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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드조이 Oct 27. 2024

수상한 돈방

- 3 -

 "띵동~ 7번 고객님! 3번 창구에서 모시겠습니다"


 1980년대 경찰관 옷을 연상시키는 푸르스름한 상의에 짙은 남색 바지, 무슨 계급이 있는지 몰라도 어깨에는 견장이 하나 올려져 있고, 서부시대 총잡이가 했을법한 허리벨트에 연결된 가스총이 든 총집은 나에게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나의 천사 한미소 과장 덕분에 약 2주간의 기본교육 및 훈련을 수료한 뒤 돈방(은행)에 출근하게 된 지 이제 갓 3일째이다. 기본교육을 받으며 바퀴벌레 하나 잡지 못하는 내가 정말 강도를 때려잡을 수 있을지, 돈방업무에 문외한인 내가 고객안내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괜스레 적극적으로 날 밀어준 한미소 과장 면만 우습게 만드는 건 아닐지... 뿌연 안갯속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했던 나의 자존감은 이젠 아예 사라져 버렸는지 교육받는 2주간 머릿속이 욱신욱신한게 여간 힘에 부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한창 대학을 다닐 무렵 딸아이 하나 들러 업고 뛰쳐나와 눈물, 콧물 짜내며 버텨왔던 세월 속에서 노력하지 않아도 얼굴 곳곳에 번지는 주름처럼, 사람대하는 처세술 비슷한 것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돈을 움켜쥐고, 통장을 움켜쥐고 은행에 발 딛는 사람들의 표정은 참으로 천태만상이다. 죽을상, 울상,  희색만면상의 얼굴을 하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사하고, 응대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과 입이 움직였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안내를 위한 기본 은행업무를 숙지하는 데는 꽤나 더뎠지만, 천태만상의 표정을 꿰뚫는 나의 독심술은 꽤나 쓸 말한 무기가 되고 있었다.


 나의 자리는 직원들과 동떨어진 돈방 현관문 앞에 놓여 있다.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가장 개굴 지고, 산만한 아이를 선생님께서는 교실 바깥으로 책상과 의자를 빼셔서는 그 자리에 앉혀 반성하게 하곤 하셨다. 그 아이의 심정이 지금 나와 같지 않을까. 직원들이 열 지어 앉아있는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섬처럼 덩그러니 현관문 옆에 앉아 있자니 초등학교 시절 그 아이가 자꾸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자리 때문인지, 날씨 때문이지 자꾸 밀려드는 초라함은 독심술의 가동도 점차 중지시키고, 나의 처세술도 조금씩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인지 손님이 뜸하다. 손님이 뜸하다 보니 자연스레 긴장했던 무거운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며칠간 보려 해도 볼 수 없었던 이 공간의 모습과 사람들이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화이트배경에 블랙톤의 포인트 색감, 자리마다 들어찬 2개씩의 모니터와 천정에 떠있는 몇 개의 화면, 동전 계수기 등 은행집기들이 제자리를 찾은 듯 은행 전체가 작지만 옹골지게 보인다. 모니터 위로 반쯤 솟아있는 직원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얼굴이 하애 깔끔해 보이지만 까칠해 보이는 황정수 부지점장, 큰 키에 거구의 최태진 과장, 나의 천사 한미소 과장, 마시마로를 닮아 푸근해 보이는 김은영 과장, 구수한 사투리와 큰 목소리로 어르신들을 사로잡는 한수진 대리, 입사한 지 이제 3개월이 안된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한수진 주임, 건장한 체격과는 달리 간드러진 미성의 소유자로 지나친 문학적 표현을 자주 구사하는 강수연 지점장. 외딴섬에서 독심술의 촉수가 저들의 몸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그 촉수가 그들과 나 사이에 놓인 차디찬 에어컨 공기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가 녹슬고 해진 우산을 접으며 돈방으로 들어오신다. 어떤 업무로 방문하셨는지 묻는 나의 얘기를 들으신 건지, 못 들으신 건지 번호표도 뽑지 않고 나를 쌩 지나쳐 할아버지는 한미소 과장 앞에 자연스레 앉아 천역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아따~ 뭔 놈의 비가 어제부터 하루 죙일 내려 싼다냐! 일도 못허고 아주 죽겄구만.

아야! 한 양아~ 우리 따뜻한 커피 한잔썩 주믄 어쩔까?"  


7~80년대 다방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다방에서나 썼을법한 김양, 이양, 한양을 천역덕스럽게 써가며

나의 천사에게 은행용무는커녕 대뜸 커피를 두 잔 타오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우리 동네 -돈방은 우리 집에서 불과 3분 거리- 가 원래 경기도에서도 노인과 서민이 가장 많기로 유명한 지역이고, 쪼들리는 주머니 사정 때문이지 동네 어귀에서는 술에 취해 고성을 지르는 노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동네였다. 방금 그 무례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돈방 밖에 폐지가 가득한 리어카를 두고 온 것을 보니 나는 나의 독심술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돈방 지킴이로서 그냥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당차게 생각하고 노인 내외에게 다가서는 순간 한미소 과장은 세상 환하고 기쁜 표정으로 할아버지에게 달려오며 말했다.


"할아버지! 요즘 왜 이렇게 뜸하셨어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커피는 할아버지는 달달이 커피고, 할머니는 까만 쓴 커피 맞죠?" 


"요새 할멈이나 나나 삭신이 안쑤신디가 없어서 요 며칠 꼼짝 못했제~

 비싼 돈 주고 병원 가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응께 인자 포도시 움직일 만 허구만.

 집에서 할멈이 타주는 커피는 맛이 뭐싱가가 심심헌것이 쪼까 거시기 허고

우리 한 양이 타주는 커피를 묵어야 힘이 난당께~"

 목청 좋은 할아버지는 껄껄껄 웃으며 한미소 과장을 향해 큼직하지만 거친 엄치손가락을 연신 치켜세우고 있었다. 아무리 고객이 최고라지만 안하무인격인 이 할아버지께 이 정도로 친절해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한미소 과장이 너무 사람이 좋은 건지, 사실은 맹탕인 건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달달한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옆집으로 새로 이사 온 총각이야기, 노인정 박영감에게 화투로 돈을 천 삼백 원이나 잃었다는 이야기, 할머니가 처음으로 카레라는 것을 해줬는데 목에 칼칼한 것이 괜찮았다는 시시 껄껄한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고 있었고, 한미소 과장은 온 마음과 몸으로 행위하는 리액션으로 할아버지 얘기에 보답하고 있었다. 호탕한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말이 전혀 없으셨다. 이마에 깊이 파인 주름,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무엇보다 할머니의 수심 깊은 표정은 할아버지보다 몇 살이나 할머니를 더 늙어 보이게 했다. 뒤늦게 눈치챈 사실이지만 한미소 과장은 박장대소하며 할아버지에게 맞장구를 쳐주는 와중에도 큰 눈으로 할머니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었다. 어렵사리 한미소 과장이 할머니께 한마디를 건넨다.


"할머니! 요즘 어디가 많이 편찮으셨어요? 아직 안색이 안 좋으세요."

할아버지 옆에서 고생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는 거친 손으로 커피컵을 감싸 쥔 채 까만 쓴 커피만 조용히 드시고 계시던 할머니는 한미소 과장의 얘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시선의 목적이 어딘지 모를 퀭한 눈으로 무슨 생각인지 모를 잡념에 잠긴 모습으로 습관처럼 종이컵을 입에 갖다 댈 뿐이었다. 


"아따~ 이 사람아! 한 양이 뭐라고 안한가~

사람이 뭣을 물어보믄 대꾸를 해야 될 것 아닌가~!" 

한 양과의 기분 좋은 대화가 끊어진 것이 할머니 때문인 것 마냥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타박했다. 마음이 무거운 것인지, 몸이 무거운 것인지 할머니는 무언가에 짓눌리고 있는 듯한 머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할아버지의 타박에 얼굴을 찡그렸다.


"과장님! 언능 죽어야 할 것인디, 만날 몸도 아프고, 맘도 거시기한 것이 그날이 그날이어라"

말을 하시는 할머니의 표정, 눈빛들은 할아버지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고, 할머니의 한마디는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것을 건드리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볼일이나 얼른 보고 나가자며 할머니를 재촉했다. 할머니는 넓고 펑퍼짐한 낡은 자주색 몸배 허리춤을 뒤지더니 바지 안쪽에 옷핀으로 연결한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를 통장과 함께 한미소 과장에게 건넸다. 


"음....3천4백 원이네요. 와~ 할머니 오늘은 운수가 좋으셨나 봐요!"

"아니어라 과장님! 요것이 3일치여라~ 우리 영감이 자꾸 염치없이 과장님 커피 마실라고 매일 가자고 하는 거

 이틀 묶어놨다 온거랑께요~"

"호호호~ 할머니! 저 서운하게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전 할아버지, 할머니 하루라도 안 보면 제가 오히려 걱정돼서 하루종일 기분이 우울해져요. 그러니 낼부터는 한양의 커피를 드시러 매일 와주시는 걸로 해주세요!!"

"과장님은 우리 손자또래밖에 안됨서, 참말로 낫낫하고 좋소~"

할머니는 돈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보이셨고, 3천4백 원이 입금된 통장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한잠을 확인하신 후에야 일어날 기색이 전혀 없던 할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돈방을 나서셨다.


 은행이란 곳은 무미건조한 업무를 보러 오는 사무적인 사람들에게, 사무적으로 말하고 그 들의 사무가 끝나면 그만이며, 정확하게 똑 부러지게 업무를 처리해 주면 그만인 곳으로 생각했지, 방금 다녀가신 할아버지 내외처럼 무례한 손님에게도 마냥 인간적이고, 비사무적이고, 한미소 과장의 온기있는 반응은 돈방에 대한 나의 생각을 뒤틀어 놓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문을 닫을 수 없는 돈방의 특성상 점심은 교대로 해결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나의 천사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식사를 끝낸 후 잠시 짬이 있는 틈을 타 한미소 과장이 맹탕인지 아닌지, 나의 맘한구석을 건드린 할머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달다리와 검은 쓴 커피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관해 한미소 과장에게 넌지시 물어보게 되었다. 잠시 머물 거리던 한미소 과장은 그 큰 눈망울을 꿈뻑꿈뻑 깜빡여가며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언니! 나 사석에서는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내 얼굴을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한 과장의 눈에서 애처로움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회사에서 과장인 사람에게 언니로 불리는 것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나의 천사에게 언니소리를 다시 듣게 되니 소란스레 심장이 위아래로 울려대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네?아..음... 그럼...요"

"호호호호~ 언니! 동생한테 그럼요가 뭐에요~ 그럼 동생아! 라고 해주셔야죠.

음...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도 그렇고, 나 언니한테도 궁금한 게 많은데 이따 퇴근 후에 저랑 간단하게 치맥 어떠세요?"


힘들 때마다 딸아이 몰래 조금씩, 매일먹던 술이지만 누군가와 술을 먹어본 것이 얼마만이랴..

같이 하는 술자리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걸 조심해야 할지 조차도 기억에서 어렴풋하였지만 한미소과장과 같이 하는 맥주는 쓰지만 달 것 같았다. 처음엔 쓰지만 나중엔 달다는 것은 달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 우리 오늘 같이 치맥하자! 미소야~~~!"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겉치레로 들고 있던 존댓말과 호칭들을 홀연히 털어버리고 나니, 명치에 얹혀있던 작은 멍울들이 사이다 방울처럼 머리 위로 날아가 버리는 듯했다. 내 손등에 본인의 따뜻한 손바닥을 겹치는 미소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미소의 친언니가 된 듯 했다.


퇴근 후에 씰룩거리는 눈으로 암호를 주고받던 우리는 다른 동료들의 눈을 피해 돈방에서 멀지 않은 동네 맛집이자 방앗간인 치킨집에 들러 후라이드 치킨에 생맥주를 더하니 미소와 나 사이에 뿌옇게 껴있던 어색함은 어느새 웃는 눈가의 주름을 건너, 입꼬리 올려쳐주는 화기애애함으로 대체됐고, 취기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 한층 사랑스러운 모습의 미소는 생맥주를 단번에 반잔쯤을 들이켠 뒤에서야 조심스레 말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미영언니~ 아까 아침에 왔던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는 나도 입을 떼기가 참 힘들더라구요. 음...그냥 생각만 해도 그냥 맘이 찡한 게 말하기가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렇니깐 할아버지, 할머니를 처음 뵙게 된 것은 제가 입사하고 2년쯤 지났을 때 ㅇㅇ지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제가 입사한 지 벌써 13년째이니 할아버지, 할머니를 뵌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할아버지 성함은 김백만, 할머니 성함은 이막내세요. 어르신들 성함은 요즘 우리 눈으로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지만 제 입장에서는 외우기가 너무 쉬워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때부터 저는 백만할아버지, 막내할머니로 부르고 있거든요. 두 분은 원래 전라남도 어딘가에서 사셨는데 따님 병원문제로 4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 오셨고 그때부터 쭈욱 이 동네에서 살아오신 분들이에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셨고 슬하에 아드님, 따님 한 분씩이 있으셨어요. 제가 처음 막내할머니를 뵀을 때는 지금의 백만 할아버지보다 표정도 밝으셨고, 얼마나 생기 있는 분이셨는지 몰라요. 두 분이 농사짓던 농지가 아파트부지로 수용 되면서 받으신 토지보상금을 은행에 맡겨 두시느라 1년에 두어 번 저희 지점을 방문해 주셨고 그 업무를 제가 맡다 보니 자연스레 백만 할아버지와 막내 할머님을 알게 된 거에요.


 원래 따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지체장애가 있으셨고,  따님이 세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할머니의 뜻으로 아드님을 얻게 되었대요. 얘기만 들었지만 첫 따님의 장애 때문에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몸과 맘고생이 심했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게 된 지 1년 후쯤의 일이니깐...아마도 2016년도 일거에요. 항상 호탕하시고 사람 좋던 할아버지께서 어느 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은행에 오셔서는 통장을 던지다시피 하시면서 얼른 5천만 원을 찾아달라고 하시는 거에요.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드님이 출근하시다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수술비가 급하게 필요하셨던 거죠.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한 덤프트럭에 치여 아드님이 크게 다치셨고, 큰 수술을 몇 번 하셨지만 눈만 움직일 수 있는 사지마비의 장애인이 된 거죠. 아드님은 어렸을 적부터 공부도 잘하셔서 좋은 대학 졸업도 하시고, 누구나 아는 H자동차에 근무하셨으니, 아드님은 두 분의 큰 자랑거리었고, 결혼하셔서 예쁜 손녀도 생기고 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곤 하셨죠. 불행히도 사고 후에 며느리와 손녀는 연락이 두절되고, 하는 수 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몸이 불편한 아들과 딸을 간병하게 된 거죠. 참,.. 인생이 어쩜 이리 가혹할 수 있는지, 제가 할아버지, 할머니 같았으면 어찌 살 수 있었을지 정말 몰랐을 것 같아요..."

미소의 큰 눈망울에서는 심장 속에서 솟구쳐 눈을 통해 뿜어대는 냥 맑은 눈물 몇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쯤 은행이 들르셔서 아드님, 따님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며 작지 않은 금액을 찾아가시곤 했어요. 그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말 몇 마디와 따뜻한 믹스커피 한잔이 다였지요. 다른 때는 몰라도 할아버지는 커피를 드실 때만큼은 얼굴에 옅은 미소라도 지으셨고, 다 드신 후에는 고맙다고 손녀뻘인 저에게 연신 인사를 하곤 하셨어요. 아드님 사고 후 1년 뒤쯤 안타깝게도 아드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그 후 몇 개월 뒤 소아마비를 앓고 있던 따님마저 세상을 떠나시게 됐어요. 두 분의 맘이 어떠셨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네요. 아들과 딸을 2년 새에 모두 하늘나라로 보낸 뒤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돈도, 세상도 다 필요 없다고 하시며 나쁜 생각까지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맡기셨던 예금의 만기가 한 달이 넘도록 은행방문도 없으셨던 터라 제가 당시 지점장님과 할아버님댁에 방문했을 때는...." 울먹이던 미소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말없이 미소의 빈 잔에 맥주를 채워주며, 미소의 떨리는 손등을 살며시 붙잡아주었다. 가녀리게 떨리지만 보드랍고, 따뜻한 미소의 손에서 나의 심장이 데워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미소를 통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은 진흙탕 속에 반쯤 갇힌 나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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