로 소개해주고 싶어, 맛집 탐방에 나섰다. 먼저 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메뉴들인 닭갈비, 비빔밥, 불고기, 치킨, 김치찌개, 삼겹살 등을 선보였다. 남자친구는 김치를 한 입 먹자마자,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목에 걸렸는지 기침을 마구 해대기 시작했다. ‘물! 물!’이라며 주변을 헤매는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결국, 물 한 잔에 진정하고 난 뒤 그는 “이게 바로 한국의 매운맛인가? 진정한 도전이군!”이라며 씩씩하게 두 번째 젓가락을 들었다. 도전하는 모습이 정말 기특했다. 삼겹살 집에서는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새로운 식사 방식에 의아해했다. 그는 “우리가 직접 요리를 해야 해? 유럽에서는 요리사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으러 식당에 가는 거지, 내가 요리하는 식당은 없는데.. "라고 놀라며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맞아, 식당에서 직접 요리하는 거 사실 생소하지!”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고기가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에 그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고, 삼겹살을 한 입 먹어보고는 “아하, 요리 안 해줘도 왜 여기에 오는지 알겠어! 맛이 진짜 기가 막히네!”라며 감동한 듯 스스로에게 자문자답을 했다. 바삭하게 익히는 걸 좋아했던 그는 자기 기호대로 익혀 먹을 수 있어 편한 거 같다며 이 문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남자친구는 한국 음식의 맛에 점점 빠져들었고, 나는 그의 식도락 여행을 돕는 것이 점점 더 즐거워졌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나의 최애 음식들을 남자친구에게 꼭 맛보게 하고 싶어서 야심 차게 닭발, 번데기, 순댓국집 투어를 계획했다. 닭발을 처음 본 남자친구는 표정이 이미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한 번만 먹어봐!" 하며 설득하자 용기를 내서 한 입 베어 물더니, 의외로 "생각보다 맛은 괜찮네?" 했다. 하지만 질감이 자신의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며 나보고 다 많이 먹으라고 했다! 다음은 번데기였다. 남자친구는 '아직 식량이 많은데 이런 걸 왜 먹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를 믿고 한 번만 먹어봐! 진짜 맛있을 수도 있잖아!"라고 또 설득했다. 그랬더니 그는 번데기 한 개를 겨우 먹고는 잠깐 멍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건... 먼지 먹는 느낌이야.."라고 했다. 먼지라니! 그 표현에 나는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이 드신 아저씨들이 많이 가는 찐 순댓국집 맛집에 그를 데려갔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그 특유의 쾌쾌한 냄새를 맡고는 "음...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라며 두 손을 번쩍 들고 손사래를 쳤다. 결국, 남자친구는 거기서 밥과 김치 그리고 국물 조금만 먹고 건더기는 끝내 시도도 못 해봤지만, 그래도 그가 내가 사랑하는 한국 음식들을 시도해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자친구의 최애 한국 음식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감자탕이었다! 처음엔 그가 ‘감자탕’을 듣고 “어? 감자로 만든 탕이야?”라고 물어봤다. 나는 그 감자가 채소 감자가 아니고 고기부위 감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채소 감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뭔가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서 채소 감자도 같이 나온다고 위로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 뼈가 푹 고아진 감자탕이 나왔다. 그는 뼈째 들어 있는 감자탕이 생소한 듯 신기하게 보았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 뼈에서 고기를 떼어내 겨자소스를 찍어 첫 한 입을 먹었다. 그러더니 눈이 번쩍 뜨며 말했다. "이거야! 이게 바로 내 음식이야!"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그의 메뉴 선택은 늘 똑같았다. 내가 "오늘 뭐 먹을래?" 하고 물으면, 대답은 항상 “감자탕!” 한국에 감자탕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는지.. 그렇게 남자친구 덕에 나도 감자탕 덕후가 되어버렸다. 우리만의 감자탕 노래도 만들 정도였다. 그가 감자탕 그릇 앞에서 뼈 뜯으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한국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작은 모험을 즐겼다. 남자친구는 매번 내가 준비한 코스가 대단하다며 '내가 이런 곳에 올 줄은 몰랐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물론, 가끔은 내가 길을 헤매도 '그것마저도 여행의 묘미'라며 웃어넘기는 그였다. 우리 둘 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느끼며, 늘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함께라면 어디든 여행이 되고, 어느 순간이든 특별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