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남대문으로 가자!”
명호가 앞장서며 말했다.
“그게 ….”
신우가 갑자기 망설였다. 뭔가가 불안한지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신우야, 왜 그래? 아직 영업시간이 남았어.”
명호가 주저하는 듯한 신우를 보고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
신우가 대답 대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초조해 졌다.
아침에 그녀를 잊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약속 시각이 다가오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음속이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한동안의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한쪽이 이겼다.
‘… 그래, 약속했으니 지키는 게 맞아. 그게 도리에 맞아. 사람이라면 도리를 지켜야지. 암!’
신우가 고개를 끄떡였다.
오늘만큼은 타오르는 열정이 복수의 일념을 이겼다. 그녀를 반드시 만나야 했다.
그가 사정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미 목소리였다.
“명호야, 가야 하긴 하는데 오늘은 늦었잖아. 내일 아침에 찾자.”
명호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문 닫을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잖아. 내일 찾아도 상관은 없지만, 굳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명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우의 주저하는 목소리를 듣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어! 낯빛이 별로네? 어디 아파? 눈을 뜬 이후로 아픈 적이 없었잖아. 다시 도진 거야? 그런 거야?”
명호가 불안한 기색으로 내비쳤다. 신우가 다시 아픈 것만 같아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신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명호야, 그런 거 아니야. 몸은 괜찮아. 그냥 오늘은 너무 늦었어.”
신우는 명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여자를 만나러 간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실망할 거 같았다.
“그래, 그래. 무리하지 말자. 그러면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찾기로 하자.”
명호가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했다. 무엇보다도 신우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몸이 아프면 복수는 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둘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
셋이 동대문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명호와 소년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웠다. 반면 신우는 그들의 계획을 듣기만 하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금 신우의 머릿속에는 에리카를 만날 생각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했다.
‘지금 가야지 시간에 맞게 도착할 것 같은데 … 좀 늦으면 뛰어갈까? 어차피 이번만 보고 끝날 사이인데 왜 이리 불안하지?’
신우가 초조함에 가만있지 못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거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러갔다.
에리카와 약속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신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더 지체되면 뛰어가도 늦을 것 같았다.
“어? 식은땀이!”
명호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신우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신우야! 아무리 봐도 너 좀 쉬어야 할 거 같다. 빨리 저녁 먹고 집에 돌아가자.”
“아니야! 지금 갈 데가 있어.”
신우가 급히 말했다.
명호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말 없었잖아. 어디 가야 하는데?”
“사실, 약속이 있어! 지금 가봐야 해. 그럼, 이만 가 볼게. 이따 집에서 봐!”
신우가 말을 마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뭐라고? 너 여기 아는 사람도 없는데 … 웬 약속?”
명호가 신우를 향해 소리쳤지만, 신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달렸다.
“그럼 저녁은 어떡해? 먹고 오는 거야?”
명호가 신우에게 계속 소리쳤지만, 신우는 순식간에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딱 그거네. 재주가 좋은 아저씨구나, 헤헤헤.”
소년이 신우의 뒷모습을 보며 실실 웃었다. 그가 명호에게 말했다.
“돈 많은 아저씨가 여자 만나러 가는 것 같은데요.”
명호가 발끈했다. 그가 정색하고 소년을 꾸짖었다.
“이 자식이! 버르장머리 없이 허튼소리하고 있어. 신우는 경성에 온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무슨 여자가 있어.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야. 한가하게 연애나 할 사람이 아니야!”
“황급하게 내달리는 꼴을 보니 딱 그건데요. 아저씨는 보기와 달리 좀 둔하네요.”
소년이 명호의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놈! 자식이, 감히 어른을 놀려!”
명호가 버럭 화를 내며 소년에게 덤비자, 소년이 냉큼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외쳤다.
“아저씨, 내일 아침 8시 여기에서 다시 봐요. 헤헤헤.”
소년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명호가 참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년의 말에 일리가 있는 거 같았다. 신우가 촌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간다면 여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신우에게 여자가 있을 리 없어. 그건 말도 안 돼. 타고난 바람둥이도 아닌 데 며칠 사이에 여자를 사귀었다고? 그런 용한 재주가 있을 리 없어. 뭐 다른 일이 있겠지.”
명호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던 중 평양냉면집이 보였다. 간도에서도 평양냉면이 맛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이에 이번 기회에 한 번 먹어볼 심산으로 입맛을 다시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기요. 냉면 한 그릇 하고 왕만두 한 접시 주세요!”
명호가 손바닥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고향에서 먹던 국수가 생각났다. 입에 침이 잔뜩 고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평양냉면과 왕만두가 나왔다.
“히히히!”
명호가 젓가락을 들었다. 면을 한입 덥석 베어 물고 국물을 들이켰다. 면발에서 메밀 향이 느껴졌다. 그런데 국물 맛이 예상외였다. 그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엥?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지?”
명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평양냉면 맛에 사방을 둘러봤다.
식당은 손님들로 꽉 찼다. 다 맛있게 평양냉면을 먹고 있었다.
“이게 맛있는 건가?”
명호가 무안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다 먹고 판단하기로 했다. 그렇게 허겁지겁 다 먹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 서울 사람들은 맹물에 국수를 담가서 먹는구나. 나도 맹물 국수나 팔아볼까?”
한편 신우는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각에 늦을 거 같았다. 공원으로 가려면 번화가를 통과해야 했다.
많은 행인이 길을 막았다. 행인뿐만 아니라 자전거, 차들이 돌아다녔다. 번화가 옆에는 주택가가 있었다. 주택들이 김장 항아리처럼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좋다!”
신우가 지름길로 가기로 작정했다. 몸을 날려 앞에 있는 지붕 위로 도약했다. 가볍게 착지한 후 그 반동을 이용해 다른 집의 지붕으로 날아갔다.
마치 날다람쥐가 여러 나무를 뛰어다니듯이 지붕과 지붕을 뛰어넘으며 쏜살같이 내달렸다.
하지만 속절없는 시간이 점점 흘러갔고, 결국, 약속 시각이 지났다.
에리카는 신우와 달리 여유가 있었다.
약속 시각 2시간 전
에리카를 태운 관용차가 관저로 향했다. 그녀는 다른 날보다 일찍 퇴근했다. 서둘러 서류를 정리하고 차에 올라탔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연신 노래를 흥얼거렸다.
에리카의 밝은 표정을 보고 사토가 잠시 생각했다.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아가씨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나요?”
사토의 질문에 에리카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긴요. 그냥 날이 좋아서 기분이 상쾌하네요.”
에리카가 본심을 숨기고 사토의 말을 받았다.
“그렇군요.”
사토가 차창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에리카의 말처럼 맑고 화창한 날이었다. 이에 고개를 끄떡이고 에리카의 얼굴을 쳐다봤다.
창문 한쪽으로 강한 빛이 들어왔다. 에리카의 한쪽 얼굴이 사파이어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잠시 후, 관용차가 관저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에리카가 총총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요시코가 따랐다.
화장대에 앉은 에리카가 요시코의 도움을 받으며 꽃단장을 시작했다.
화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여러 번 화장을 고쳤고, 드레스도 여러 번 갈아입으며 옷맵시를 확인했다.
그녀의 단장을 도와주던 요시코는 오늘따라 유별난 그녀의 행동에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에리카에게 손가방을 건네주면서 슬쩍 물었다.
“언니, 오늘 무슨 약속 있어요?”
“응! 이따가 약속이 있어.”
에리카가 기분이 꽤 좋은 듯 콧소리를 내면서 답했다.
“그러면 … 남자! 큭.”
요시코가 터지는 웃음을 손으로 가리며 킥킥거렸다.
“뭐! 그걸 어떻게?”
순간, 에리카의 얼굴이 빨개졌다.
“설마, 친구분 만나러 가면서 이렇게 신경을 쓰겠어요? 척 하면 삼천리죠. 헤헤헤!”
요시코가 에리카의 눈치를 살피며 눈웃음을 쳤다. 그러다 프랑스제 향수병을 흔들며 말했다.
“이 향수도 뿌리면 좋을 것 같아요.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위해 비싼 돈 주고 사 오신 프랑스제잖아요.”
“아! 맞아. 이게 있었지. 그럼 한번 써 볼까. 하하하!”
에리카의 두 눈이 에메랄드처럼 반짝였다. 요시코가 건넨 향수병을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환한 미소를 짓고 손목에 향수를 뿌렸다. 그리고 향을 맡았다.
은은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상큼한 라일락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신이 난 그녀가 다른 쪽 손목에도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에이! 아가씨, 너무 많이 뿌리면 안 돼요!”
요시코가 에리카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리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적당하게 … 은은한 향이 가장 매력적이에요. 과하면 남자들이 도망가요. 도망가면 잡을 수 없어요.”
요시코의 말에 에리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시코를 슬쩍 흘겨보면서 말했다.
“요시코는 어떻게 그렇게 아는 게 많아? 난 미국에서 공부만 해서 연애 경험이 없는데 … 요시코 혹시, 연애 도사?”
“연애 도사는 무슨! 제가 무슨 남자가 있겠어요. 그냥, 귀동냥으로 들은 것뿐이에요.”
요시코가 정색하며 답했다.
두 처자가 웃음꽃을 피우며 말을 나눴다. 방 바깥에는 한 남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사토였다. 무척 언짢은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제 일로 기분이 몹시 상했다.
아가씨가 정체불명의 남자를 다시 만날 거 같았다. 그래서 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다나카에게 보고할 서류도 빼 먹는 등 일진이 안 좋았다.
게다가 좀 전은 커피를 마시다 바지에 쏟고 말았다. 이에 오늘은 정말로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투덜거렸다.
‘갑자기 불안하네.’
사토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에리카의 기분이 너무 좋은 것 같았다. 그게 생각할수록 불안했다. 아침부터 발걸음이 가벼웠고, 퇴근할 때는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고 혼자서 들떠있는 그녀를 보면서 서운함을 느꼈다.
“호호호!”
방안에는 여전히 웃음꽃이 넘쳤다.
그러다 에리카가 갑자기 정색했다. 그리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따라 사토가 불편했다. 아침부터 자기를 주시하는 거 같아서 불편함을 느꼈다.
오늘 그를 만나는 날인데 어제처럼 사토가 훼방 놓을 거 같았다. 긴 칼을 들고 설칠 것만 같았다. 헌병대의 위세만 믿고 그를 겁박할 거 같았다.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이에 에리카는 요시코의 도움을 받을 생각에 어제 일을 동생에게 소상히 말했다. 영리한 요시코가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어머머머! 어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요시코가 어제의 일을 듣고 놀라서 귀를 쫑긋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신중한 목소리였다,
“제가 보기에 … 사토님이 예전부터 언니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언니는 관심 없어요?”
요시코가 에리카를 슬쩍 떠보았다.
“무슨 소리! 사토 중좌님은 그냥 아저씨의 부관일 뿐이야.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에리카가 정색하며 딱 잘라서 말했다.
요시코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사토님은 본의 아니게 사랑의 훼방꾼이네요. 간단한 해결책이 있어요. 약속 시각 전에 심부름을 시켜요. 먼 곳으로 보내버려요.”
“아! 그러면 되겠네. 역시 요시코는 머리가 참 좋아. 역시 내 동생이야.”
에리카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