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떤 생각
라이킷 137 댓글 21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염상섭의 삼대(三代)

by 남모 Mar 02. 2025
아래로



왜 염상섭을 읽는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이 매우 몹시 심심한 단조를 가지고 있어 어떤 문학적 달달함도 없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게다가 논설조까지 다량 함유되어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이 창을 닫을 기회임도 더불어 안내드린다. 일제 강점기에도 근대문학의 지평을 연 작가들과 그들이 허탄한 현실을 자성하고 탄식으로 민족주의를 역설한 작품들이 무수히 많지만,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의 절기처럼 오욕과 수탈의 시대가 떠오르고 혀끝이 깔깔해지면 다시 염상섭의 삼대를 생각한다. 식민지 시대에 우리가 겪어야 했던 질곡과 통증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그들이 가진 위선과 나쁜 피를 잊기 않기 위함이다. 일전에 백석에 대해 글을 몇 편 쓰며 염상섭과의 일화를 지나가는 행인 1처럼 언급한 적이 있지만 오늘은 소설 삼대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자 한다. 삼대는 난삽하고 장황한 요설체 문장으로 이루어진 탓에 간혹 춘곤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사실적이고 세밀한 실제적 묘사에 빠지게 되어 쉽게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무엇보다 가슴을 진탕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염상섭의 시대정신이고 작가의식이다. 식민지 치하의 현실이 비정상적임을 인식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항일 광복의 의지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봉건 가족 제도와 구도덕에 대한 비판을 통해 봉건과 근대의 사회적 갈등을 당시 사회의 묘지처럼 생각하고 이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미래지향적 가치와 외래 사조 유입에 대한 저항 의식이 그렇다.


염상섭의 호는 횡보橫步다. 천천히 옆으로 걷는다는 말이다. 아마도 그는 무딘 게처럼 옆으로 걸으면서 생의 진저리를 온몸에 새기진 않았을까 싶다. 그는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일본 게이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자신이 쓴 조선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를 주동한 전력으로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기에 이른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동아일보 창간에 관계하면서 정치부 기자가 되었고 이후 소설 평론에 전념했으나 '폐허'의 동인활동을 계기로 습작기를 지나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면서 한국 근대문학의 기수가 되었다. 그의 삶과 문학은 다분히 민족적이었으며 전통적이었다. 식민지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진실을 숨지기 않았다. 깔끄러운 모래밭을 기며 자세하고 섬세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적 문체를 자신의 문학적 골격으로 삼았다. 이 모든 내구력과 온기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응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근대사는 가파른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전통적 봉건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식민 통치로 인한 질곡으로부터의 해방 투쟁기라는 점이다. 횡보는 소설 삼대를 통해 이 두 갈래의 삶을 민초들의 시점에서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 형식과 플롯을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소설보다는 극에서 플롯이 중요한 의미를 띠기 때문인데, 횡보는 이것을 조, 부, 손, 삼대의 형식을 기반으로 절묘하게 그려낸다. 이들 세 세대가 동시적 공간에 어우러져 있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 변화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암시해 주지만, 당시 인텔리들의 사상적 방향 모색에 대하여 미해결의 양상으로 종결되는 것은 그의 작가적 소양으로 볼 때 작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으며 스토리가 완결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다소 미안한 일이다. 물론 소설의 구성이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몇몇 아쉬움을 앞세워 삼대를 흠집 내기엔 무리가 있다.

                         


봉건 의식과 가족주의               


삼대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축을 구성의 골격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의관, 상훈, 덕기에 이르는 조(祖) 부(父) 손(孫)을 중심으로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을 종축(從軸)으로 하고, 김병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의 식민지 통치 당국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사건을 횡축(橫軸)으로 전개하는데, 이러한 종횡의 실타래가 주인공인 덕기를 중심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이중 플롯은 한국 근대소설에서는 처음 시도된 것으로 횡보의 문학적 면모를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과, 같은 세대의 여러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 수용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에 존재하는 교차 하면서도 어긋나는 가치관과 생활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가치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이 횡보의 절박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대지주이며 재산가인 할아버지는 양반 행세를 하기 위하여 족보까지도 사들일 만큼 명분과 형식에 얽매인 봉건적 인물로서 구세대의 전형, 즉 유교적이며 수구적인 보수층을 대표하는 제1대 한말 시대의 인물로 묘사된다. 아버지 상훈은 개화기를 당면한 새 시대의 주역이자 교육과 교회사업에 힘쓰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봉사를 꾀하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조의관의 거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축첩과 애정행각에 사로잡힌 이중인격적 생활에 빠져있는 제2대 개화기의 과도기적 인물이다. 조의관의 손자 덕기는 지식청년으로 민족의식이나 사회의식에 있어서 공평 의식을 가지고는 있으나 용기가 없고 소극적이며 도피적 반응 밖에는 나타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중도적이고 절충적인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들 삼대의 이야기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전통사상과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는 후대의 인물과 조부와의 갈등이 서서히 달아오르다가 마침내 할아버지의 죽음이 몰고 온 재산상속 문제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추악상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봉건과 부자를 함께 가진 구세대는 돈을 지키는 열쇠와 조상을 모시는 사당의 두 가지가 인간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철저한 조상 숭배 정신과 배금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교육까지도 인간을 조상 숭배와 가문 유지, 그리고 재물의 수단으로 보는 조의관의 교육관은 봉건 사회에서 유교적 이념에 뿌리박은 인생관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삼대를 다시 명확히 규정한다면 조부는 '만세'전 사람이요, 부친은 '만세' 후의 허탈 상태에서 타락한 생활에 헤매던 무이상 무해결의 현실 폭로를 상징한 부정적인 인물이며, 손자의 대에 와서 비로소 새 길을 찾아들려고 허덕이다가 손에 잡힌 것이 겨우 좌익에의 동조자 혹은 동정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더라도 이것이 3.1 운동 후 한 귀퉁이에 나타난 시대상이자 동시에 인텔리층의 일부가 가졌던 사상적 경향이었던 것이다. 결국 가족 삼대는 식민지 치하에서의 우리 가족주의가 얼마나 처참하게 붕괴되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갈등     

          

갈등은 어디에나 있고 개인사의 하루에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 지루한 반복을 횡보는 울고 싶은 심사로 시대의 수레바퀴에 감아놓았던 것이다. 삼대는 벽창호 같은 봉건 세대와 아들로 대변되는 위선의 인생과 정체성을 잃은 손자가 그야말로 마구 어우러지며 갈등을 빚는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군내가 난다면 아들 이야기를 좀 하자. 쉽게 말하자면 그는 위선자다. 미국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에 신실한 기독교회 장로인 그는 교회를 통한 사회 운동과 교육 사업에 큰 뜻을 품고 집안의 재산으로 그런 사업에 직접 투자하기도 하고 민족 운동가의 가족을 돌보기도 하지만 정작 그의 실생활은 축첩과 노름, 그리고 술로 얼룩진 만신창이 난봉꾼의 모습이다. 결국 자아 속에 철저히 자폐 되지도 못하고 또한 개방되지도 못한 어정쩡한 과도적 비극의 인물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한말의 봉건적인 것으로부터 자기 개혁을 시도하고 새로운 문화적 조류를 유입하려 시도한 개화인의 한 전형이었지만 일생을 통해 한결같은 삶을 꾸려 나가기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고, 환경이 사람을 주물럭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손자라고 나을 건 없었다. 마음만 앞선 시위자나 마찬가지였으니 서부의 겁 많은 총잡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선 그는 요즘의 신세대요 MZ 격이다. 그러나 친구 김병화처럼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심정적으로 동조를 하기는 해도 그 자신은 법과를 마쳐 판사나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다. 자신의 그런 꿈이 가끔 운동가인 병화의 조소를 받아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타인의 사고와 행동을 넉넉하게 이해하기도 한다. 아버지의 이중적인 생활에 대해 비판은 하면서도 동정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힐 줄 모르는 인물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면서도 뚜렷한 이념적 실천을 행하지도 않는 무늬만 깨어있는 개척자라는 것이다. 아마도 횡보는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손자의 모습을 통하여 이념과 현실에의 괴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수동적 삶의 정신적 피폐에 대해 일깨워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대적 요구와의 괴리               


시대적 요구와의 괴리는 횡보가 끝내 말하고 싶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코드라는 것이 뻐근하다. 이러한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천천히 파헤쳐 가다가 결국에는 종착역처럼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인 식민지적 현실에 주목한다. 이 땅에 텃밭을 가꾸며 새참에 즐거워하던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식민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의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동포가 부딪혀야 하는 삶의 여건들에 대해 한편으로 대응하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과 자존의 긍지를 세우는 길이 식민지 시대의 고단한 살이를 마감하는 길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참담한 살이를 횡보는 어지러운 삼대를 통해 조감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을 침묵으로 방관하고 신식 문물에 경도된, 의식 없는 생활이야말로 비참한 패배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횡보의 삼대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개인과 역사라는 근본적인 소설의 문제를 날카로운 작가적 통찰력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된 조국의 현실에 탈진해 가는 군상들의 좌절을 통해 하나하나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나타난 소위 삼대는 지금도 도처에 산재한다. 현실 속의 1세대는 모국어 사용을 금지당함으로써 삶의 정서적 발달을 억제당한 채 저열한 수탈로 좌절이 곧 살이였던, 해방 후에는 민족 분단과 이데올로기와 전쟁의 참화를 겪고 이념의 선택을 강요당한 채 살아야 했던 수난시대다. 비극적인 것은 삶의 경험을 통해 굳어진 논리를 다음 세대에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식민 사관과 반공 안보 논리가 정서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이 세대는 진보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사가 큰 만큼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념 지향적이다. 현실의 2세대는 전후에 태어나 유년기를 궁핍 속에서 지낸 한글세대다. 이들은 4·19, 5·16, 삼선 개헌, 유신, 12·12 등의 정치적 변혁을 젊은 시절에 겪었던 세대로 정치적 의사표현이 비교적 분명한 편이지만 유년, 청년 시절의 궁핍한 환경에 대해 서운한 것이 많아서 때로는 그것이 굴절된 보상심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념적으로는 1세대처럼 완고한 체험 논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어렵게 얻은 안정을 허물어뜨리고 싶지 않은 본능적 움츠림을 갖고 살기도 한다. 이제 3세대는 8,90년대 이후로 유년 시절을 보낸 세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는 4세대라 할 만한 다음 세대가 등장했지만 명확한 구분이나 평가가 이른 듯하여 아울러 3세대라 칭한다면, 아무튼 구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풍요 -과연 풍요인가에 대하여는 몇 번의 망설임을 뒤로한다- 를 누렸고 민족 문화와 서구 문화의 차별성에 대한 인식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세대. 전후 세대로서 기성세대의 체험 논리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이념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구세대에 비해 열려 있고 적극적이다. 그러나 확고한 이념 지향보다는 무관심이 만연되어 그것이 자칫 다양성으로 잘못 여겨지는 경우도 흔한 것은 씁쓸한 일이다. 언제나 3세대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갈등을 겪는다. 횡보는 바로 이 3세대들을 향하여 역할을 개척하여 시대를 구원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처       

        

염상섭이 조선일보에 삼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되던 해였다. 단편적 내용은 식민지하에서의 한 가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삶의 파노라마지만 심지를 밝혀보면 황폐해져 가는 조국을 상심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옆으로 걸으면서 써내려 간, 일제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충일하다. 지금 우리의 역사적 시선과 청산은 어떠한가. 단언하건대, 조국은 적당한 규모의 친일을 대들보에 올려놓고 유지됐다. 반면 민족 해방투쟁에 나섰던 독립 인사의 후손들은 유년 시절 교육 기회의 박탈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불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친일은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은 3대가 망한다는 말까지 있을까. 친일파 대부분은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공화국의 새 시대를 활보했다. 심지어 존경받는 지도급 인사로, 당대의 현자로, 저명한 문학의 기둥으치부된 이들도 도처에 무수하다. 해방 후 친일을 청산하기 위해 두 번의 법률이 제정되었지만 결국 우리는 그것에 이르지 못했다. 시대가 아무것도 떨쳐내지 못한 것은 분명하고도 답답한 사실이지만, 그들의 발바닥을 핥으며 기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또 다른 친일, 친독재 성향들을 생각할 때 분노에 앞서 측은지심이 이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횡보를 돌아보는 요즘도 간혹 누구 아무개가 친일파냐 아니냐 하는 소란이 있다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빼앗긴 들에 봄이 찾아온 이후 우리는 밥그릇과 자리다툼에 연연했으나 적어도 북한은 잔혹할 만큼 일제 청산에 열을 올렸다. 우리가 애교로 봐줄 만한 친일에도 여지없이 죽창이 꽂혔다. 이제 그 일을 두고 옳소를 한표 던진다면 나는 극좌파요 공산당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다시,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삼대가 여전히 흥미롭다면 그것은 거기에 함축된 역사적 시사 때문만은 아니다. 횡보는 사랑처럼 삶을 고양시킬 법한 계기들을 건조하게 취급한 반면에 저열한 욕망은 혹독할 만큼 궁핍하게 기록한다. 이러한 풍속 전반은 어찌 보면 일제가 치밀하게 진행시킨 인간 품성의 마비라는 계획된 덫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억압적 체제하에서 군중에게 학습된 습관은 원래부터 있었던 본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횡보는 바로 현실의 그 냉혹한 의미에 철저했고 그럼으로써 저항의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것은 근대의 숙명을 간파한 지혜이며 문학의 정신적 본질이었고 횡보의 항일운동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소설과 횡보를 돌아보았다. 소설을 떠나 생각해 볼 때 수탈에 의한 정신적 옥살이와 패배감, 정서의 위축이 해방 후에 과연 자유의지로의 복원이 되어 왔을까를 생각하면 선뜻 답을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가시처럼 박힌 상처를 매만지며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명쾌하고 단정한 결별이 때때로 곰팡이처럼 피어날 허튼 관계를 막아주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시대의 비비고 문질러야 할 것들, -이를테면 밥그릇 전쟁을 쉬지 않는 정치꾼들과 지폐 만세의 부도덕한 사회와 힘없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 같은- 우리 시대 전반에 포진해 있는 불편부당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꼬집기 위해 써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다른 이름의 나쁜 피가 존재하며 시대의 슬픔이 넘쳐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생각하면, 이제 무엇을 써야 할까 싶어 온종일 밥맛이 없기도 하고 미열과 두통 같은 것이 자꾸만 생겨나고 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 하고 미운 것을 밉다 하고 악함을 징계하는 뜻이 담기지 않으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하루키는 키워드 검색이 가능하고 백석이나 염상섭, 이육사는 안되는 것,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리틀 포레스트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