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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 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 1편_30화

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by woodolee

30화 첫 만남


에리카가 관저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울적할 때면 자주 나와서 마음을 추스르는 곳이었다.


길옆에 있는 수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매끄러운 긴 머리칼이 아름답게 휘날렸다.


기분이 다소 풀렸는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던 에리카가 공원 한가운데 있는 연못 앞에서 멈췄다.


커다란 연못이었다. 큰 비단잉어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연못 위로 큰 나무다리가 있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길쭉한 다리였다.


에리카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탁탁!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다리 중간 쯤에 걸음을 딱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날이 저물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음!”


에리카가 목청을 가다듬더니 시 한 수를 뽑기 시작했다. 시 낭독은 그녀의 취미였다. 어릴 적부터 시를 짓고 낭독하는 걸 좋아했다.


낮에 엄마와 함께 시를 짓고 퇴근한 아빠 앞에서 이를 낭독하면 아빠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었다.


“우리 이쁜 딸! 시도 참 잘 짓네.”


그때가 참 그리웠다. 화목했던 그때의 추억은 살아가는 버팀목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후견인인 다나카 아저씨가 최선을 다해 잘해주지만, 그에게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에리카가 시 한 수를 뽑은 후, 요시코가 얼마 전에 들려준 시를 낭독했다. 일본말이 아닌 한국말이었다.


“앉은뱅이

이곳이 앉을 곳이 아니라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앉은뱅이의 설움이 그리운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신은 그에게 ‘일어서라!’ 하시며

자유를 주었고

나에겐 앉으라고 말씀을 왜 안 하시는가?

자유로운 발걸음에 날개를 단 듯 세상을 휘저어도

한 점 앉을 곳조차 없으니

앉은뱅이가 어찌 안 부러우랴!”


낭송을 마친 에리카가 눈을 꼭 감았다. 이 시는 요시코가 주방에서 일하면서 나지막하게 낭송했던 시였다.


에리카가 감탄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연히 들은 시였지만, 그녀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가슴이 저렸고 왠지 모를 커다란 슬픔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요시코에게 한국어를 배워서 괘 능통했다. 그래서 시의 구절을 다 음미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병석에 누워있는 하녀 요시코의 힘든 삶을 반영한 듯, 한 점 앉을 곳조차 없는 서러운 삶의 비애가 느껴졌다.


앉은뱅이의 설움이 그리울 만큼, 요시코와 같은 한국인들이 처한 상황이 안쓰러웠다.


그것은 졸지에 고아가 돼서 마음 둘 곳이 하나도 없었던 자기 처지와 비슷했다. 처량함과 그리움이 절로 느껴졌다.


이 시의 애상한 감복한 에리카가 요시코에게 물었다.


“시 작가가 누구야?”


“작가 이름을 잘 모르겠어요. 다만 문학 잡지에서 읽은 시에요. 짧아서 외웠어요.”


이에 에리카가 고개를 끄떡이고 그 자리에서 시를 다 외웠다.


그녀는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이 시를 낭송했다. 시를 다 읊조리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에리카가 길게 숨을 내쉬고 이번에는 자기가 지은 시를 낭독했다. 역시 한국말이었다. 한국말을 배우고 지은 시였다.


“채송화

이끼 껴 말라버린 눈동자에

우연히 눈에 띈 채송화

어둠을 가르는 잎새의 빛이 짙푸르구나!


수줍게 펼쳐진 소박한 선 끝과

무취의 내음이 가슴속에 향그럽다.


사치한 뭇 꽃들의 화려한 내음이 세상을 채울지라도

한 송이 채송화를 내 가슴에 담아 사랑하고 싶다.”


그때 신우가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다.


오늘 신우와 명호는 촌장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명호는 남대문 쪽에서 수소문했고 신우는 동대문 쪽에서 촌장을 찾았다.


소매치기 소년에게 촌장 찾기를 부탁했지만 그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오늘 허탕을 친 신우가 허한 마음을 달래려 근처에 있는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조용히 산책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릴 적에 엄마가 들려주던 그리운 노랫가락 같았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들어와 그의 마음을 울렸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요정이 노래를 부르는 거 같았다.


“이 소리는?”


신우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갔다. 공원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웬 아름다운 여인이 시를 읊조리고 있었다.


“누구지?”


신우가 다리 위로 올라가 미지의 여인을 쳐다봤다.


옛날 일이 반복되는 거 같았다. 엄마의 고운 노랫소리에 아빠가 매혹된 것처럼 그도 아름다운 목소리에 이끌려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신우의 엄마처럼 큰 키에 날씬했다.


눈썹은 먼바다를 날아가는 갈매기의 날개 같았다. 부드러운 곡선을 뽐냈다.


오뚝한 콧날은 고상해 보이면서도 약간 도도했다.


우아하게 옆으로 길게 드리워진 눈꼬리는 슬퍼 보였고, 아울러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것 같았다.


도톰하고 작은 입술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는 그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15살에 눈이 먼 신우는 3개월 전에 눈을 떴다. 그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인은 꿈속에서나 상상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꿈속에서 상상했던 여인이 현실에 등장했다.


그는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이성에게 끌리는 걸 어찔할 수 없었다.


신우의 몸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갔다.


“응?”


에리카가 시를 읊조리다가 멈칫했다. 누가 오는 거 같았다. 이에 고개를 돌렸다.


건장한 남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년의 나이로 보였다. 검은색 안경을 끼고 한 손에 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검은색 안경 때문에, 그 눈빛을 볼 수 없었지만 굳게 닫힌 입술과 높은 콧대가 인상적이었다.


행색은 남루했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기가 있었다.


“이 사람은 ….”


에리카는 침을 꿀컥 삼켰다. 신우의 남다른 카리스마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로등 불이 팟 하며 켜졌다. 온화한 오렌지색 불빛이 둘을 감쌌다.


‘맹인?’


에리카가 고개를 끄떡였다. 신우의 검은색 안경과 긴 지팡이를 보고 맹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다리를 지나가도록 비켜줬다.


그런데 신우가 지나가지 않고 걸음을 딱 멈췄다. 에리카 다섯 보 앞에서 걸음을 딱 멈추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자! 지나가세요!”


에리카가 신우에게 공손히 말했다. 일본말이었다. 그것도 아주 유창했다.


‘아! 한국 사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이구나. 아까 한국말은 뭐지?’


신우가 잠시 주춤했다. 앞에 있는 여인은 아주 고급 옷을 입고 있었다. 귀족의 자제 같았다. 이에 일본 사람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일본 사람이라면 ….’


신우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는 일본인한테 강한 반발심이 있었다. 이에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었다. 일본 사람이 한국 시를 너무나도 잘 읊조렸다. 이게 궁금했다.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이에 신우가 용기를 냈다. 한 발짝씩 더 앞으로 나아갔다.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혹적인 향기가 짙게 풍겨왔다. 이때까지 느낄 수 없었던 이국적인 향기였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신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정신 차렸다. 궁금함을 풀고 싶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일본말로 물어봤다.


“저! 혹시, 일본 사람이세요?”


“네! 맞아요. 전 일본 사람입니다.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에리카가 상냥하게 답했다. 하지만 뜻밖의 질문을 하는 낯선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낀 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에리카가 뒤로 물러서자 신우가 약간 무안한지 고개를 돌려 연못의 수초를 보면서 말했다.


“전 한국 사람인데 … 아가씨가 한국말로 읊조리는 시가 너무나도 듣기 좋아서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 제 목소리를 들으셨구나. 제가 예의 없이 너무 크게 말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에리카가 능숙한 한국말로 사과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닙니다. 목소리가 너무 좋으시고, 시도 아름다워서 오히려 잘 들었습니다. 아가씨 시를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제 어머니도 아가씨처럼 목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신우도 한국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에리카는 빙그레 웃었다. 목소리와 시가 좋다는 칭찬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그런데 … 일본 사람인데 어찌 그리 한국말을 잘하세요? 전 한국 사람이 시를 낭독하는 줄 알았습니다.”


신우의 말에 에리카가 쑥스러운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 친한 동생이 한국 사람이에요. 걔한테 한국말을 배웠어요. 한국시 짓는 방법도 배웠고요.

일본시도 좋지만, 한국시도 좋아해서 간혹가다 한국시를 짓곤 해요. 아까 한국 사람이라고 하셨죠.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고향을 묻던데 어디에서 오셨어요?”


에리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활짝 웃자, 하얀 이가 아름답게 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에리카의 상큼한 미소에 신우의 두 눈이 커졌다.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매혹적인 자태에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다리를 따라서 강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코끝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여인의 향기가 그윽하게 퍼지며 신우를 감쌌다.


“…….”


신우가 향기에 취한 나머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이에 에리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일이 있나?’


그녀가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아무런 말이 없는 남자가 궁금한지 신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강한 턱과 넓은 어깨, 굵은 저음의 목소리, 당당한 자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멋있는 남자가 맹인이라는 사실이 측은한 듯 입을 살포시 다물었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신우는 안절부절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갑자기 새하얘졌다. 입술은 누가 아교를 몰래 발랐는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서로 무안한지 딴 곳만 바라다봤다.


그때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다나카의 부관인 사토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사토는 다나카의 부관이자, 에리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일을 맡았다. 에리카가 혼자 밖으로 나가자, 불안감을 느꼈고 게다가 곧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찾기로 했다.


“요시코, 아가씨는 어디로 가셨지?”


“아가씨는 근처 공원에 있을 거예요. 연못 다리 위에서 잉어를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낭송하실 거예요.”


연못 다리는 에리카와 요시코가 자주 놀러 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마음껏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낭송하며 쌓였던 응어리를 풀곤 했다.


이 말을 들은 사토가 고개를 끄떡이고 부리나케 공원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연못 공원을 발견하고 급히 에리카를 찾았다.


다행히 저 멀리에 에리카가 보였다. 이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녀 곁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려니 했지만, 에리카 옆에 딱 붙어서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사토의 눈이 뒤집혀 졌다. 전속력으로 에리카를 향해 달려갔다.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에리카에게 해를 끼칠 것만 같았다. 만일을 대비해 여차하면 긴 칼을 뽑을 심산으로 칼자루를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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