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은주 Oct 09. 2024

가슴속 요정의 질문

(그림책: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

   제목에서 뭔가 대단한 기대감이 느껴진다. ‘소원’이라는 단어가 마음 한 귀퉁이에 숨어 있었던 욕망을 자극하고, ‘엄청나게 커다란’이라는 꾸밈말이 그 욕망의 부피를 부풀린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물질적 세계가 먼저 마음에 꽉 들어찬다. 우리는 ‘소원’이 ‘소유’의 의미와 동일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책 역시 엄청나게 커다란 무언가를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일까.


   세 아이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이 표지이기도 하면서 이야기 첫 장면이기도 하다. 생각이 뭉게뭉게 머리 위로 피어올라 구름을 만들고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이 그 생각이었음을 구름 안에 제목으로 표기하고 있다. 노란색 글자와 바나나 그림을 넣어 만든 ‘소’라는 글자를 통해 작가는 미리 결말을 예고하고 있다. 일종의 복선이랄까. 처음에는 무심코 넘겼다가 그림책을 다 읽고 난 후, ‘아하!’ 하고 안 보이던 작가의 재치를 그제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의인화한 고릴라(작가가 사랑하는 동물) 얼굴의 세 명의 아이들이 바라고 원하는 소원은 무엇일까.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면지에는 온통 바나나가 그려져 있다. 단순히 고릴라가 좋아하는 음식이라서 그려 넣은 것인지, 살짝 독자를 방심하게 한다. 그다음 장인 표제지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등장한다. 그리고 다음 장, 시작되는 이야기 첫 장면에서 표지 그림이 다시 한번 재현되고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무료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이들. 순간 화면을 뚫고 요정이 걸어 나온다. 화면 밖을 나온 요정을 보는 것만 해도 놀랄 일인데, 요정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대신 아주 신중하게 고를 것을 당부한다. 환호하는 아이들. 검정 무늬로 자잘했던 황토색 벽지가 아이들의 머릿속 찬란한 환호를 대변하듯 원색의 꽃무늬로 바뀐다. 꽃무늬 벽지는 아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미래인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런데 아이들이 원색의 꽃밭에 파묻히고 그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바보 같은 소원을 고르지 않도록 아이들은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한다. 뭔가 엄청나고 대단한 소원을 말하고 싶다. 그러려면 배도 좀 채우면서 고민하면 좋을 듯하여 ‘커다란 바나나’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맏이 램버트. 순간 엄청나게 커다란 바나나가 탁자 위로 떨어진다. 분노하는 둘째 힐다. 소원 하나를 바보 같은 바람으로 허비했다는 생각에 힐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오빠 코 끝에 바나나가 붙어 버려라!"라고 소리친다. 바보 같은, 아니 저주 같은 바람으로 또다시 소원 하나를 허비해 버린다. 코에 꼭 붙어 어떤 방법에도 떼어지지 않는 바나나. 아이들은 절망하고, 마지막 하나 남은 소원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렵다. 결국 막내 로스가 이 역할을 맡는다. “오빠 코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바나나가 떨어지게 해 주세요.”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이 결국 바나나 하나였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 옛이야기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등장하고 소시지가 나오는 이야기. 엉겹결에 말한 소시지가 말대로 나타나고 홧김에 코에 붙어 버리라는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결국 소시지를 떼어내게 하는 것이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는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민담집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다. 앤서니 브라운은 책의 서두에 그림 형제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어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림 형제 민담집에 수록된 「어부와 아내」라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더 큰 부와 권력을 갈구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대해 다루고 있고, 소원의 수를 세 개로 제한하지 않고 있어 이야기 내용이 다소 다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샤를 페로의 이야기와 더 유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림책을 덮고 나서 다시 읽을 때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그림책이 그러하다. 선명한 색으로 큼직하게 표현된 인물들, 읽기 쉬운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어 한 번 읽으면 그림과 글이 모두 이해된다. 그런데 연극공연에서처럼 양 옆으로 쳐져 있는 빨간 커튼이 두 번째 읽을 때서야 그림에서 보인다. 빨간 커튼은 아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첫 장면과 끝 장면에만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가 아이들이 펼치는 연극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막내 로스의 존재이다. 이 아이는 독특한 인물이다. 요정의 소원 이야기에 동요하지 않았고, 어떤 소원도 말하지 않는다. 오빠와 언니 같은 감정과 행동의 급격한 변화를 나타내지 않는다. 존재감 없는 이 아이의 행보가 두 번째 읽을 때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된다.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램버트와 힐다는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우리가 가진 욕망을 소박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유머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도 소박하지도 않다.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실상 그 욕망이 무엇이며, 그것이 내가 진실로 바라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말이 현실의 모습이다. 대단하고 멋진, 아무도 가지지 않은 엄청나게 커다란 어떤 것을 생각해 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인지,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타인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스럽다. 


   이때 램버트의 선택은 ‘먹을 것’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 표현으로 ‘엄청나게 커다란’이라는 의미와 엇갈리면서 일치한다. 배고픔이라는 현재 자신이 가진 욕구에 솔직하였고, 과일 하나가 소원인 것이 하잘것없다고 생각될지 모르나, 인간의 생존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은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으로 바라기에 충분하다. 그까짓 먹을 것에 인생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억울해진다면, 죽음 뒤 남겨지는 물질이 무슨 소용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런 비약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그림책이 말하는 메시지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가진 바람과 욕구에 온전히 충실하자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대에서 퇴장하고 커튼이 닫힌 가운데 커튼콜로 불려나온 것마냥 무대 위에 커다랗게 놓인 바나나 껍질 그림과, “지금껏 먹어 본 그 어떤 바나나보다 맛있는 엄청난 바나나였어요.”라는 문장에서 이는 명확해진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부담을 떠안고 세 번째 소원을 말한 로스는 무대 안에 있지만, 무대 밖 독자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중재해 나가는 심판자의 모습이다. 어쩌면 작가의 분신일 수도 있다. 그림책 마지막 장에서 화면(그림) 밖 독자의 눈을 응시하며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는 로스의 모습에서 그가 관조자였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그의 등 뒤로는 네 개의 날개가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가 요정이었던가! 아니, 우리는 모두 가슴속에 요정 하나씩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 주고 살피는 요정이 있어,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온전히 나를 바라볼 수 있고 소중한 것의 선택에 흔들리지 않게 다잡아주는.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 아이 그림이 사랑스러운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나의 소원은 무엇인지 가슴속 요정을 불러 자문자답해 보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