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마석은 오늘 중요한 수술을 집도했다.
예정에 없었던 수술이 갑자기 잡혔다. 총독부 2 인자, 정무 총감 부인이 병원에 찾아왔다.
그녀는 명동에 있는 호텔로 나들이 갔다가 갑작스럽게 복통을 호소했다.
이에 수행 비서들이 가까이 있는 병원을 찾았다. 마침 5분 거리에 병원이 있었다. 마석이 외과 과장으로 일하는 가산의원이었다.
“급한 환자입니다. 정무 총감 부인께서 복통을 호소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마석이 정무 총감 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충수염을 직감하고 수술을 준비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 복막염으로 진행하기 전에 충수 돌기를 제거했다.
30분 후 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정무 총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부인이 급하게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에 얼굴이 새하얘졌다.
“정무 총감님! 저는 병원장입니다.”
병원 원장이 정무 총감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집도의인 마석을 소개했다.
“집도의인 카야마 선생입니다.”
마석의 일본식 성은 카야마(佳山)였다. 그가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
“수술에 성공했습니다. 사모님께서 별 탈 없이 회복 중입니다.”
“오! 그래요. 감사합니다.”
정무 총감이 기뻐하면서 마석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석이 넘치는 기쁨을 참지 못했다. 총독부 2 인자 정무 총감의 따뜻한 손길에 감개무량했다.
그동안 힘들게 공부하면서 쌓아왔던 울분이 눈 녹듯이 사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한테 차별받던 서러운 기억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확실한 뒷배가 없어서 일급 병원에 근무하지 못하는 억울함을 한 방에 날리는 것 같았다.
마석은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집에 알리려고 인편을 보냈다. 남은 일을 서둘러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석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촌장과 부인이 그를 환대했다,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셋이 가게 안, 사무를 보는 작은 방에서 자리를 잡았다.
“장한 우리 아들! 드디어 큰일을 해냈구나. 네가 자랑스럽다.”
촌장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야! 이제야 살 것 같다. 하하하!”
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아들을 꼭 껴안았다. 정무 총감과 연줄이 닿았으니 커다란 날개를 달았다고 생각했다. 하는 일마다 꼬투리 잡고 사사건건 무시하는 자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때, 점원이 촌장을 불렀다. 한 사람이 주인어른을 찾는다면 어서 나오라고 말했다.
이에 촌장이 일을 보겠다면 나갔다.
잠시 후, 소름 끼치는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촌장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갑자기 비명이 들리자, 부인과 마석이 방문을 급히 열었다.
동시에 가게 뒤편 창고에서 일하던 점원 두 명도 가게 안으로 달려왔다.
밖에서 망을 보던 명호도 비명을 듣고 가게 안을 살폈다. 촌장이 신우 앞에서 졸도한 걸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망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 저 사람은 누구지?”
점원 둘이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나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주인은 방문 앞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마석이 급히 말했다.
“어서 아버지를 방으로 옮겨요.”
“알겠습니다.”
점원 하나가 주인을 업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석이 촌장의 상의 단추를 풀었다. 근처에 있는 장부를 들고 부채처럼 부치면서 응급조치했다. 그 덕분에 촌장의 의식이 점점 돌아왔다.
부인은 쓰러진 남편을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앞에 있는 점원에게 말했다. 힘깨나 쓸 것 같은 점원이었다.
“동수야, 저놈이 주인님을 해친 거니?”
“아마 그런 것 같아요.”
체격이 좋은 점원이었다. 그가 신우의 위아래 쭉 훑어보고 중얼거렸다.
“이놈이 또 뭐지? 처음 보는 놈인데. 명동 깡패나 종로 깡패는 아닌 거 같은데 ….”
점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신우와 인연이 있었다. 22년 전 신우와 격투를 벌였던 시장 왈패 두목 동수였다.
동수는 마석의 사주를 받고 신우가 독립군과 내통했다고 거짓 밀고를 한 인물이었다. 그 이후 촌장의 심복이 되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현재 그는 촌장의 심복답게 쌀가게 점원을 통솔하고 시장 깡패들을 상대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동수가 오른손을 꽉 쥐고 왼손으로 주먹을 어루만졌다. 입맛을 다시면 신우에게 다가갔다. 무척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뭐냐? 네가 주인님을 해친 거냐?”
“…….”
신우가 답을 하지 않았다.
“이놈의 자식아! 감히 내 말을 무시해?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동수가 버럭 화를 냈다. 이를 악물더니 신우의 안면을 향해 힘껏 주먹을 날렸다.
빠른 주먹이었지만, 신우 눈에는 나무늘보가 주먹을 뻗은 거 같았다.
신우가 몸을 살짝 돌렸다. 그렇게 동수의 주먹을 피했다.
동수의 주먹을 허공에 갈랐다.
“어어어?”
주먹을 내지를 때 너무 힘을 준 탓인지 동수가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아이고! 이놈의 자식이 감히!”
동수가 분을 참을 수 없는지 이를 박박 갈며 벌떡 일어났다.
그때 신우가 천둥 같은 호통을 내리쳤다.
“너는 관계없다! 나서지 마라! 난 촌장에게 받을 빚이 있다!!”
우레와 같은 소리였다.
“아, 아이고! 깜짝이야!!”
크나큰 소리에 동수가 깜짝 놀랐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대방의 기를 팍 꺾는 우렁찬 소리였다. 이에 머뭇거렸다. 기가 꺾인 나머지 신우한테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신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있는 촌장을 향해 걸어갔다.
“으으으~!”
촌장이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힘들게 떴다.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게 대체?”
마석이 몸을 떨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이에 경찰에 신고하려고 전화기를 찾았다. 근처에 전화기가 있었지만, 수화기를 들 수가 없었다.
무척 성이 난 남자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언제라도 방 안으로 쳐들어올 거 같았다. 딱 봐도 힘이 무척 세 보였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어머니, 아버지를 부탁합니다.”
마석이 어머니에게 급히 말하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옆 가게 전화를 빌려서 경찰에 신고할 심산이었다.
“주, 죽지 않았구나. 어릴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
촌장이 힘들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잠시 신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두 눈을 떨구었다.
신우가 22년간 쌓아온 분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난 그날 죽지 않았다! 맹인이 되어 22년 동안 어둠 속에 살았다! 오늘 당신에게 그 빚을 … 이자까지 쳐서 갑절로 받고 말겠다!!”
신우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왜! 아버지와 어머니를 무고했지? 왜!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을 일본군에게 팔아넘긴 거야!”
신우가 그동안 쌓아왔던 크나큰 울분을 토해 버렸다.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분노의 불꽃이 다시 타올라서 가슴에서 터져 버렸다.
“왜! 일본군을 끌고 와서 나를 잡으려고 한 거야? 그날 덕대와 누렁이가 죽었고, 기철도 결국 …….”
신우가 한 손으로 얼굴을 꽉 부여잡았다. 원통함을 참을 수 없는지 옆에 있는 기둥을 있는 힘껏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신우의 엄청난 힘에 굵은 기둥이 그만 부러지고 말았다. 그 충격으로 지붕이 흔들리면서 위에서 먼지가 비 오듯 우수수 떨어졌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신우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마치 저승사자가 죽은 이를 데려가듯 살벌했다.
“으윽!”
촌장이 신음을 내뱉으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콱 부여잡았다.
신우가 촌장의 멱살을 잡아서 번쩍 위로 들어 올렸다. 마치 베개를 들어 올리는 거 같았다.
“아악!”
이 모습을 본, 부인이 그만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고 말았다.
갑자기 지붕이 흔들리자, 밖에서 망을 보던 명호가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신우에게 멱살이 잡힌 촌장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가슴 속 피맺힌 응어리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촌장은 신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 쳤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잡았군.”
명호가 신우 옆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촌장이 급히 말했다.
“너 … 너는 명호!”
명호가 씩 웃었다.
촌장이 이를 갈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날 속였구나!”
“맞아, 네가 당신을 속였지. 안 그랬다면 신우를 죽이려고 또 쫓아왔겠지. 하하하!”
명호가 통쾌한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아~!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촌장이 고개를 떨구고 망연자실했다.
신우의 눈동자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낙담한 촌장의 얼굴을 보고 측은함을 느꼈다. 이젠 왜소하고 늙은 자였다. 사로잡힌 손아귀에서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한 마리 연약한 짐승 같았다. 그렇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다. 결코!
신우가 이를 악물었다. 촌장을 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촌장이 가슴을 부여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신우가 태산처럼 촌장 앞에 서 있었다. 서슬 퍼런 눈빛에 촌장이 고개를 떨구고 개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촌장이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그날 일본군 대장이 독립군에 협조한 30명을 대지 않으면 우리 가족부터 죽인다고 했단 말이야!”
촌장이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억울한 듯 울부짖었다.
“뭐, 뭐라고?”
갑작스러운 촌장의 말에 신우가 깜짝 놀랐다. 촌장의 어깨를 부여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그가 말했다.
“다시 말해 봐. 일본군 대장이 어쨌다고?”
“내, 내가! 무고한 사람들을 왜 고발했겠어. 사실은 다 그놈 때문이었어!”
촌장이 울먹이며 신우에게 진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대장이 독립군에 협조한 30명을 대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 협박했어. 난 정말 어쩔 수가 없었어. 전부 몰살당하기보다는 30명만 희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 정말 미안하다. 신우야!”
“세, 세상에!”
촌장의 말에 신우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만 그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날의 진실은 그가 감당하기 너무나도 어려웠다.
촌장의 말은 진실 같았다. 그가 흘리는 눈물은 진심 어린 후회 같았다.
명호도 촌장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러다 22년 전 마을에 나돌았던 소문을 떠올렸다. 그가 촌장에게 따져 물었다.
“그날 이후 마을에 소문이 나돌았어. 당신이 빚을 갚기 싫어서, 돈 빌려준 사람들을 지목했다고 … 그래서 신우 부모님을 무고한 거지? 내 말이 틀렸어?”
“…….”
촌장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침묵 속의 인정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명호가 다시 따져 물었다.
“신우 부모님을 무고해놓고 신우까지 죽이려고 들어? 당신이 사람이야? 입이 있으면 말해 봐. 신우를 잡으려고 일본군까지 끌고 왔잖아! 그때 신우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 … 어서 말해 봐!”
촌장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급히 말했다.
“난 신우가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 목격자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군에게 신고한 거뿐이야.”
신우가 발끈했다. 그가 외쳤다.
“뭐라고? 난 독립군과 내통한 적이 없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독립군을 본 적도 없는데 누가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그자가 대체 누구야?”
신우가 치를 떨었다. 자기를 무고한 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서 크게 소리 질렀다.
촌장이 힘겹게 한 손을 들었다. 가게 바닥에 웅크려 떨고 있는 동수를 가리켰다.
이에 신우와 명호가 동수를 노려봤다.
“아이고!”
동수가 질겁했다.
순간, 신우가 바람처럼 동수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콱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