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할머니의 뜰에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해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할머니는 낫을 들어 부추의 밑동을 한 움큼씩 잘라 내셨다. 할머니의 앞과 오른쪽, 왼쪽에 돋아난 파릇한 줄기들이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세로로 잠시 출렁거리다 얌전히 잘린 후, 가로로 길게 눕혀졌다. 농가 뒤 손바닥만 한, 아니 손바닥보다 더 작은 텃밭 속 할머니는, 풍성한 치마를 다 여미지 못해서인지 앉은 뒷모습이 우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전히 우리 할머니는 정정하셔’라고 믿고 싶은 풍채였다. 며칠 뒤 들려 온 병환 소식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 들고 온 딸기는 오히려 먹고 가라며 밀쳐둔 채, 오랜만에 만난 손주들 뭐라도 챙겨 보내려 텃밭으로 우선 나가시던 할머니. 내 기억 속, 건강하시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다.
백발 머리에 단정하게 두건을 동여맨 할머니와 노란 점퍼의 소년이 손을 잡고 녹색의 짙은 수풀을 걷고 있다. 녹색의 숲과 노랑 점퍼, 그리고 표지의 오른편을 차지하는 빨강의 꽃까지 강렬한 원색의 색감이 맑고 쾌청한 5월의 어느 한낮을 연상케 한다. 하얀색 글자의 제목이 햇빛을 받은 듯 눈부시다. 그림책 「할머니의 뜰에서」는 표지에서부터 잔잔히 서사가 흐른다. 독자가 누구이건, 현재의 할머니를 혹은 유년 시절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면서 자연과 식물, 열매와 결실이 연관되는 추억을 가만히 불러들이게 한다. 온갖 식물이 자라는 ‘할머니의 뜰’은 화수분 같은 할머니의 마음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뜰’이나 ‘텃밭’의 추억이 없는 독자에게도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가 진정성 있게 전달된다.
소년의 목소리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매일 아침 할머니 집에서 아침을 먹고 함께 등•하교하는 소년의 일상을 통해 할머니의 삶이 드러난다. 고속도로 옆, 유황 광산 뒤, 양계장을 고쳐 지은 오두막이 할머니의 거처이며 그 뒤로 조그만 텃밭을 가꾸고 있다. 끔찍한 전쟁을 겪었으며, 현재의 국가로 이주한 이민자로서의 할머니의 삶이 손자인 소년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이야기로 서술된다. 소년의 어조는 담담하고 미사여구가 없지만, 할머니와의 깊은 유대가 느껴지기에 충분하다.
소년과 할머니는 언어로 소통하기보다는 표정과 행위로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공간의 흐름 안에서 마음을 읽어 나간다. 실상 이민자인 할머니는 언어가 서툴고 소년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 하지만 할머니가 보여주는 비언어적인 표현은 몸이 기억할 정도로 소년에게 깊이 각인된다. 굶주림의 아픈 기억이 헤엄쳐도 될 만큼 커다란 그릇에 음식을 담고, 소년이 흘린 음식을 재빨리 주워 들어 입을 맞추고는 다시 그릇에 넣어주는 행위로 표현된다. 작은 집 안 곳곳에 들어찬 채소와 과일, 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하거나, 음식을 먹는 손자를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은 이전의 비참한 삶을 견뎌낸 데 대한 감사함과 경건함, 현재의 삶에 대한 축복이자 행복의 표현이다. 집의 공간과 행위로부터 풍기는 할머니의 역사를 소년은 기특하게도 알아채고 수긍하려 한다. 무릇 소년의 역사가 할머니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이야기는 애정 돈독한 조손 관계로서 독자를 설득한다.
비가 내리는 날, 할머니의 모습은 좀 더 이목을 끈다. 거리를 찬찬히 살피며 지렁이를 찾고, 준비해 온 유리병에 잘 담아둔다. 텃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병에 담아 온 지렁이를 땅에 놓아주는 동작은 소년에게 호기심 이상의 기이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소년의 물음에 할머니는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야기를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소년의 손바닥에 새겨진 손금을 만지는 것으로 대신한다. 할머니가 경험했던 삶의 순간이 손과 손으로 전달되는 순간이다. 할머니의 역사는 그대로 손자에게 전수되어 지금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험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할머니와 손자는 의식을 치르듯 식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렁이를 내려놓고 흙으로 덮어주는 동작을 이어간다. 한때 무수한 생명을 잃었던 역사의 실수를 참회하고 상쇄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짙푸른 녹음 속 두 눈을 감고 공손히 앉은 할머니와 소년의 모습은 지렁이를 흙으로 보내어 이로부터 생명의 잉태를 염원하는 기도자처럼 느껴진다. 이때 그림은 이들 머리 위로 한줄기 단비를 뿌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시간은 추억을 뒤로 넘기면서 앞으로 질주한다. 그동안 집은 도시화로 사라지고, 운신이 어려워진 할머니는 소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할머니를 챙기고 보살피는 것은 소년의 몫이다. 할머니가 소년의 아침을 챙겼듯 소년은 아침마다 할머니의 아침을 챙긴다. 침대 발치에서 수발을 들던 소년이 할머니가 떨어뜨린 사과 한 쪽을 얼른 주워 입을 맞추고는 다시 그릇에 넣어주는 장면은 눈시울을 붉게 한다. 그림 속 할머니의 미소가 인자하다.
할머니가 보여준 생명에의 열정을 손자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보여주고 싶어한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삶의 여정이 지속되고 있음을, 할머니의 역사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님을 알려주려 한다. 창밖으로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소년은 몸이 기억하는 할머니 삶의 한순간을 재현한다. 빗속으로 뛰어들어 주울 수 있는 모든 지렁이를 다 주워 담는 소년. 그런 손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섬광처럼 빛이 난다. 쏟아지는 빗줄기 한가운데 서서 할머니를 향해 손을 흔드는 소년에게서 할머니가 견뎌온 삶의 결실이 축복처럼 반짝인다.
할머니를 기억한다. 업혔을 때 세상 전부였던 그 따스한 등을, 토닥이며 재워주셨던 그 투박한 손 마디를. 병환 소식 이후, 1년여간의 투병 후 할머니는 세상과 작별하셨다. 혼수상태인 할머니의 손을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손녀를 알아봐 주기를 소망하던 기억... 할머니 삶의 장면들이 내게도 전수되고 있음을 살아가면서 느낀다. 그리고 할머니의 역사를 이어가는 내 삶의 곳곳들을 실감한다. 애초에 함께 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많지 않아 더욱 애틋한 조손 관계. 그 사랑의 실체를 우리는 어린 시절 경험하고는 장기간 잊고 지낸다. 오늘처럼 문득 꺼내든 그림책 이야기에 사로잡히기 전까지는.
이 그림책은 표지 위로 재킷을 입고 있다.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걷고 있는 그림을 감상하였다면, 슬쩍 재킷을 벗겨 진짜 표지를 만나보길 권한다. 단정한 모습의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추억하는 손자의 모습이 각각 앞과 뒤표지에 그려져 있다.
독자의 할머니는 어떤 분이었는가. 모든 할 일을 뒤로 하고, 할머니를 추억하는 사사로움에 젖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