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9편_검은 판사, 악의 분노
“그런 … 의혹이 있습니다.”
유강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나은성 비서가 다시 발끈했다.
“그럼, 증거를 대세요! 제가 정보를 넘겼다는 … 제가 스파이라는 증거를 대세요, 탐정답게! 공허한 말만 하지 말고!”
유강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아직 없습니다.”
“뭐, 뭐라고요? 그럼, 단지 심증만으로 저를 범인으로 모는 겁니까?”
“저는 나은성씨를 범인으로 몰지 않았습니다.”
“지금 저를 범인으로 몰고 있잖아요! 스파이라고 몰아세우고 있잖아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겁니까?”
유강인이 무척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단지 나비서님께 질문한 거뿐입니다. 가능성을 확인한 거 불과합니다.
나비서님은 참고인이지 혐의를 받는 피의자가 아닙니다. 그만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세요. 질문이 무례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단지 물어본 거다?”
“그렇죠.”
“참 어이가 없군요. 유강인 탐정님이 이런 분이셨군요. 생사람을 잡는 …. 명탐정이라는 말이 무색하군요.”
나은성 비서가 말을 마치고 다시 앉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어떡할까요? 제 핸드폰을 경찰에 제출할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요? … 그럼, 다행이군요.”
나은성 비서가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찬우 형사가 급히 생각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
정형사가 급히 움직였다. 유강인에게 귓속말했다.
“선배님, 핸드폰을 포렌식으로 조사해야 합니다.”
유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핸드폰을 뒤져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아, 그렇군요.”
정형사가 유강인의 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송상하, 최인식, 주미희를 연달아 죽인 연쇄살인범들은 치밀한 자들이었다. 본인 소유 핸드폰으로 통화하거나 문자를 보낼 리 없었다.
“휴우~!”
나비서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고 평정심을 되찾았다. 얼굴에서 긴장감이 차츰 사라지고 여유가 흐르기 시작했다.
유강인이 나은성 비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나비서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렇게 탐정의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진실을 요구하는 자와 결백하다는 자의 대치가 계속됐다.
“음.”
나은성 비서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반짝이는 신상 핸드폰이었다.
그녀가 액정 화면을 내려다봤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화장과 옷매무새를 살폈다. 흐트러짐이 없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나은성 비서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가 윗입술에 침을 묻히더니 테이블 위에다 핸드폰을 내려놨다.
마치 핸드폰을 가져가라고 하는 거 같았다. 자신은 결백하다며 ….
유강인이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쉬운 상대가 아니군. 그렇겠지, 아버지 원수를 갚으려고 목숨을 걸었을 테니 ….’
유강인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부회장님이 실종된 뒤에는 어디에 계셨죠?”
“영포 해수욕장 호텔에 쭉 있었습니다. 부회장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호텔에 머물 때 밖으로 나간 적이 있나요?”
“아니요. 숙소에 계속 있었습니다. 호텔 CCTV를 확인해 보세요. CCTV가 제 말을 증명해 줄 겁니다.”
“부회장은 12월 5일 실종됐습니다. 그 시신을 8일 새벽에 인양했습니다. 언제 체크아웃하셨죠?”
“오전 11시에 체크아웃했습니다. 동료와 함께 서울로 가서 회사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귀가했습니다.”
“동료는 누구죠?”
“비서실에 근무하는 선배 여직원입니다. 부회장님 실종 소식이 듣고 나진시로 급히 내려왔습니다. 저랑 같은 방에서 묵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비서님 자택은 어디죠?”
“서울입니다. 주소까지 가르쳐 드릴까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오늘은 10일입니다. 나비서님은 8일 귀가했습니다. 다음 날 9일에 무슨 일을 하셨죠? 회사에 출근했나요?”
“아니요. 8일 회사에 병가내고 지금까지 쉬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부회장님이 돌아가셔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병가를 내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만 조사를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은성 비서님.”
“조사가 다 끝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돌아가세요.”
“알겠습니다. 유강인 탐정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뭐든지 말해보세요.”
“부탁이니 제발 억측하지 마세요. 유명하고 대단하신 탐정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생사람 잡는 일은 없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기대에 어긋나는 일은 없겠죠?”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나은성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에 내려놓은 핸드폰을 들더니 급한 걸음으로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이힐 소리가 조사실에 울렸다.
정찬우 형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먼저 출입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고 말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은성 비서님.”
“감사합니다. 친절하신 형사님이군요. 누구와는 달리 ….”
나비서가 감사함을 표하고 조사실을 떠났다. 하이힐 소리와 함께 검은색 코트가 흔들거렸다.
나은성 비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형사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사실 참고인이 아니었다. 피의자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부회장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가 유강인에게 말했다.
“나비서님이 놈들과 한패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 다행이지.”
유강인이 답을 하고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뜻이었다.
다음 조사 대상자는 연순호였다.
연순호는 나은성 비서보다 훨씬 비참한 상황이었다. 부인과 아들, 장인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출산 중 아들과 함께 죽었고 장인은 이에 항의하다가 차에 치여 죽고 말았다. 한마디로 한 집안에 엄청난 불행이 닥쳤다.
연순호는 그 불행의 한 가운데 있었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불행이었다.
그 불행은 커다란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자경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
현재 시각이 오후 3시를 가리켰다.
탐정단은 경찰청 휴게실에 있었다. 셋이 초콜릿 과자를 나눠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황정수가 말했다.
“탐정님, 이제 조사실로 가야 해요.”
유강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고 있던 초콜릿 과자를 입에 쑥 넣고 산 이슬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렇게 에너지와 수분을 보충하고 휴게실에서 나갔다. 그 뒤를 조수 둘이 따랐다.
참고인 연순호는 5분 전에 경찰청에 도착했다. 우동식 형사한테 안내 사항을 전달받았다.
조사실로 향하던 유강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 참고인은 너무나도 불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거를 수는 없었다.
그는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였다.
*
조사실 문이 열렸다. 유강인이 조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찬우 형사와 연순호였다. 둘이 서로를 마주 봤다.
연순호는 30대 후반 남자였다. 딱 봐도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각진 얼굴에서 고집스러움이 엿보였다.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유강인이 정형사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정찬우 형사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연순호씨입니다. 고 손미영씨 남편입니다.”
유강인이 공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탐정 유강인입니다. 지금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 중입니다. 연순호씨, 경찰을 통해 자초지종을 다 들으셨죠?”
연순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다 성질이 난 듯 왼쪽 입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냈다. 맹수의 송곳니 같았다. 그가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잘 들었소. 왜 나를 불렀소? … 유강인 탐정, 나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거요?”
껄렁껄렁한 목소리였다. 공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친 상대였지만, 유강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정형사한테 연순호의 전과를 보고 받았다. 연순호는 폭행 전과자로 실형을 살았다.
유강인이 대답 대신 앞에 있는 물 잔을 들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입을 열었다.
“저는 연순호씨를 참고인 신분으로 불렀습니다. 참고인은 범인이 아닙니다. 혐의를 받는 피의자도 아닙니다.”
“흥! 내가 모를 줄 알고 … 그러다가 피의자로 싹 전환할 거잖아. 여기에서 체포도 할 작정인 거지?”
“체포라니요?”
“유강인, 나를 우습게 보지 마. 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어. 감옥에도 갔다 왔어. 알 건 다 아는 사람이라고!”
“그렇군요. 전과자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나는 … 전과자지만, 그건 실수였고 술김에 깡패 놈들을 두들겨 팬 거뿐이야. 그건 사실 정의사회 구현이었어.
그놈의 돈 때문에 합의를 못 해 감옥에 간 거야. 그래서 난 떳떳해.”
“그렇군요. 억울한 일을 당하셨군요.”
“그리고 나는 원수를 갚지 않았어. 나는 최인식이라는 그 찢어 죽일 놈을 죽이지 않았어.”
“확실합니까?”
“물론이야, 나는 알리바이가 있어. 최인식 그자가 12월 7일 밤에 죽었다고 들었어.
나는 그날 인천에서 일하고 있었어. 집을 짓고 있었지. 내 동료들이 옆에 있었어.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걸 다 증명할 수 있어.”
“언제부터 인천에 계셨죠?”
“6일 오후부터 인천에서 일했어.”
“그렇군요. 그 이후에 어디에 계셨죠?”
연순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유강인이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를 위해 필요합니다.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연순호가 말을 이었다.
“8일 아침 서울로 왔어. 서울에서 쉬다가 지인의 전화를 받고 여기로 온 거야.
나를 계속 찾았다고 들었어. 일할 때 핸드폰을 꺼놔서 연락이 끊겼던 거야, 내가 일부러 전화를 안 받은 게 아니라고!”
“묻지 않은 것도 잘 얘기하시네요.”
“뭐, 뭐라고?”
연순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강인의 말에 허가 찔린 듯했다.
조사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강인이 고개를 돌려 정찬우 형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정형사가 유강인에게 귓속말했다.
“인천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에게 확인한 결과, 연순호씨의 말은 거짓이 아닌 사실입니다.
최인식 교수가 납치돼서 사망했을 시각에 인천에서 계속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늦게까지 작업했답니다. 연순호씨는 알리바이가 확실합니다.”
“그렇군.”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연순호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 같았다.
“난 지금 하늘이 무너졌어! 처와 자식이 죽었고 장인마저 죽었어. 그런데 나를 범인으로 몰아?
유강인, 너는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내가 만만해 보여? 나는 장인이 차에 치여서 죽은 줄도 모르고 일만 했어. 그래서 장인 삼일 장도 참석하지 못했어.
위로는 못 해 줄망정 나를 감히 범인으로 몰아? 네가 유명한 탐정이라고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거야? 시건방진 놈!”
거친 말이 기관총처럼 쏟아졌다.
유강인이 묵묵히 연순호의 말을 들었다. 화가 충분히 분이 끓어 오를만한 상황이었다. 연순호가 몹시 흥분한 상태에서 무척 억울하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만약 범인이라면 일부러 오버하는 거였다. 탐정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하려고 ….
유강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자는 폭력 전과자야. 전과자답게 말이 아주 거칠고 다혈질이야. 최인식을 죽이지 않았다고 억울해하고 있어.
일단 알리바이는 확실해. 사건 당일 인천에서 집을 짓고 있었으니 강원도 나진시로 올 수 없었어. 인천과 나진시는 상당한 거리야.
나은성 비서도 알리바이가 확실했어. 그녀도 원수인 송상하 부회장을 죽일 수 없었어.’
유강인이 자세를 고쳐잡고 생각을 이었다.
‘연순호도 마찬가지야. 연순호도 최인식을 죽일 수 없어. 둘 다 용의자인데 알리바이가 확실해. 아주 기가 막히게, 그렇다면 …….’
유강인이 두 눈을 위로 치켜떴다. 뭔가를 생각하는 거 같았다.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 네 글자가 떠올랐다.
그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뭔가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유레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