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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1편_32화

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by woodolee

32화_수소문


“내일 이 시간 … 여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에리카가 수줍게 속삭였다.


작은 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렸다.


신우가 움찔했다. 여인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심장까지 밀려왔다. 더는 외면할 수 없었고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는 건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뜨거운 가슴이 차가운 이성을 눌렀다.


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연못에 드리워진 에리카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화답했다.


“네, 그러지요. 내일 여기에서 만나요.”


“오늘 일의 보답으로 저녁 사드릴게요!”


에리카가 깜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쁜 마음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꼭 잡았다.


신우와 에리카가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내일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졌다.


날이 어두워 밤바람이 찼지만, 둘에게는 순풍이었다.


에리카가 먼저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신우는 다리 위에 서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둘은 상대방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신우는 에리카의 젖은 신발을 보면서 걷기가 불편할 거 같아 내심 걱정이 됐고, 에리카는 신우가 약속을 지키리라 확신하며 속으로 활짝 웃었다.


‘반드시 내일 나타날 거야. 아, 참! 이름도 못 물어봤네. 바보같이 ….’


에리카는 고개를 돌려 남자의 이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을 즐기며 설레는 가슴을 다독였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한편, 사토는 큰 나무 뒤에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에리카가 공원에서 사라지자 긴 칼을 주저 없이 뽑아 들고 부리나케 연못으로 달려갔다.


“저놈이 감히, 에리카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어!”


사토는 에리카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것도 절절하게!


그는 10년 전 에리카를 처음 봤다. 그때 그녀는 십 대 후반이었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유학을 마친 에리카가 성숙한 여인으로 다시 나타났다.


그날은 에리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사토는 다나카의 명으로 인천에 도착한 그녀를 마중하러 나갔었다. 여객선에서 수많은 사람이 내렸다. 그중에서 한 여인을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챙이 큰 모자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 드레스를 입고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오는 아리따운 에리카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에, 에리카!”


사토가 에리카의 이름을 부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에리카 집안과 인연이 있었다. 에리카 아버지인 오오하라의 부관이었다가 후에 다나카의 부관이 되었다.


다나카의 부관이 된 후 전쟁터를 숱하게 돌아다니며 별의별 일을 다 겪었었다. 그 와중에 많은 여성을 만났고 그들과도 교제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에리카의 아름다움과 도도함, 고상함은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사랑스러웠다. 햇빛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려도 눈썹의 섬세한 떨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이후로 사토는 에리카에게 인생을 걸기로 했다. 다나카에게 달려가 수행 부관을 자청했다. 수행 부관은 관저에 숙소가 있는 부관으로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에리카 옆에 있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자네가 수행 부관을 하겠다고?”


다나카가 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사토에게 말했다.


사토가 절도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령관님을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싶습니다.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사령관님의 우국충정(憂國衷情) 마음을 옆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흐흐흐! 우국충정이라 … 그것만 있는 게 아니지. 결사보은(決死報恩)도 있어.”


“결사보은이라고요? 결초보은(結草報恩)이 아니고?”


“응, 죽기를 각오하고 은혜를 갚으라는 뜻이지.”


“알겠습니다. 우국충정과 결사보은의 자세로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좋다. 그리해.”


둘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둘의 속마음은 달랐다.


사토와 다나카는 오랜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다나카는 사토를 껄끄러워했다.


사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다나카를 경멸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나카의 잔인한 성품에 역겨움을 느꼈다.


하지만 에리카 옆에 있으려면 그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간절히 원한다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이었다.



그건 사토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희망과는 달리 에리카는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집사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았다. 지극정성으로 모셔도 다정하게 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사무적으로 대하고 멀리했다.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


사토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언젠가 에리카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그 날이 오리라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데, 오늘 웬 낯선 놈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감히 에라카의 몸을 껴안다니 도저히 신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놈을 반드시 요절을 내겠다!”


연못 다리에 오른 사토가 번뜩이는 칼을 휘두르며 신우를 찾았다. 그를 찾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요절내겠다는 심산으로 이곳저곳을 다 뒤져보았다.


“이놈이 어디 갔지? 벌써 내뺐나?”


하지만 어디에서도 신우를 찾을 수 없었다.


“젠장! XX!”


사토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허탈한 표정이었다.


가로등 불이 은은하게 빛났다.


“이놈 다음에 걸리면 국물도 없다!”


사토가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마치 먹이를 놓친 굶주린 늑대 같았다.



***



창문을 통해 밝은 햇빛이 쏟아졌다. 신우가 눈을 떴다.


아침 6시였다. 신우가 몸을 뒤척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상시보다 좀 일찍 일어났다.


“휴우~!”


그는 잠을 설쳤다. 어제 우연히 만난 여인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청하려 누웠지만, 아름다운 얼굴이 계속 떠오르고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리는 거 같아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신우는 눈이 멀고 22년 동안 여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였다.


천신만고 끝에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됐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없었다.


그러다 어제 그녀를 보고 여태까지 느낄 수 없었던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어머니처럼 목소리가 좋았고, 사토라는 부관에게 강단 있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났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총탄을 온몸으로 맞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분이었다.


늘 강하고 아름다웠던 어머니를 잃고 수심에 잠겼던 그에게 에리카는 그의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같았다.


“정신 차리자!”


신우가 밖으로 나가서 찬물로 세수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쌀쌀한 찬 바람을 맞으며 굳은 의지를 되새겼다.


오늘 저녁에 그녀를 만나기로 했지만,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제는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잡았지만,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가까이할 수 없는 일본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는 불가한 일이었다.


그냥, 시간에 맞춰 사람을 보내, 미안하다는 연통만 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아침이다!”


신우가 크게 심호흡하고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소매치기 소년과 만나는 날이었다. 소년은 촌장에 대한 정보를 물어오기로 약조했었다.


명호는 그를 반신반의했지만, 신우는 그가 분명 정보를 물어오리라 확신했다.


시간이 흘러 약속 시각이 점점 다가왔다.


신우와 명호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서 한참 동안 소매치기 소년을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 시각에서 한 시간 이상 지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거봐, 그 녀석이 사기 칠 거라 했잖아! 딱 봐도 자식이 믿음이 안 갔어.”


소년에게 뿔이 잔뜩 난 명호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명호야. 조금만 더 기다리자.”


신우가 난감한 표정으로 명호를 달랬다.


“쓸데없이 돈만 썼다니깐!”


입이 삐죽 나온 명호가 다리가 아픈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신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년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건가? 걔 눈빛이 믿을 만했는데 … 허탕인가.’


신우가 고개를 숙였다. 자기 어리석음을 탓했다. 명호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둘이 낙담했을 때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한 소년이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신우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왔다! 걔가 왔어!”


신우가 반가움에 크게 소리쳤다. 명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년이 헐레벌떡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그날 신우와 명호한테 혼났던 소매치기 소년이었다. 그가 서둘러 말했다.


“아이고! 아저씨들 제가 좀 늦어서 미안해요! 종로 패를 기다리다가 늦었어요! 그놈들이 이렇게 굼뜰 줄을 상상도 못 했어요.”


소년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자식이 같잖은 변명을 하네. … 그래, 좋다! 늦게라도 왔으니 다행이지. 뭐 알아낸 게 있어?”


명호가 짜증이 난 표정으로 소년을 쏘아붙였다.


“네, 아저씨. 좋은 소식이 있어요!”


소년이 뭔가 큰 것을 알아낸 것처럼 당당하게 소리쳤다.


“오! 그래. 그럼, 빨리 말해.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데?”


명호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 두 손을 비볐다.


신우도 긴장감에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종로에는 그 사람이 없어요.”


소년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고? 종로에는 없다고 … 그럼,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데?”


명호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아직은 못 찾았어요. 하지만 분명, 종로에는 없어요. 다른 곳을 수소문하면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소년이 명랑하게 답했다.


“뭐라고? 이놈이 자식이! 어른을 놀려!”


명호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주먹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신우가 명호의 어깨를 잡았다. 그렇게 진정시키고 소년에게 물었다.


“애야. 다른 곳에서 쓸만한 소식이 없니?”


“열심히 수소문하고 있어요. 십여 명을 찾았어요. 외지인에 육십 대, 큰 쌀가게 주인이 꽤 있더라고요.”


소년이 신이 난 듯 열심히 떠들었다.


“그런데, 간도 출신은 찾기가 어렵대요. 꼭 간도 출신이어야 해요?”


소년이 그것은 어렵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명호가 뭔가를 깨달은 듯 급하게 말했다.


“신우야. 그자가 간도 출신이라는 걸 숨기지 않았을까?.”


“그래! 굳이 간도 출신이라고 밝힐 필요가 없지. 간도 출신이라고 하면 연고가 없다고 무시당할 것 같아.”


신우도 명호의 말에 동의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간도에서 온 사나이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신우가 소년에게 말했다.


“그럼, 외지인들을 모두 확인해보자.”


“그러면 동대문, 남대문, 명동에서 열다섯 명 정도는 될 거예요.”


소년이 똑 부러지게 답했다.


“그 정도면 … 오늘이나 내일 중에 찾을 수 있겠구나. 아주 좋아! 당장, 그 사람들을 찾아가자.”


신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절 따라오세요.”


소년이 뛰어가며 소리쳤다. 동대문으로 달렸다.


"가자!"


"그래."


신우와 명호가 소년의 안내를 받으며 동대문으로 향했다.


동대문 번화가에서 소년이 왈패를 찾았다. 그들한테 정보를 재차 확인했다. 그렇게 쌀가게 방문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요. 제가 주인을 부르면 아저씨들이 주인을 확인하세요.”


“그래, 좋다. 그렇게 하자. 우리는 먼발치에 있을게.”


소년이 신이 난 표정으로 쌀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인을 불렀다.


“주인 어르신 계세요, 밖에서 사람이 찾아요!”


“누가 왔다고?”


70대 노인이 쌀가게 밖으로 나왔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삐쩍 말랐다.


신우와 명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촌장이 아니었다.


소년이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 다른 가게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여러 쌀가게를 돌아다녔지만, 촌장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동대문 일대 쌀가게 방문이 끝났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일렀다. 남대문과 명동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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