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현판 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 1편_34화

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by woodolee

34화 마를린


약속 시각이 다 되었다. 에리카가 모든 단장을 마치고, 요시코에게 사토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요시코가 사토 집무실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토 중좌님! 아가씨께서 찾으세요.”


“뭐라고? 아가씨께서 나를 찾는다고?”


사토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에리카가 자기를 사적으로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에 급하게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깔끔하게 빗었다. 뛰는 가슴을 달래며 급하게 에리카의 방으로 달려갔다.


사토가 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했다. 약간 머뭇거리다가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사토입니다.”


“들어오세요.”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리카가 상냥한 목소리로 사토에게 말했다.


“사토 중좌님,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불렀습니다.”


“네! 말씀만 하세요. 어떤 부탁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사토가 감격해서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마구 뛰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은 에리카를 보고 그 매혹적인 자태에 취한 나머지 몸을 떨었다.


“저녁 먹고 꽃꽂이하려고 했는데 … 안개꽃이 다 떨어져서요. 제가 지금 할 일이 있어서 부탁합니다.”


에리카가 공손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꽃을 사 오겠습니다.”


“시내에 라일락이라는 꽃집이 있어요.”


사토가 에리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요시코가 킥킥 웃었다.


사토가 허겁지겁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요시코가 방으로 들어가 에리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정중히 90도로 굽혔다.


”자! 아가씨. 이제 나가시죠.“


요시코의 깍듯한 인사에 에리카가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럴까? 동생. 호호호!“


에리카가 요시코의 손을 잡고 우아하게 집을 나섰다.


한편, 신우는 공원 연못을 향해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의 노력에도 시간은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약속 시각이 벌써 지났다. 5분 정도 늦게 도착할 거 같았다.


”젠장!


신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토라져서 약속 시각이 지났다며 그냥 가버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5분 후


신우가 약속 장소인 공원 연못에 도착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사방을 살폈다.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그냥 가버렸거나 아니면 늦게 오는 거였다. 그는 후자이기를 바라며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소매로 땀을 닦았다.


“어머머! 가슴 넓은 거 봐! 멋있다. 언니는 좋겠당! 크크크!”


연못 근처 정자에 에리카와 요시코가 숨어 있었다. 신우를 본 요시코가 감탄했다. 그녀가 마치 부러워죽겠다는 듯 언니의 등을 마구 두드렸다.


에리카와 요시코는 약속 시각보다 5분 일찍 도착해서 연못이 잘 보이는 정자 속에 숨어 있었다.


약속 시각이 지나자, 에리카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우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5분 후, 기다리던 그가 나타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요시코는 신우가 멋있다면 방정을 계속 떨었다.


“왔다!”


에리카가 정자에서 나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신우가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했다. 그때 요시코가 그녀의 팔을 꼭 잡았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언니, 좀 있다 나가요.”


“왜? 저분이 기다리잖아.”


에리카가 의아한 표정으로 요시코에게 말했다.


“언니를 보고 싶으면 더 기다리겠죠.”


에리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더 기다리게 했다가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데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갈게. 이따 집에서 봐.”


에리카가 요시코를 뿌리치고 급하게 달려갔다.


“아이. 참! 조금 늦게 나가지. 좋긴 좋은가 보네.”


요시코가 언니가 귀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한 여자가 연못을 향해 달려왔다.


신우가 환하게 웃었다. 어제 여기에 본 아가씨였다. 베이지색 드레스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신우도 에리카를 향해 달려갔다. 둘이 1m를 사이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하다니 ….’


숨을 헐떡이는 에리카를 보면서 신우가 미안함에 몸둘 바를 몰랐다. 보잘것없는 자기를 보려고 그녀가 뛰어왔다. 너무나도 미안했다.


연못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에리카의 몸을 감싸는 긴 드레스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우아한 왈츠였다.


그는 어젯밤 에리카를 보면서 그리운 어머니를 떠올렸다. 오늘은 한 남자로서 아름다운 여인을 봤다. 사귀고 싶고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제가 좀 늦었지요.”


에리카가 약속 시각에 늦은 체하며 미안함을 표했다.


“아닙니다. 별로 기다리지 않았어요. 하하하!”


신우가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순간, 에리카가 움찔했다. 신우의 호탕한 웃음에 홀려 그만 그에게 달려갈 뻔했다. 이내 정신 차리고 입술에 침을 묻혔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저, 제가 자주 가는 경양식집이 있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예약했어요.”


“네! 좋습니다. 그런데 전 양식은 처음이라서 … 그게 좀.”


신우가 멋쩍은 듯 허탈 웃음을 터뜨렸다. 신우의 털털한 웃음에 에리카의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르르 풀렸다.


“어머! 처음이세요. 처음 봤을 때도 도시 사람 같지 않았어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물어봐도 실례가 되지 않겠죠?”


에리카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는 간도에서 왔습니다.”


신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도라고요? 어디를 말하는 거죠? 어디에 있는 섬이죠?”


에리카가 간도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라는 말에 섬이라고 생각했다.


“섬이 아니고요. 북쪽에 있는 큰 강, 그걸 압록강이라 부르죠. 압록강 위에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만주국에 속해 있습니다.”


신우가 고향 생각에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러면 거기는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저도 만주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그러면 우리는 똑같이 북쪽에서 왔네요. 그러면 저도 간도 출신이에요.”


에리카가 신우의 말을 듣고 기뻐서 손뼉을 짝 쳤다. 같은 북쪽 출신이라는 사실에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렇게 신우와 에리카는 동향이라는 공통점을 갖게 되었다.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한편, 사토는 라일락 꽃집에서 안개꽃을 사서 관저로 돌아왔다. 꽃을 들고 에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이 열려 있었다. 방 안에 인기척이 없었다.


“어? 어디 계시지?”


사토가 방문 앞에서 두리번거렸다. 그때 복도를 걷는 요시코를 보고 달려가서 말했다.


“요시코! 아가씨는 어디에 계시지?”


“앗! 사토 중좌님. 아가씨는요. 약속이 갑자기 생겨서 나가셨어요. 아! 이게 사오 신 거구나. 저한테 주세요.”


요시코가 말을 마치고 안개꽃을 달라는 듯 두 손을 쭉 뻗었다.


“아가씨는 언제 오시는데?”


사토가 실망한 표정으로 요시코에게 재차 물었다.


“그야 모르죠? 기분이 좋으시면 좀 늦게 오실 거 같아요. 저녁은 밖에서 드신다고 하셨어요.”


“대체 누구를 만나는데?”


사토가 급한 마음에 요시코에게 재차 물어봤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뭐 좋은 사람 만나시겠죠.”


요시코가 말을 마치고 사토에게 받은 안개꽃을 들고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사토 옆을 지나갔다.


“이거 좀 이상한데?”


사토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요시코의 능청맞은 대답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약속이라니 … 혹 어제 그놈과 다시 만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 으으으!’


사토가 답답한 마음을 안고 집무실로 돌아갔다. 퇴근해야 할 시간이 벌써 지났지만, 숙소로 가고 싶지 않았다.


에리카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초조한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면서 에리카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



신우는 에리카와 함께 종로에서 가장 유명한 경양식집인 마를린(Marilyn)에 들어갔다.


마를린은 경성에서 유명한 서양음식점이었다. 외관부터 서양식 장식을 도입해 눈길을 끌었다.


아치와 기둥, 테라스로 이루어진 건물은 한마디로 유럽풍이었다. 테라스에서 식사하면 종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식당 안에 들어가면, 고상한 둥근 원목 테이블이 눈을 즐겁게 했고 번쩍이는 금장식 의자가 손님을 기다렸다.


홀 중앙 천장에는 멋있는 샹들리에가 화려한 자태를 뽐냈다. 수많은 등에 들어온 불빛이 서로 중첩되면서 황홀한 빛의 향연을 펼쳤다.


신우는 소박한 만주국에 살다가 경성에서도 가장 화려한 식당에 들어가자 순간, 눈이 부셔서 당황했다.


‘세,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그가 그의 눈을 의심했다.


에리카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신우를 보고 빙그레 웃고 귓속말했다.


“괜찮아요, 잡아먹지 않아요.”


에리카의 장난기 어린 농담에 신우의 긴장이 풀렸다.


그가 씩 웃자, 에리카도 기분이 좋은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신우와 에리카는 종업원의 안내로 종로의 밤을 즐길 수 있는 테라스로 자리를 잡았다.


커플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신우는 메뉴판을 보고 당황했다. 모르는 단어가 너무나 많았다. 메뉴판은 일본어와 한자, 영어로 적혀 있었다.


그는 애석하게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었다. 생활에 필요한 한글과 한자를 조금 아는 수준이었다. 까막눈을 겨우 면한 수준이었다.


그것도 명호가 가르쳐 준 거였다. 눈을 뜰 때 글을 알아야 한다며 10년 전에 가르쳐줬다.


신우가 머뭇거리자, 에리카가 재빨리 메뉴판을 보고 코스 요리 C를 시켰다.


“이곳은 코스 요리가 싸고 좋아요!”


에리카가 커다란 냅킨을 목에 걸쳤다. 그리고 따라 하라는 듯 손짓했다.


“아, 네. 이걸 걸치라고요.”


신우가 냅킨을 목에 걸쳤다. 에리카의 행동을 따라 하면서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했다.


종업원이 먼저 스프를 가져왔다.


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보는 스프를 보고 이게 뭔가하고 의아해했다. 죽처럼 생겼는데 냄새가 고소했다.


그러다 에리카가 작은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에리카처럼 작은 숟가락을 들고 스프를 떠먹다가 뜨거워서 깜짝 놀랐다. 숟가락을 그릇 안으로 깊게 넣는 바람에 입안에 불이 난 거 같았다.


“깊게 떠먹으면 뜨거워요. 위에서부터 살짝살짝 떠먹어야 해요. 괜찮아요?”


에리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예, 괜찮습니다.”


신우가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뜨거움을 달랬다. 에리카처럼 스프를 살짝살짝 떠먹기 시작했다.


그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서양식 식사에 허둥댔다. 그럴 때마다 에리카가 친절하게 식사 예절과 기구 사용법을 설명해 줬다.


애피타이저가 끝나고 본 식사로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신우는 큰 덩어리로 나오는 스테이크를 보고 이것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감했다.


앞에 있는 칼로 푹 찍어서 뜯어먹어야 할 거 같은데 그건 너무 우악스러운 거 같았다. 여기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이에 에리카의 큰 눈을 쳐다보면서 무언의 도움을 청했다.


“접시를 주세요.”


에리카의 말에 신우가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건넸다.


에리카가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서 건네주었다. 포크를 잡고 어떻게 먹는지도 가르쳐줬다.


신우가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그녀의 행동을 따라 했다. 그가 생각했다.


‘서양 음식은 왜 이렇게 까다롭게 먹어야 하지 … 참 이상한 일이야.’


그는 답답했지만, 스테이크를 포크로 꼭 집어서 한입 먹자, 고소한 육즙이 터져 나와서 깜짝 놀랐다. 너무나도 맛있었다.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는 소고기는 처음 먹어봤다.


‘정말 맛있다!’


신우는 에리카가 섬세한 손길로 자른 고기를 한 점 한 점 먹으면서 맛의 신세계와 그녀의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정성껏 차렸던 언제나 그리운 밥을 다시 먹는 것만 같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04화현판 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 1편_3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