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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주 Nov 04. 2024

놀랍도록 가까운 우리

(그림책: 「머무는 마음, 떠나는 마음」)

   머문 자리가 안온하여 오래오래 정착하고 싶다. 친숙한 얼굴들을 마주하며 예견된 일상을 누리고 급박하지 않은 감정을 유지하고 싶다. 매일의 평화로움이 일생의 계획표 안에 차곡차곡 채워져 가면서 이대로의 삶이 나쁘지 않다고 자족한다. 새로운 경험과 도전에 대한 열망으로 늘 가슴이 끓는다. 낯선 곳에서 접하는 생경함은 약간의 긴장을 뒤로 하고 미개척의 신비로움으로 다가오면서 한껏 마음을 부풀게 한다. 열린 가슴으로 세상을 가득 품도록 하는 방랑의 나날들이야말로 삶을 더없이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 삶에 속해 있는가.




   댄을 설명하는 집 한 채, 아키를 설명하는 보트 한 척이 이야기의 첫 장면으로 각각 왼쪽과 오른쪽 면을 차지한다. 댄과 아키는 이렇게 표상을 앞세우고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첫 장면에서 이들의 삶은 확연히 두 방향으로 분류된다. 대지를 표현하는 갈색의 배경과 하단에 붙박인 듯 고정된 노란색의 집. 바다를 표현하는 남색의 배경과 계속하여 전진하고 있는 파란색의 보트. 그리고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텍스트, ‘머무는’과 ‘떠나는’이 각각 타이핑되어 있다. 아마 원작에는 ‘Here’, ‘There’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이 그림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므로.


   얼굴을 드러내며 자신의 삶을 나직이 서술하는 댄과 아키. 바닷가 작은 마을의 까페 주인인 댄은 그곳에 깊이 뿌리내린 채 머무르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이 성실한 남자는 정해진 구역 안에서의 일상을 반복하며 소속감과 유대감이라는 감정을 소중히 여긴다. 한편 늘 어딘가를 향하는 아키는 보트를 거주지 삼아 파도의 출렁임처럼 표류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한 곳에 닻을 붙들어 매어두지 않는 이 역마살 가득한 남자는 여행에서 오는 다채로운 경험을 삶의 소재로 엮어 나간다.   


   자신의 삶에 더없이 만족하는 댄과 아키. 그림책은 이 두 남자의 삶을 왼쪽 면과 오른쪽 면으로 각각 지면을 나누어 표현한다. 완전히 반대되는 두 삶의 전개는 이분법의 표현 방식으로 더욱 극명하게 나뉘면서 어느 순간 독자가 자신이 선호하는 삶의 그림 속으로 슬며시 젖어들도록 한다. 그러나 우리 삶이 꺾임 없이 늘 일직선만을 달리던가. 삶의 평행선을 달리며 평생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댄과 아키는 철로가 교차로에서 서로 꺾이고 만나듯 조우한다. 이분법처럼 나뉘던 삶의 방식이 양면 가득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되면서 그들 감정이 교차했음을 알린다. 대지와 하늘과 바다가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 이를 대변한다. 그리고 텍스트는 이렇게 읊는다. “그들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기분이 들어요.” 기실 만족스럽던 그들의 삶에도 빈틈은 존재한다. 댄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아키가 느끼는 홀로 있는 외로움이라는 틈으로 말이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개별적 삶들 간에도 익명의 교차와 감정의 교집합은 일어난다. 세상을 경계하는 고집스러움이 아니라면 그들 삶의 늘 어느 한 면은 열려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붙박이 댄이 “난 여기 있을 테니 언제나 들러”라고 말하거나, 떠돌이 아키가 “있잖아, 내가 그리로 갈게!”라고 말하는 것처럼, 정육면체 삶의 한 면은 세상을 향해 열어둔 채, 나머지 다섯 면으로 삶의 바퀴를 굴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삶의 바퀴는 원형이 아니어서 굴리기 힘든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만남은 놀랍도록 가까운 곳에 서로가 존재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손님이 오길 기다리는 댄의 마음엔 객으로부터 먼 곳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갈망이 잠재되어 있다. 떠돌다 들른 어부의 집에서의 하룻밤은 부드럽고 따뜻한 이불로 아키의 방랑을 포근히 잠재운다. 이렇듯 이들 삶은 채워지지 않은 여백으로 인해 더욱 인간적이다.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하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아서 더 마음이 쓰이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위안 한 토막쯤 얹어주고 싶다. 


   댄과 아키는 위안을 서로에게서 찾게 된다. 우연인 것 같지만, 우연이라고 단정지을 수 만은 없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연루한 잔잔한 인연이다. 펼쳐진 인생의 카펫, 어느 한 문양을 함께 직조하는 순간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그들이 각자 소중히 간직한 사진 한 장에서 아키와 댄은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다. 댄은 까페 주인으로 음식과 음료를 나눠주는 모습으로, 아키는 먼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손님들에 섞여 있는 모습으로. 공감의 정서로 잠시 교차하였었던 댄과 아키는 다시 삶의 일변도로를 걷다가 그림책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한 번 더 교차한다. 이때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이 모습을 그림책은 4면의 펼침면을 할애하여 긴 식탁과 주위의 활기찬 사람들로 그려 넣고 있다. “그런 순간에, 그들은 세상과 아주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요.”라는 따뜻한 텍스트와 함께.





   삶은 외로운 거라고들 한다. 방향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대어본다. 방향과 방식이 같다고 한들, 감정과 대응이 다를 터이니 역시 외로운 삶이다. 인적없는 오솔길을 혼자 걷는 것 같은 삶이지만 마주오는 이와 뒤따라오는 이를 한 번이라도 일견하지 않을 수 없고, 잠시 멈추어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나의 눈과 귀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면,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놀랍도록 가까워진 우리. 삶은 이 순간 잠시 외로워하기를 멈춘다. 


   우직하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당신, 오늘은 눈과 귀를 세상 쪽으로 열어두고 가깝게 다가오는 누군가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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