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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즐거운가
Nov 02. 2024
가족이 되는데도 시간이 필요해요.
건강한 경계가 건강한
'사이가 좋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끼리 마음의 거리가 잘 지켜졌을 때 하는 말이다.
"00 서방은
우리
집에 오면 뭐든 맛있게 잘 먹고 뭘 해줘도 고마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 참 좋아.
그런데 00 서방은 뭘 사주면 이거 내가 꼭 먹어야 하나? 이런 표정이야. 입도 짧고.
00 서방도 성격이 00 서방 같았으면 좋겠어."
외식 중 식당에서 본의 아니게 엿들은 어느 노부부의 대화
내용이다.
요
지는 둘째 사위가 좀 더 싹싹했으면 좋겠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희망
사항이다
.
아무리 잘해줘도 불편해
연년생 두 딸
에
게 훌륭한 엄마 역할을 해내는 극히 정상적인 성인인 큰딸!
그러나 사위의 표현을 빌리자면 "ㅇㅇ이는 어머니 집 문턱을 넘는 순간 급 사춘기 소녀가 돼버려요"라고 말할 정도로
친
정만 오면 심각한 퇴행
현
상을 보인다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내 손에 세끼 밥을 얻어먹는가 하면 온 집안에 애들 옷이며, 사용한 기저귀, 장난감을 여기저기 마구 던져놓는다. 흡사 집안이 융단 폭격을 맞은 것
같다.
'너희 집은 반짝반짝 정리도 잘해놓고 살면서 대체 왜 이러냐?'라고 물으면 "몰라!
엄마
집에만 오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네!"라면서 막 웃는다.
그간 엄마 노릇하느라
아주 고단하고 힘들었구나 싶다. 그래! 며칠간 철없는 딸의 가면을 쓰고 살다 가도 좋겠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영
역 안으로
들어온 딸의 모습은 한껏
편
안해 보이고 의기양양해 보인다.
반면 사위에게는 여전히 우리 집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사위는 잘 웃고, 싹싹하고, 예의 바르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이다.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자신의 부모님과도 두루두루 잘 지낸다.
예민
한
성향의 사람이
이
렇게
많은 사람들과
좋
은 관계를 맺고 살려니 속으로 힘들 때가 있겠구나
!
짐작
해
본다. 나를 대하는 모습
역시 어딘가 직장 상사를 대하는 느낌
이
들 때도 있다.
나 역시 사위처럼 결혼 초 낯을 많이 가렸다
.
시부모님이 그렇게 어려울 수 없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셨다.
합가하고 힘들어하는 며느리가 안타까우셨는지 가끔 조용히 불러 타이르곤 하셨다.
"얘야! 매번 시어머니랑
애
들 크는 이야기만 나누지 말고 네 마음속에 있는 말들도 다 하고 그래라. 그래야 친해지지."
한마디로 '
우
리 집에서 편히 있어!
하고
싶은 말
다 해'라는 말씀이
었
다.
'정
말요?
그래도 되나요?
그게 되면
진짜
부모
님
인정!
'
내 속으로 낳은 자녀들에게
대
개의 엄마
는
이런 행태를
눈
감아준다.
퇴근하면 건어물처럼 늘어져 있기
휴일에는
더
이상 잠이 안
올 때까지
늦
잠
자
기
차려주는 밥
먹고
손
가락 까딱 안 하기
성질나면
교양 없이 대
들
기
아침저녁
문안 인사 생략
가능
더운 날
헐
벗은 옷 입고
나와서
돌아다니기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우
리
시어머니도 그런 어머니셨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부러운 것은 늦잠이었다. 주말
이
면 남편
은
낮 1시
까지 허리가 아파서 더 이상 누워있기 힘들 때까지
잤다.
당시 나는 왕복 네 시간을 출퇴근하는 맞벌이 직장인
에
임신부였지만 딸이 아니었기에 매
주
그
런 남편의 모습을
구
경만
하며 부러움으로 치를
떨었다.
나
는 그때마다 생각했다.
누
워있는 남편의 저 몸과 내 몸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큰딸은 긍정의 아이콘이다
.
싹싹하고 밝
다
.
속상하거나 걱정되는 일도 툭툭 잘 털어낸다.
딸은 결혼 전부터 남친의 어머니와 무척 잘 맞았다. 심지어 결혼할 즈음엔 시어머니에게 홀딱 빠져서 엄마인 나보다 시어머니 감이 더 좋다는 말까지 했다.
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시던지? 그래봐야 넌 내 딸이거든?'
나보다 시어머니가 더 좋다니 결국 내 딸이 행복한 거 아
닌
가? 나로서는 대환영할 일이다.
부디 죽을 때까지 그 맘 변치
말
길 바란다.'ㅋㅋㅋ
그러나 딸은 출산을 하고 바로 깨달았다.
아무리 좋아도 시어머니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걸... 엄마는
몸을 갈
아 딸의 산후조리를 해주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해 몸까지 갈
수는 없다.
딸은 여전히 다른 집 고부간과 비교할 수 없이 시어머니랑 사이가 좋다. 그러나 시어머니 앞에서는 내 앞에서처럼 개판 오 분 전 사춘기 멘붕 소녀의 모습으로 퇴행하지 못한다.
제 부모 앞에만 서면 자동 발생하는 퇴행 현상!
긍정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며느리(사위)들도 시댁(처가)에서 이
것
만은
시전 하기
힘들
걸
?
인정할 건 인정하자
사람
에 따라 다르
겠
지만 많은 경우 배우자의 부모가 마음으로부터 진짜 가족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다행히 아이를 낳고 나면 부쩍 가까워진다.
거기에 해마다 시간이 쌓이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조금씩 서먹함이 사라져 간다.
결혼
당시의 내 나이와 결혼 생활을 한 햇수가 비슷해질 즈음에야
나
는 비로소 시어머니가 마음으로부터 편안해졌다.
남편
역시 친정아버지 장례를 함께 치른 이후 마음으로부터 울
엄마가 편안해졌다고 했다.
무려 25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남편은 울 엄마의
남편이 멀리 떠나는 길을
가장 가까이에서
배웅해 드리면서
엄마와
더 가까워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생활 30년이 넘어가자, 남편이 울 엄마를 대하는 모습이 확 달라졌다. 엄마가 억지를 부리면
농담인 척 말꼬리마다 잡고 늘어지며 마구마구 토를 단다.
전에 볼 수
없던 일이다.
작년에는 제발 뿌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려도 들깨를 텃밭에 뿌리는 울 엄마에게 화를 버럭 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런 건 딸인 나나 하는
짓인데?(앞으로도 이건 나만 하겠다고 부탁했다)
급기야 돌아가신
친
정아버지와 똑같
은
짓도 해서
나에게
'
당신이 00 씨 아들이세요?'라는 핀잔도
자
주 듣는다. 남편은 이제 엄마와 가족처럼 보인다.
똑같이 못 하니까 힘든 거다.
평소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정상적인 성인이 시댁(처가)에 와서 내 딸(아들)이랑 똑같이 퇴행할 수 있다면
거의
(완전히 아님) 가족 맞다.
다들 그걸 못하니까 시댁(처가) 이 힘든 거다.
나는 결혼 선배
입장에서 사위의 행동이 전혀 서운하지 않다.
자신을 낳고, 키워주지도, 밥도, 빨래도, 학비도 안 대준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님 아버님으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고맙다.
나는 신혼 초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호칭을 목구멍에서 끄집어낼 때마다 홍길동과 딱 정반대의 심정을 느꼈다.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어머니가 아니잖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아니잖아
(
당시
남편
은
내
부모를 장인,
장모님
으로
불렀다).
얼마 전 나는 심리학자 김경일(마음의 지혜
/포레스트북스
)님의 글을 읽다가
'배우자의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 나라도 있다'
는 글귀를 만났다. 고부(장서)
갈등을 겪는 사람들이 읽으면 반색할 내용이다.
유전자가 섞이지 않았으니 엄밀히 말하면 가족이 아닌 게 맞고, 가족이 아
니
라는 것을 인정해야 더욱 예의를 지키고 조심하며 불화도 적어질 것이라는
의
미
다
그러니
서로의 부모를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는
건
' 결혼했으니 소중한 배우자의 부모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부모처럼 대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미 정도로 부디 해석
했
으면
좋
겠다.
결혼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경계를 쌓는
과정이다. 아내와
남편이 된 순간 둘 사이에는 양가 부모와 형제
등 새로운 관계가
끼어든다.
갑자기
오늘부터
우리는
가족 1일이
란
다.
하지만 친밀감은 마음먹는다고
갑
자기 샘솟는 감정이 아니다
.
돌이켜보면
내
아이가 결혼하기까지
우
리는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던가?
새빨간 신생아가 어른이 되기까지 공유한 온갖 기쁨과
슬픔, 그 무섭다는 중2병, 가족 내의
숱
한 갈등과 어려움을 함께 공유했다
.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날
결
혼으로 맺어진 사위(며느리)
가
내 딸(아들
)
로 여겨진다?
그들
에게
내 딸(아들)처럼 해주길 바란다? 어불성설이다.
진정 딸(아들)이 되길 원한다고? 그럼, 우선 아이들이 그간 내게 했던
골질과 진상짓부터 허해보자.
흔히 '우리가 남이가?'라
는
말
을
한다.
그렇다.
우리는 남이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차근차근
알아가면 된다.
어색해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쪽이 있다면 그쪽을 기준 삼고 그 뜻을 존중해 주면 된다.
나는 사위와 만날 때마다 우리 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아주 조금씩 좁아지는 것에 만족한다. 사위의 어색한 모습
도
사랑스럽다.
가족이 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관계의 강도를 설정할 때는 상대에게 별로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 맞춘다.
만약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면 이는 마치 압력을 행사하는 것과 다름없다.
균형은 두 사람 중 한쪽에서 뭔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무너진다.
예민함이라는 무기/ 롤프젤린. 유영미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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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지 마세요
08
당신의 경계는 안녕하신가요?
09
거절당해도 난 괜찮아.
10
가족이 되는데도 시간이 필요해요.
11
사돈과 나 사이에
12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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