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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웉 Oct 27. 2024

설거지 아저씨의 탄생

10월 22일의 기록

 식기세척조를 시작하는 첫날부터 큰 비가 내렸다. 비 예보는 있었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밖이 어두워서 아침이 온 것도 시계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고, 큰 웅덩이가 길 중앙을 막고 있어서 발 디딜 마땅한 공간이 없을 때도 있었다. 결국 우산을 썼지만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운동화와 바지 밑단이 모두 젖어있었다. 처음 해보는 식기세척 일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일 자체가 최악이었다기 보다는 내 수행능력이 최악이었다. 어제 저녁식사 때 가서 인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직접 해보지 않았으니 헤맬 수 밖에 없었다. 역할 분담이 인계를 해준 중대와 우리 중대가 달라서 해야 할 일이 모호했던 것도 있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일하고 있는데 해도해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알고보니 평소보다 80명 정도가 더 와서 식사한다고 한다. 게다가 아침 식사가 7시 20분부터인데 8시 30분 쯤 느릿느릿 와서는 식사도 수다를 떨면서 천천히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사회였거나 내가 더 계급이 높았다면 바로 가서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런 마음에 안 드는 불합리한 일을 참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군대이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고생의 하이라이트는 흔히 짬통이라고 불리는 잔반통을 비우고 오는 과정이었다. 음식물쓰레기 수거장은 위치만 인계받고 가는 방법은 인계받지 못해서 잔반통을 끌고 건물 뒤쪽까지 원래 가야하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길이 좋지 않고 넘어야 할 턱도 여러 개 있었다. 덜컹덜컹 굉음을 내며 잔반통이 내 앞을 굴러갔고, 길이 원래 이렇게 불편한가 하면서 불만을 속으로 늘어놓았다. 일을 처음 하다보니까 빨리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의 시야는 좁아져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던 참에 턱 하나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짬통도 약간 쏟아 앞치마 뒤에 있던 옷에 잔뜩 묻었다. 처량하게도 하늘에서는 무거운 비만 계속 쏟아졌다. 너무 불쾌하고 속상해서 무릎에 난 상처가 아픈 것 쯤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같이 하는 선임들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아침 식기세척을 끝내고 나니 9시가 되어있었다. 다음 식기세척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반. 그 동안 긴급 빨래도 하고 찬물샤워도 하고 다시 점심 식기세척을 하러 갔다. 일 자체는 아까보다 익숙해져서 훨씬 수월했지만 문제는 짬통 비우기였다. 경로는 이제 알고 있었는데 무게가 아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거웠다. 결국 음식물쓰레기통 입구까지 짬통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다시 바지에 잔반이 다 묻고 정작 잔반은 많이 흘리고 말았다. 음식물쓰레기통 주위 청소도 다시 해야했고, 2벌의 생활복 바지를 모두 소모하고 말았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나를 비웃듯 고고하게 내리고 있었다. 짬통은 앞으로 힘 센 선임이 비우기로 했다. 그 오후에 나를 계속 괴롭혔던 것은 노동의 힘듦도 아니고, 잔반의 불쾌한 냄새도 아니고 내가 도움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못하는데 열심히 해서 뭐라고 하기도 어려운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181cm의 큰 키가 무색하게도 빨래를 너무 많이 돌린 운동복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무거운 비가 온종일 내리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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