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방 소개글)
읽을거리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동네 만화방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던 나름의 도서관이었다. 영상처럼 전개되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의 세계에 푹 빠져 끼니도 잊은 채 열 몇 권의 시리즈를 독파하곤 했었다. 글자만 있는 책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그림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몇 시간씩 들여다 보는 것도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생각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림은 정지된 이미지이나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면서 서사를 형성해 나가도록 만든다. 그림 한 점에 수백, 수천의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은 개개인의 역사가 그림과 만나면서 개별적이고 독특한 반응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멈춘 그림으로부터 시공간을 부활시켜 현실세계로 이끄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인 것이다. 그림이 이렇듯 생생한 이야기들을 감추고 있을진대 여러 장의 그림들로 엮여진 책은 그 얼마나 흥미진진할 것인가.
루켄스는 그림책을 ‘그림과 글의 행복한 결혼’이라고 표현하였다. 책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글을 먼저 떠올린다. 책은 읽는 것이고,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과 단락들을 읽어야 숨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 글의 결혼이라고 표현한 데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림책에서 그림과 글은 서로 종속관계가 아니다. 각각이 독립적 작품이자 함께 어우러졌을 때 평등하면서 보완적 관계로서 이야기를 조화롭게 구성해 나가게 된다. 그럼에도 조금 애정을 주자면 현대의 그림책은 그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두는 듯하다. 다양한 기법과 형식의 그림들로 표현된 현대의 그림책은 이제 그 독자층을 어린 아이로만 제한하지 않는다.
짧은 에피소드로부터 얻는 경쾌함과 진중함,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 경구에서 통찰하는 삶의 지혜, 유려한 그림과 잔잔한 글귀로부터 받는 위로와 다독임은 열정적인 삶에 가끔은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비타민같은 생활의 이완제로 다가온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이 그림책이 가지는 혜자스러움이다. ‘모두의 그림책방’으로 간판을 내건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책은 특별히 읽거나 보는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 마음 가는 대로 넘기다 펼쳐진 그림에 시선을 멈추고 떠오르는 생각에 고요히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글이 많지 않으니 신경쓰며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도 덜하다. 그럼에도 ‘모두의 그림책방’을 개설한 연유는 어릴 적 만화방의 추억이 현재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 한글 깨우치기 전 부모님이 사주신 금성출판사 동화전집 20권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읽지 못하는 글자를 뒤에 두고 상상력의 무한대를 경험하게 해 주었던 황홀한 기억 때문이다. 나의 경험과 마음에 동감하는 누군가의 일상에 다시금 그림책이라는 마법을 선사하고, 조금 더 재미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멋진 안경을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림책 또한 책이라는 형식을 가진 매체이므로 작가는 다양한 형식을 빌어 독자가 발견하도록 용인하는 메시지와 발견하지 않아도 괜찮을 메시지를 여러모로 심어 놓는다. 그림책의 재미가 배가 될 수도 있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역공할 수도 있으니, 이런 안경 하나 곁에 두고 있으면 그럭저럭 쓸만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림책을 아주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좋은 그림책을 소개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한 주에 한 권 소개될 ‘모두의 그림책방’에 가끔 들러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시길 소망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