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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 1편_35화

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by woodolee

35화 사토의 분노와 촌장의 행방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신우와 에리카가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다정하게 담소를 나눴다. 속 깊은 이야기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통했다.


“참! 성함을 물어보지 못했네요? 이름이?”


에리카는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는 철호입니다. 아! 아닙니다. 제 이름은 철호가 아니라 신우입니다. 철호는 제 친구 이름이고요. 실수로 친구 이름을 말했네요. 제가 좀 긴장했나 봐요. 저는 이신우(李信雨)입니다.”


신우가 처음에는 철호라는 이름을 말했다. 철호라는 이름은 15년 전 장춘에서 사들인 이름이었다. 죽어가던 청년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 이름을 샀다.


신우와 동갑인 이철호는 차에 치여 죽어갔다. 그에게는 마지막 소원이 있었다. 압록강 건너 고향 땅에 묻히는 거였다. 이에 소원을 들어주고 그의 신분을 샀다.


그때부터 신우는 공식적으로 이철호가 되었다. 이신우는 22년 전, 마을 뒷산 오두막에서 죽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우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에리카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본명을 말했다.


에리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신우! 참 좋은 이름이네요. 저는 오오하라 에리카에요. 그냥 에리카라고 불러주세요.”


“아! 에리카씨군요. 이름이 참 예쁘네요.”


신우가 고개를 끄떡였다. 에리카라는 이름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잘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곱게 단장하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내린 모습은 그가 상상하던 선녀 그 자체였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엄마가 말했었다.


“오늘 선녀들이 목욕하러 선녀탕으로 내려오겠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를 생각하자, 머릿속에 마지막 소풍이 떠올랐다. 구산 절벽에 올라서 해질녘을 바라보던 그때가 생각났다.


붉은 노을빛을 받으며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휘날리던 엄마 대신 에리카가 있었다.



*



둘이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벌써 해가 떨어 진지 오래였다.


시간이 밤 9시를 향해 갔다.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신우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에리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둘이 나란히 걸었다. 그것도 바짝 붙어서 걸었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듯 다정함이 더해졌다.


한편 사토는 2층 집무실에서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시계가 벌써 밤 9시를 가리켰다.


“젠장! 너무 늦잖아!”


그는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창문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에리카를 애타게 기다리며 밖을 주시했다.


“다 왔어요! 저기가 제가 사는 집이에요”


에리카가 오른손 검지로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한눈에 보기에도 으리으리한 집이었다.


‘아, 아니!’


대단한 저택을 보고 신우가 깜짝 놀랐다. 어젯밤 갑자기 나타났던 헌병대 장교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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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정체를 밝혀라. 이분은 지체 높으신 분의 따님이시다. 너처럼 하찮은 것이 범접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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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만 대단한 게 아니었다. 담벼락이 언덕처럼 높았고 차들도 많았다. 간간이 군용차가 보였다.


그 모습에 위압감을 느꼈다. 저택 앞에는 경비를 서는 군인도 보였다.


일본군이 등장하자, 신우가 뒤로 한발 물러섰다.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가 급히 말했다.


“그럼, 대접 잘 받았습니다. 이만.”


신우가 말을 마치고 에리카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를 계속 만나고 싶었지만 이만하면 됐다며 자신을 설득했다.


그녀는 평범한 일본인이 아니었다. 총독부에 근무하는 고관대작의 딸이거나 원수인 일본군의 딸인 거 같아 더는 만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제도 그랬듯이 심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서 가야 한다고 계속 머릿속에서 외쳤지만, 요동치는 심장이 이를 거부했다.


발이 땅바닥에 딱 붙어서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에리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방적으로 작별 인사하고 등을 돌린 신우를 보고 순간 화가 치밀었다. 어제도 그냥 가려고 하더니 오늘도 똑같았다. 그녀가 생각했다.


‘신발 한 짝을 찾으려고 … 몸을 사리지 않고 연못으로 뛰어들었던 그 박력은 도대체 어디에 간 거지?’


그녀가 답답함을 느꼈다. 때론 박력이 넘치기도 하고 때론 우유부단하기도 한 그를 보면서 그 속을 알 수 없어서 참 답답했다.


어제는 자기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약속을 잡았다. 그러면 오늘은 신우가 약속을 잡아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자기를 외면하는 그를 보고 너무나도 야속했다.


이에 에리카가 입을 꾹 다물고 서운한 눈빛으로 신우를 쳐다봤다.


“…….”


에리카가 답을 하지 않자, 신우가 난처함을 느꼈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둘은 조용히 줄다리기하고 있었다.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었다.


신우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는 22년여 동안 쌓인 피맺힌 복수를 하려고 간도에서 경성으로 왔다. 촌장을 수소문해서 거의 다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한 여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절치부심했던 복수심보다 어제 만난 일본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녀의 침묵은 자기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신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에리카를 바라봤다. 그녀가 원망하는 눈빛으로 자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부딪쳤다. 신우가 움찔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그가 서둘러 말했다.


“그러면 … 돌아오는 일요일에 시간이 되세요?”


“글쎄요?”


에리카가 약한 화가 난 듯 새침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오늘 일에 대한 보답으로 점심을 사겠습니다.”


신우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뭐, … 시간이 될 거 같네요.”


에리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기 뜻대로 신우가 움직이자, 이내 기뻐서 속으로 크게 웃었다.


신우가 약속 장소와 약속 시각을 정하고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신우씨, 일요일 날 봐요.”


에리카도 고개를 숙이며 맞절했다.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올랐다.


“이거, 참.”


신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오늘만 만나고 더는 만나지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했건만, 또 만날 약속을 잡고 말았다.


그녀와의 만남은 삭막했던 삶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와 같았지만, 현재 처지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관저 2층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토가 창문 너머에서 신우와 에리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당장 칼을 뽑아서 신우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옆에 있는 에리카 때문에 손만 덜덜 떨 뿐이었다.


에리카는 저 멀리 사라지는 신우의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봤다. 마치 애인을 배웅하는 거 같았다.


“젠장! 이게 대체!!”


사토가 발발 동동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에리카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안으로 들어서자, 뒷문으로 내달렸다.


쾅! 소리가 들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토가 긴 칼을 들고 뒷문을 박차고 나갔다. 신우를 따라잡으려 전력 질주했다.


저 멀리에 신우가 보였다. 이에 더욱 힘을 내어 내달렸다. 결국, 천천히 걷던 신우를 앞질러서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긴 칼을 쭉 뽑아서 호통을 쳤다. 찬란한 검광에 눈이 부셨다.


“네 이놈! 감히 아가씨에게 또 들러붙다니! 네 정체를 밝혀라!”


사토가 긴 칼을 신우의 얼굴에 겨누었다.


신우가 대답 대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에 이어서 또다시 등장한 사토를 보고 도대체 뭐 하는 녀석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겉보기에 헌병대 장교가 분명했지만, 하는 짓은 머저리 같다고 생각했다.


“빨리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헌병대로 끌고 가겠다.”


사토가 더욱 크게 소리쳤다. 묵묵부답인 신우를 보고 화가 더 치밀어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신우가 귀찮은 듯 성의 없이 답했다.


“난 그냥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경성은 지나가는 길입니다.”


신우가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어, 이놈 봐라! 어디에서 시 건방을 떨어!”


사토가 신우의 표정을 보고 격분했다. 뽑아 든 칼을 신우의 목에 들이댔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날카로운 칼날이 목에 닿을 것만 같았다.


“빨리 네 정체를 순순히 밝히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이 칼날이 용서치 않을 거다!”


사토가 으름장을 놓으며 신우를 다시 겁박했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


신우는 잠시 사토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오른손을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가볍게 잡았다.


“이, 이놈이 감히! 대일본제국 헌병대 장교의 칼날을 잡다니!!”


사토의 두 눈이 뒤집혔다. 커다란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에 칼을 높이 쳐들어 신우를 단칼에 베어 버리려고 힘을 썼다. 그런데 칼이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신우의 두 손가락 힘에 사토가 어쩔 줄 모르며 낑낑댔다.


“칼을 놔라! 어서!!”


사토의 말의 신우가 답했다.


“소원이라면 들어주죠.”


신우가 말을 마치고 두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칼이 툭 하며 부러졌다. 칼이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그가 말했다.


“아이고, 칼에 금이 갔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사토가 반쪽짜리 칼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두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되고 말았다.


신우가 잡고 있던 반쪽짜리 칼을 바닥에 던지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을 상대하기 싫습니다. 할 일이 있어서 여기에 왔을 뿐,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갈 겁니다.”


그는 성질 급해 보이는 일본군 장교와 싸워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부모와 친구의 원수를 찾아서 그들을 처단하는 거였다.


“그럼, 이만.”


신우가 걸음을 옮겼다.


“서, 서라! 서라고!!”


사토가 신우를 향해 크게 외쳤다. 하지만 신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토가 두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권총으로 신우를 겨냥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사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신우한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을 …. 오히려 연못에 빠질 뻔한 에리카를 구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그를 따라왔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이는 건 대일본제국 장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에 사토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권총을 다시 권총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부러진 칼을 칼집에 도로 넣었다.


그가 낙담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칼에 금이 갔었다니 ….”


사토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는 칼을 매일같이 손질했었다. 그런데도 금이 간 걸 몰랐다. 이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이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긴 칼은 장교의 상징이었다. 항상 칼을 깨끗이 잘 닦고 손질하는 게 장교의 위상이고 명예였다.


사토가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신우를 노려보다가 크게 외쳤다.


“만약, 아가씨에게 몹쓸 짓을 한다면 … 그땐 가만두지 않겠다!”


사토가 신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었다.


한동안 사토의 발광이 계속되었다.


밤이 계속 깊어갔다. 그렇게 긴 하루가 끝나갔다.



다음날이 밝았다.


신우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오랜만에 근심 걱정을 잊고 푹 잤다.


어젯밤 에리카와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돌아오는 일요일 날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앞으로 5일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에 긴장감이 풀렸다. 그래서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몰려왔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곯아떨어졌다.


명호는 집에 오자마자, 별말 없이 곯아떨어진 친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왜 이리 피곤해하지? 힘든 일을 했나?”


그는 무척 궁금했지만, 곤히 잠든 친구를 깨울 수는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신우가 명호를 깨웠다. 명호한테 촌장을 찾을 계획을 들었다. 이에 급히 세수하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신우가 간도에서 경성에 온 이유는 촌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일단, 촌장을 찾으면 한시름 놓을 것 같았다. 촌장한테 그날의 진상을 들어야 했다. 그런 후에 에리카를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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