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복수와 복수의 화신
“저, 그게 좀. … 하하하!”
신우가 어렵사리 입술을 뗐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런 신우의 모습에 에리카도 재미가 있는지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씀하세요. 푸흣!”
에리카가 한 손으로 입을 감싸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때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그림자가 다리 위에 드리워졌다.
사토가 다리 위로 올라왔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양, 두 눈이 놀란 개구리처럼 커졌다.
신우와 에리카가 서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대체 이, 이 무슨!”
사토의 눈빛이 번뜩였다. 칼 손잡이를 꽉 잡았다. 칼을 뽑기 시작했다.
스르륵! 소리가 들리며 날카로운 칼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칼날이 가로등 불빛을 받자, 날카롭게 빛났다.
‘아! 그렇지.’
사토가 고개를 흔들었다. 칼을 뽑으면 에리카가 놀랄 거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흔들고 반쯤 뽑았던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가 성난 표정으로 신우에게 걸어갔다.
그가 크게 외쳤다.
“넌 뭐 하는 놈이냐! 감히 무례하게 아가씨를 희롱하다니.”
사토가 불같이 화를 냈다.
갑자기 크게 들리는 소리에 신우와 에리카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 사토가 신우를 향해 달려왔다. 열 손가락을 쫙 펼치며 신우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어?”
갑작스러운 사토의 출현에 신우가 당황했다. 하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았다. 우악스러운 손아귀를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이, 이놈이!”
두 손이 허공을 헤매자, 사토가 깜짝 놀랐다. 신우의 민첩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일갈했다.
“이놈! 정체를 밝혀라. 이분은 지체 높으신 분의 따님이시다. 너처럼 하찮은 것이 범접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사토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신우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렇게 재차 잡으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신우가 요리조리 피하며 사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만 하세요! 사토 중좌님!”
에리카가 크게 소리쳤다. 이건 예의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분은 …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우리는 그냥 우연히 만난 거뿐이에요. 시에 대해서 담소를 나눴을 뿐이에요.”
에리카가 사토의 앞을 막아섰다. 마치 신우를 보호하려는 거 같았다. 마치 그의 어머니처럼 ….
“아닙니다. 아가씨! 이놈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접근한 게 분명합니다. 아주 수상한 자입니다. 행색을 보세요. 남루한 게 비렁뱅이 이거나 건달입니다.”
사토가 에리카의 말을 애써 부정하며 신우에게 삿대질했다.
“이분이 무례한 게 아니라 사토 중좌님이 무례하군요.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이리 성을 내세요? 아저씨께 이 사실을 말하겠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에리카가 사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 그게 ….”
사토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에리카의 앙칼진 목소리와 성난 표정에 금방 주눅이 들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에리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토를 매섭게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무척 화가 난 듯했다.
무섭게 쏘아보는 에리카의 눈빛에 사토가 금방 꽁지를 내리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그냥 … 아가씨가 돌아오시지 않아서 찾으러 나온 것뿐입니다.”
“이분하고 할 얘기가 더 있으니 그만 돌아가세요!”
에리카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이에 사토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쩔쩔매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리카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하지만 곁눈질로 신우를 흘겨보며 이를 악물었다.
한동안 씩씩거리며 길을 걷다가 재빨리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매의 눈으로 둘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위세에 눌려 신우를 쫓아내지 못했지만,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였다.
사토의 손이 다시 칼자루를 꽉 쥐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 수양 아버지를 모시는 부관인데 저 때문에 그만 결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에리카가 사토를 대신해 사과했다. 봉변을 당한 신우를 위로하며 연달아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다 오해죠. 신경 쓰지 마세요.”
신우가 활짝 웃으며 에리카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데 … 어찌 그리 잘 피하세요?”
에리카가 궁금함을 참을 수 없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녀는 사토의 손아귀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던 신우의 몸놀림을 보고 ‘맹인이 저렇게 행동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그래서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아!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신우가 급하게 검은색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짙은 눈썹 아래에 날렵한 눈망울이 빛났다.
“아!”
신우의 눈망울을 본 에리카가 탄성을 지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손끝과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얼굴이 뻘게졌다. 속내를 들킬까 봐 눈을 깔고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어떤 때보다도 설렜다.
그녀가 입술에 침을 묻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맹인 행세를 왜 하신 거죠?”
신우가 무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빛나는 가로등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전 22여 년 동안 맹인이었습니다. 눈을 뜬 지가 석 달밖에 되지 않습니다.
맹인 행세를 일부러 한 게 아니라, 눈이 멀고 17년 동안 검은색 안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안경과 지팡이 없이 밖으로 나가면 마치 몸 일부를 두고 나온 거 같아서 아직도 쓰고 다닙니다.”
신우가 천천히 안경을 접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22년 만에 눈을 뜨시다니 … 정말 기적적인 일이네요. 축하드려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에리카가 신우의 사연을 듣고 마치 자기 일인 양 손뼉을 짝! 치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신우가 생각했다.
‘이 사람은 … 이 세상 사람 같지가 않아. 선녀탕에 내려온다는 선녀인가?’
신우가 고향 마을 전설을 떠올렸다. 구산 절벽 아래 선녀탕 전설이었다.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도 선녀가 있을 리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보는 거 같았다.
가슴이 쿵쾅! 거리며 마구 뛰기 시작했다.
신우는 선녀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녀와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피맺힌 복수를 하려고 이곳 경성에 온 사람이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에 비통한 심정에 빠져버렸다.
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귀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피맺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멀리해야 했다. 신우는 여인에 대한 사랑조차 부정해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가 아쉬움을 삼켰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에리카에게 넙죽 인사를 했다.
“그러면, …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우가 아쉬움이 가득한 한마디만을 남긴 채, 걸음을 옮겨 에리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
에리카는 당황했다. 갑자기 떠나는 그를 보고 당황했다. 이에 멍하니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신우를 바라다봤다.
곧 그가 다리를 건너 어둠 속으로 사라질 거 같았다.
신우는 등 뒤에서 에리카의 시선을 느꼈지만, 길게 숨을 내쉬며 애타는 감정을 삼켰다.
“아야!”
별안간 에리카의 비명이 들렸다. 신우가 놀라서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에리카가 신우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곧 연못으로 떨어질 거 같았다.
“이런! 안돼!!”
신우가 급하게 외치며 번개처럼 에리카에게 달려갔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에 재빠르게 손목을 잡고 확 낚아챘다.
에리카의 몸이 신우의 품에 꼭 안겼다. 그녀의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휘영청 밝은 달이 둘을 내려다봤다.
그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우아한 여인의 발에서 신발 한 짝이 쓱 벗겨지더니 아래로 “풍덩” 떨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리카가 놀란 눈빛으로 신우의 품에 꼭 안겼다. 신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녀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에리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다친 데 없죠?”
“…….”
에리카가 아무런 답도 못 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콩콩 뛰었다. 여태까지 느낄 수 없었던 이상하고 야릇한 감정이었다. 차고 넘치는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사토가 이 광경을 멀리서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에리카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녀에게 더 혼날 것 같아 분을 삭였다.
만약, 저놈이 에리카를 구해줬다는 핑계로 덮친다면 그때 단칼에 해치울 작정으로 칼자루를 더욱 꽉 잡았다.
신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하얀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에 서둘러 사방을 살폈다.
연못 위에 하얀 리본이 달린 검은 구두가 붕 떠 있었다.
“저 신발은?”
신우가 급하게 에리카의 발을 쳐다봤다. 신발 한 짝이 다른 짝을 잃어버렸다. 에리카가 부끄러운지 짝 잃은 오른발을 왼발 뒤로 숨겼다.
“아가씨 신발이 연못으로 떨어졌군요.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신우가 말을 마치고 난간을 꽉 붙잡더니 몸을 붕 띄워서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하며 물보라가 일었다.
이에 에리카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안돼요! 위험해요. 선생님!”
신우가 순식간에 물속으로 사라졌다.
에리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신우를 찾았다. 하지만 신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못은 수심이 꽤 깊었다. 그래서 입수금지였다.
“어서 나오세요, 제발!”
에리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연못은 꽤 깊었고 무척이나 혼탁했다. 날이 저물어서 그런지 물속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갔던 신우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저 멀리에 신발 한 짝이 보였다. 이에 그곳으로 재빠르게 헤엄쳐 신발을 붙잡고 뭍으로 올라왔다.
신우의 몸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에리카가 울먹이며 그를 향해 달려왔다. 신발이 벗겨진 오른발이 흙먼지에 더러워졌다.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되는데. 양말이······.”
신우가 에리카의 한쪽 양말이 더러워진 것을 보고 안타까움에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에리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여 있는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신우가 신발의 물을 털고 에리카 앞에 공손하게 내려놓았다. 이에 그녀가 부드러운 몸짓으로 신발을 신었다. 신발이 주인을 찾았다.
“이런! 수초가 묻었어요.”
에리카가 두 손을 들었다. 신우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지 머리와 몸에 붙어 있는 수초와 연꽃을 섬세한 손길로 떼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부드러운 손길이 몸에 닿자 신우가 움찔했다. 짜릿함을 느꼈다. 심장이 쾅쾅거리며 고속 열차처럼 달렸다.
그는 두려웠다. 그녀에게 점점 빠지는 자신이 두려웠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신우가 급하게 말을 마치고 에리카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때 뭔가가 느껴졌다. 소매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에리카가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연약한 손길이었지만, 신우는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오늘, 저를 구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에리카가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자기를 외면하는 신우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제가 은혜를 보답하고 싶은데 … 혹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세요?”
“그, 그게 ….”
신우가 난처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에리카가 신우의 소매를 꼭 붙잡고 오도 가도 못 하게 만들었다.
신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를 뿌리쳐야 했다. 그는 복수하기 위해 22년 참아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고 기다릴 수도 없었다. 그가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개의치 마세요. 사례를 받기 위해 한 일이 아닙니다.”
신우가 굳게 마음을 다잡고 에리카의 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에리카의 얼굴을 간절히 보고 싶었다. 이번에 헤어지면 영영 못 볼 것 같았다.
에리카의 얼굴을 보면 그녀의 청을 수락할 거 같았다. 이게 고개를 돌리는 대신 연못을 내려다봤다.
연못 수면에 에리카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하얀 얼굴이 가로등 불의 따뜻한 빛을 받아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