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유강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송해성 회장은 절박한 심정이 분명했다. 비밀리에 유전자 검사를 할 정도로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윤동규가 말했다.
“회장님 전화를 받고 다음 날 은밀히 만났습니다. 약속 장소는 골프 실내 연습장이었습니다.
그날 회장님은 병원 검진이 있었고 검진이 끝난 후 지인이 운영하는 골프 연습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연습장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몄습니다. 같이 차를 마시며 상세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회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친구가 정보를 줬다고 … 그래서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는 걸 50년 만에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유강인이 급히 생각했다.
‘친구라? 이 말은 친구라는 사람이 정보를 줬다는 말인데 … 그 사람은 당사자도 모르는 대단한 정보를 알고 있었어. 회장한테 혼외자식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유강인이 서둘러 말했다.
“그 친구가 누구죠? 혹 아시나요?”
윤동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그 친구분이 누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모릅니다.”
“친구분이 박재영씨를 분명히 언급했나요?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지목했나요?”
“네, 맞습니다. 저도 관련 자료를 봤습니다. 보육원 자료였습니다. 잃어버린 아들 이름이 … 박재영이었습니다.”
“그렇군요. 회장님이 그 정보를 언제 입수했는지 아시나요?”
“아마도 … 제 기억에 40일 전 같습니다. 정보를 받고 바로 저한테 연락하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윤동규가 말을 마치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송해성 회장이 전화한 날짜를 찾았다. 그가 고개를 끄떡이고 말을 이었다.
“올해 10월 초입니다. 10월 3일입니다.”
“오늘이 11월 15일이니, 한 달하고 열흘이 좀 지났군요.”
“그렇네요.”
유강인이 잘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송해성 회장에게 정보를 넘긴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자가 송회장한테 정보를 넘긴 이후 세 가지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모두 중차대한 범죄들이었다.
이는 우연한 일치로 볼 수 없었다.
먼저 천일수가 살해되었고 납치된 박재영은 고문을 당한 후 죽을 뻔했다. 의식을 잃은 송해성 회장은 창고에 갇혔다.
윤동규 조사가 끝났다.
유강인이 윤동규에게 허리 굽혀 감사함을 표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사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거뿐입니다. 수십 년 전, 회장님께서 아버지를 도와주셨고 그래서 아버지가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이제야 갚은 거뿐입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유강인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있는 윤동규는 은혜를 알고 약속을 지키는 건실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독하고 악랄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윤동규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할 일을 다 한 윤동규가 걸음을 옮겼다.
*
강력범죄수사대 휴게실로 유강인이 들어갔다. 안에 옛 동료들이 있었다.
이호식 팀장과 우동식 형사가 두 팔 벌려 유강인을 환영했다. 다른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우리 유강인 탐정님 어서 오세요. 열렬히 환영합니다.”
“맞습니다. 유강인 탐정님 잘 오셨습니다. 웰컴 홈! (Welcome Home!)”
뒤이어 조수 둘과 백정현 형사도 안으로 들어왔다.
정찬우 형사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사무실에 남았다.
윤동규 증언을 정리하고 유전자 연구소에 문의해서 검사 결과가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십여 명의 형사들이 유강인을 에워싸고 손뼉을 치자, 황정수가 실실 웃었다.
마치 자기가 환대받는 듯 우쭐해진 거 같았다. 내가 바로 유강인 탐정의 선임 조수라는 듯 어깨를 탁 펴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반면 황수지는 황송한 듯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했다. 황수지는 형사 출신이었다. 그녀 앞에 있는 형사들은 대부분 선배였다.
유강인 팬클럽 회장을 자처하는 우동식 형사가 유강인에게 종이컵을 권했다. 그가 말했다.
“우리 유탐정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자판기 커피를 대령했습니다. 자 한 잔 쭉 드세요. 달콤한 게 끝내줍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여기 자판기 커피가 몹시 그리웠는데 역시 선배님은 내 맘을 잘 압니다.”
유강인이 활짝 웃으며 종이컵을 받았다. 그가 커피 향을 맡고 말을 이었다.
“역시 우리 강력범죄수사대 자판기 커피가 최고입니다. 다른 커피는 이에 못 미칩니다.
아무리 비싼 커피를 마셔도 이 향과 이 맛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매일 마셨던 커피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호식 팀장이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
“맞는 말이야. 누구든지 힘들고 어려울 때 먹었던 음식을 잊지 못하기 마련이야.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어. 6.25때 드셨던 개떡을 잊지 못하셨어.
가족과 같이 피난 길에 올랐을 때, 먹을 게 없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누가 버린 개떡을 먹고 힘을 냈다고 하셨어.
상해서 버린 떡이었지만, 그걸 먹고 힘을 내서 서울에서 천안까지 내려가셨다고 하셨어.”
“아, 그렇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가끔가다 개떡을 사다 드셨어. 옛날 맛이 나지는 않지만,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셨어.”
“좋은 말씀입니다. 음식 맛 중에서 최고의 맛은 … 역시 추억의 맛이죠.”
유강인이 말을 마치고 자판기 커피를 쭉 들이켰다.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커피 함량이 거의 없는 설탕물에 가까웠지만, 유강인한테 이만큼 힘을 주는 커피는 없었다.
우동식 형사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난 아무리 마셔도 별론데. 그래서 경찰청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테이크아웃해서 마셔, 흐흐흐!”
유강인이 슬쩍 웃고 답했다.
“선배님 입맛이 고급지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겠죠. 귀공자 타입이죠.”
“그런가? 하긴 내가 아주 고급진 사람이긴 하지. 앞으로 나를 귀공자 우형사라고 불러.”
우형사의 말에 동료들이 크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귀공자 우동식 형사님.”
“좋은 호칭이네요. 형사 중에서도 귀공자가 한 명쯤은 있어야죠.”
유강인이 커피를 다 마시고 초짜 형사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참 힘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처음으로 맡은 사건인 행운 빌라 사건이 참 인상 깊었다. 그때 선배였던 이호식 형사가 말했었다.
일주일 안에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 못하면 손목아지를 콱! 한다며 그에게 겁을 주었다.
유강인이 그때를 회상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모처럼 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두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깐! 김비서님이 죽은 천일수씨를 아는 거 같았는데 ….”
유강인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백정현 형사를 찾았다. 그가 말했다.
“백형사님, 김비서님한테 지금 전화하세요. 확인할 게 있습니다.”
“JS 그룹 김돈국 비서님한테 전화하라는 말이죠?”
“맞습니다. 부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백형사가 김돈국 비서한테 전화 걸었다. 김비서가 전화 받자, 핸드폰을 유강인에게 넘겼다. 유강인이 급히 말했다.
“김비서님, 유강인입니다.”
“아이고! 유강인 탐정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큰 잘못을 했습니다. 회장님이 요양 병원 창고에 계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유탐정님께 큰 실례 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을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했습니다.
부회장님이 그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한테 보였던 모습은 다 가식이었습니다. 저도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저보고 회사에 남아서 책임지고 일을 수습하라고 한 것도 제가 JS 병원으로 가는 걸 막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정말 생각할수록 가증스럽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제라도 아셔서 ….”
“그런데 어떤 일로 전화하셨죠? 저는 불법적이거나 불의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믿어주세요, 정말입니다.”
“김비서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안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저를 믿어주셔서.”
“대신 확인할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영화감독이었던 천일수씨와 회장님 사이를 알고 싶습니다.”
“아! 천일수씨요. 그분이 죽었다고 하셨죠?”
“네, 나흘 전인 11월 1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아이고, 그분이 그렇게 죽다니 … 회장님 친구분이었는데.”
“회장님 친구였다고요?”
“네, 회장님과 친한 사이였어요. 오랜 기간 자주 만나셨는데 몇 년 전부터 왕래가 끊어졌습니다. 그러다 근래에 다시 만나셨습니다.”
“근래라고요? 천일수씨가 회장님을 언제 만났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회장님 스케줄을 확인할게요.”
잠시 시간이 흘렀다.
유강인이 침을 꿀컥 삼켰다. 얼굴에서 긴장감이 흘렀다.
별개로 보였던 두 사건이 연결될 수 있었다.
윤동규 말에 따르면 송해성 회장에게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고 알린 사람은 친구였다.
송회장의 친구 중에 50년간 감춰진 비밀을 아는 자가 있었다. 그 친구가 누구인지 밝혀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송해성 회장의 친구 중 한 명이 사흘 전에 죽고 말았다. 그것도 살인 사건이었다. 그 사람은 영화감독 천일수였다.
천일수의 죽음은 JS 그룹 경호팀과 관련이 있었다.
정황상 송회장에게 혼외자식이 있다고 알린 사람은 천일수 같았다. 그래서 그 대가로 살해당한 거 같았다.
살인범은 천일수를 죽여놓고 아들인 천지호가 죽였다고 뒤집어씌웠다. 송상하 부회장은 병약한 아버지, 송해성 회장을 창고에 방치했다. 마치 빨리 죽기를 바라는 거 같았다.
두 사건에서 묘하게 공통점이 있었다. 마치 한 사람이 짠 계획 같았다.
악마가 짜 놓은 퍼즐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다.
“아! 여기에 있네요.”
김돈국 비서가 말을 이었다.
“올해 10월 3일 회장님이 천일수씨를 만났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시고 담소를 나눴습니다.”
“10월 3일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식사 장소는 명일 호텔입니다.”
“알겠습니다.”
유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급히 백정현 형사에게 말했다.
“지금 천일수씨 통화 기록을 살펴야 합니다. 송해성 회장과 통화했는지 알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경찰서에 연락하겠습니다.”
그 시각, JS 그룹 부회장실에서 한 남자가 분을 참지 못 해다. 부회장 송상하였다. 그가 자리에 앉아서 씩씩거렸다.
오른 주먹을 꽉 쥐더니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여비서가 급히 들어왔다. 분을 참지 못하는 부회장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송부회장이 비서한테 크게 외쳤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나가!”
“아, 알겠습니다.”
비서가 황급히 나갔다.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 송상하 부회장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일을 왜 이따위로 처리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미스터 김 어디에 있어? 당장 바꿔!”
“잠시만 기다리세요.”
“으으으~!”
송부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블라인드가 쳐진 창가로 걸어가더니 걸음을 멈췄다. 부아가 치미는 듯 미간을 모으고 이를 악물더니 블라인드를 확 걷고 밖을 내다봤다.
강남구가 훤히 보였다. 번화한 거리에 차들이 많았다. 저 멀리 한강도 보였다. 쭉 뻗은 한강 다리가 그 위용을 뽐냈다.
그때 부스럭하며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송상하 부회장이 다시 크게 소리쳤다.
“미스터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