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어두워지자,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이 되자, 낮이 점점 짧아지면서 새파란 얼굴의 동장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강인이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서울청 강력범죄수사대는 분주했다. 형사들이 여기저기서 뛰어다녔다. 전화벨도 계속 울렸다.
조사를 진행할수록 그 대상자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JS 그룹 경호팀뿐만 아니라 그룹 핵심 관계자들도 소환 조사해야 했다.
유강인이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백정현 형사의 연락을 기다렸다.
옆에 황정수와 황수지가 있었다. 유강인이 초조한 표정을 짓자, 둘이 고개를 끄떡였다.
누구라 할 거 없이 가방을 열더니 초콜릿 과자와 실론 티를 꺼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탐정님, 초콜릿 과자 드세요.”
“실론티도 있어요.”
“고마워.”
유강인이 방긋 웃고 초콜릿 과자와 실론티를 받았다. 역시 탐정 마음은 최측근인 조수들이 잘 알았다.
봉지를 북 뜯는 소리가 들렸다. 유강인이 입맛을 다셨다. 봉지를 열고 과자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었다.
와그작와그작! 씹는 소리가 들렸다. 과자 부서지는 소리에 타악기 같은 리듬감이 있었다.
탁! 하며 캔 뚜껑을 따는 소리도 들렸다. 이건 경쾌한 소리였다. 꿀꺽꿀꺽 음료를 마시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초콜릿과 실론티가 잘 어울렸다. 유강인이 씩 웃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자,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간식 시간을 즐기고 있을 때
삐리릭!
유강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기다리던 백정현 형사의 전화였다. 이에 서둘러 전화 받았다.
“백형사님.”
“네, 유탐정님,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됐죠?”
“천일수씨와 송해상 회장님은 여러 번 통화하고 서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시기가 딱 들어맞습니다. 회장님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오. 그래요.”
“천일수씨 핸드폰에서 11월 2일 문자를 확인한 결과, 회장님께 보낸 문자가 있었습니다. 물건을 잘 확인했냐고 물어봤습니다.”
“회장님이 뭐라고 답변했죠?”
“정말 고맙다고 했습니다.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감사를 표하고 싶다며 내일 저녁 명일 호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습니다.”
“조사라고요? 분명히 그렇게 답했나요?”
“네, 분명히 그렇게 답했습니다.”
유강인이 급히 생각했다.
‘천일수씨가 회장님한테 정보를 넘긴 날은 11월 2일이 분명해. 정보를 확인한 회장님이 천일수씨와 윤동규씨랑 약속을 잡았어.
다음날인 11월 3일 회장님은 먼저 윤동규씨를 골프 연습장에서 만나서 유전자 검사를 부탁했고 이후 명일 호텔에서 천일수씨랑 같이 식사했어.
이게 정확한 타임라인이야.’
유강인이 말했다.
“백형사님, 정황상 천일수씨가 회장님께 정보를 넘긴 게 분명해 보입니다.”
백정현 형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유탐정님. 천일수씨 죽음에 JS 그룹 경호팀이 관련됐잖아요. 경호팀은 부회장의 친위대고요.
회장의 동태를 파악한 부회장이 친위대를 시켜서 천일수씨를 죽인 게 아닐까요?”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합당한 추리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천일수씨가 회장님한테 정보를 넘기자, 그 사실을 알아챈 부회장이 천일수씨를 죽인 거 같습니다.
일종의 괘씸죄죠. 자기 위치를 위태롭게 하자, 용서할 수 없었던 거 같습니다.
비밀을 폭로하는 건 항상 위험한 일입니다.”
“유탐정님, 부회장은 정말 무서운 사람 같습니다.
정보를 넘긴 천일수씨를 죽여버린 것도 모자라 그 아들한테 죄를 몽땅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천지호씨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체포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자는 천지호씨가 아니라 부회장이었습니다.
위중한 아버지를 그런 창고에 가두다니, 이건 빨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맞습니다. 부회장은 악에 받친 사람입니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아버지한테 맺힌 게 많은 거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같습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한테 서운한 감정을 갖기는 하지만, 이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인데 ….”
“뭐 사정이 있기는 있겠죠. 물론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
“조사 결과, 부회장은 장남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황태자 대접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입지가 항상 탄탄했다는데 … 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했을까요?”
“부자라서 해서 … 입지가 탄탄하다고 해서, 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
“그렇군요. 씁쓸한 현실이네요. … 아! 또 하나 알아낸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천일수씨 통화 기록을 쭉 살폈는데, 회장님과 연락하기 전 한 사람과 여러 번 통화 했습니다.”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나요?”
“이름이 백두성이었습니다.”
“백두성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 이름은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 혹 그분은 아니겠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마 했죠.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 전화번호를 확인한 결과, 우리가 아는 그분이 맞았습니다.”
유강인이 깜짝 놀랐다. 그가 급히 말했다.
“영화배우 백두성씨가 맞는다는 말인가요?”
“네, 영화배우이자 사업가인 백두성씨가 맞았습니다.”
유강인의 두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백두성은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배우이자, 사업가로서 한국을 빛낸 사람이었다. 세계적 인사이기도 했다.
유강인이 두 눈을 오른쪽으로 치켜뜨고 잠시 생각했다.
백두성은 아주 고령이었다. 얼마 전 TV에서 봤을 때 백발을 휘날렸다. 나이로 볼 때 송해성 회장과 천일수의 형뻘이었다.
백정현 형사가 말을 이었다.
“유탐정님, 어떡할까요? 백두성씨도 조사할까요? 천일수씨와 백두성씨가 통화한 시기가 묘합니다. 회장님이 아들을 찾기 바로 전입니다.”
유강인이 바로 답했다.
“백두성씨는 유명 영화배우고 천일수씨는 유명 영화감독입니다. 둘 사이에 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커넥션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백두성씨도 회장님 아들을 대해 뭔가를 알 수 있어요.
백두성씨를 조사하세요. 정중히 협조를 요청하세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유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커넥션이었다.
영화감독 천일수 살인 사건에서 시작해서 재벌 혼외자 박재영 실종 사건으로 이어지더니 부회장이 실세인 JS 그룹까지 다다랐다. 그러다 오늘 영화배우 백두성까지 연결됐다.
유강인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영화배우와 영화감독이라 … 둘 다 비슷한 연배니 활동했던 시기도 비슷할 거야.”
유강인과 백형사의 통화를 유심히 듣던 황수지가 무척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형사가 뭐라고 하는데요?”
유강인이 씽긋 웃고 말했다.
“잘 들어요. 조수님들.”
유강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조수 둘이 심상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정수가 말했다.
“정황상, 회장님한테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는 걸 천일수씨와 백두성씨가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천일수씨가 회장님한테 비밀을 알리자, 그 사실을 알아챈 부회장이 천일수씨를 죽이고 회장님을 감금한 거 같아요.”
“그렇다고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황수지가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황정수가 바로 반박했다.
“수지야. 부회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위독한 아버지를 창고에 가두고 방치했어. 이는 거기에서 죽은 라는 소리와 같은 거야.
그뿐만이 아니라 이복형제지만, 동생을 납치해서 고문하고 죽이려 했어.
그런 사람이 천일수씨를 가만 놔뒀을 거 같아? 그 사람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는데! 자칫하면 후계 구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회사 지분도 동생한테 줘야 해.”
황수지가 아! 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가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네요. 부회장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아버지, 동생 그리고 천일수씨까지 모두 죽일 수 있겠네요.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그렇지. 항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해. 그게 탐정님 지론이잖아.”
유강인이 조수들의 대화를 듣다가 잠시 생각했다.
‘혹 백두성씨도 관련됐다면 큰일을 당할 수 있는데 … 정황상 백두성씨도 비밀을 아는 거 같아.
아직 백두성씨가 괜찮은 걸 보니 놈들의 타깃이 아닌 거 같아.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어. 부회장이 모든 사실을 알면 백두성씨도 죽이려고 할 거야. 빨리 움직여야 해.
비밀을 아는 자들을 모두 죽이려 하고 있어.’
유강인이 조급함을 느꼈을 때
사무실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정찬우 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강인 앞으로 가서 입을 뗐다.
“선배님, 부회장 조사 일정이 잡혔습니다.”
유강인이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내일 몇 시지?”
“내일 오전 11시입니다.”
“좋았어. 그때 부회장을 철저히 조사해야겠군.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
삐리릭!
유강인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백정현 형사의 전화였다. 백형사가 말했다.
“백두성씨 비서와 통화했습니다. 내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에서 자서전 출간 기념회가 있답니다. 그곳에서 백두성씨가 탐정님을 만나고 싶답니다.”
“아, 내일 자서전 출간 기념회가 있군요. 알겠습니다. 간다고 전하세요. 오전에 부회장을 조사하고 오후에는 출간 기념회에 가면 되겠네요.”
“내일 부회장 조사 일정이 잡혔나요.”
“네, 잡혔습니다.”
“저도 조사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물론 참여하셔야죠. 천일수씨 살인 사건 담당 형사인데.”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강인 전화를 끊었다. 두 손바닥을 쓱쓱 비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았어. 내일 두 명을 차례대로 만나야겠군. 일이 잘 풀리고 있어.”
그렇게 유강인이 수사에 열정을 불태우고 있을 때
사건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인 백두성이 술잔을 들이켰다. 고가의 위스키병만이 그의 곁에 있었다.
백두성이 자택 거실에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러다 작은 술잔이 성이 차지 않는 듯 술잔을 탁! 내려놨다. 위스키병을 들더니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두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그가 울먹이며 말했다.
“일수가 죽다니 ….”
백두성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오랜 친구인 천일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담했다.
그동안 자서전을 준비하느라 바빴고 그래서 천일수한테 연락하지 못했다.
오늘 경찰의 연락을 받은 비서가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천일수가 죽었다고 … 그것도 살인 사건이었다.
“흑!”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굵은 눈물이 깊게 파인 주름살에 모였다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꺼번에 떨어졌다.
툭! 하며 커다란 눈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백두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 놈들이 움직이는 건가? 그런 건가? … 일수를 죽였으니 다음에는 내 차례인가?
놈들이 벌써 알아챈 건가? 이것들이 회장실을 도청했나? 역시 무서운 놈들이야. 내가 방심했어.”
백두성이 허가 찔린 듯 입을 크게 벌렸다.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두운 정원을 바라봤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강한 어조였다.
“어차피 상관없다. 난 이제 살고 싶지 않다. 살 만큼 살았다. 아플 만큼 아팠다. 더는 숨길 게 없다!
이제 악연을 끊고 싶다.”
백두성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끄떡이고 다시 중얼거렸다.
“유강인! 그래, 내일 유강인을 꼭 만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