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더언니 Oct 17. 2018

확신을 쉽게 가지지 말 것.

확신이 틀릴 수가 있더이다

나는,


쉽게 확신하고,

쉽게 결정하고,

쉽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뭐 하나에 꽂히면 꼭 그것만 한다.

공부도 이 악물고 해 본 적이 있었고,

인생은 내 계획대로 다 풀릴 줄로만 알았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나는 내가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스물다섯,

그리하여 나에게 결혼하자고 했던 그에게 쉽게 확신을 느꼈다.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했다.







십 년을 알았던 그와 나에게는 학교와 친구, 취미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결혼이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계획한 대로, 그렇게 말이다.

예상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내가 몸이 아프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니 몸에 멍울이 여기저기 잡히기 시작했다.


결혼 준비를 한창 하는 도중,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장거리 연애를 그만두고 그가 있는 곳에서 구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변수가 생겼다.

몸은 다행히 좋아졌지만, 일이 구해지지 않았다.







한창이었던 결혼 준비는,


드레스도 샀고,

상견례,

예식장 예약,

신혼집 페인트질,

혼수,

예단,

청첩장에 들어갈 편지 문구,

주례를 부탁할 목사님까지도.


이 모든 것을,

다, 준비했는데,







그가 결혼을 미루자고 한다.


그것도 네 번씩이나.










그때마다,  

몇 번이나 예약금을 날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외국에 사는 부모님과 오빠는 몇 번이나 한국에 와야 했으며, 언제 결혼하냐고 묻는 나의(또 그의) 친구들에게 매번 날짜를 다르게 말하였다. 축의금을 미리 주시는 어른들에게도, 주례를 부탁드린 목사님에게도, 정말이지, 너무나 못할 짓이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아드님이 최고라는 그의 어머니는 아침마다 회사 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얼마나 그에게 부족한 사람인지에 대한 설명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논어를 읽어보았느냐고. 그래서 나는 자격 미달이라며, 유학을 보내줄 테니 헤어지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곤란한 상황이 오면 나는 항상 그를 변호하기 바빴다.

늘 혼자가 되었다.

왜 미루려고 하는지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엄마 아버지, 이번에는 한국에 잠깐만 오래 머물다 가셔요. 걱정하지 마, 그에게 잠깐 일이 생겼나 봐. 다른 날 잡아볼게. “


정말 면목이 없었다.


수원 어느 예식장에서 네 번째 날짜를 정하려는데, 또 그가 미적거린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

나는 예식장 대로변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네가 일을 안 구해서... 음... 모르겠어. 돈을 벌면 다시 매력적으로 보일 것 같아."











그는 정말 저따구로 말했다.


"그래도 결혼하자고 했던 것, 사랑한다고 했던 것. 그때엔 진심이었어. “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의 모든 확신이 무너져내는 순간이었다.

똑똑한 줄 알았던 나는,

천하의 병신이자 호구였다.



그를 알았던 10년의 시간이 무의미해졌으며,

예단을 돌려주지 못하겠다는 그에게 더 이상 따질 힘도 남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세상과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택했다.














죽고 싶은 나날들을 견디고 또 견디어,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세상에 나왔다.


상해에 꽤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었다.


예전처럼 밝게,

원래의 나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이름으로 나에게 메일 한통이 왔다.






미안하다는 메일.

다시 시작해보면 안 될까?라는 약간의 기대도 가지는 듯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나의 블로그에 그가 자주 다녀간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확신이란,


내가 상태가 좋을 때만 유효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결혼의 본질이라는 온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그와 나는 쉽게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이 후로도, 나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마음먹었다고, 자신의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을 주기도 하며, 혹은 결혼식은 하와이에서 하자며, 혹은 나와 결혼을 하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미래들을 PPT로까지 만들어 제시하며 나를 찔렀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생각도 안 하는데,

자신에겐 확신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현재 병신이라고 과격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지난 이유가 생겼다.












확신이란,




그리하여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감정을 넘어선 헌신과 아픔을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서른이 넘어서,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Ps. 언니들, 그래서 처음부터 너무 뜨거운 남자를 조심하라는 겁니다.

이전 04화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