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다음날
2025년 11월 16일 오전 11시
검은색 차가 서울청으로 향했다. 최고급 세단이었다. 부드럽게 운행하며 그 기품을 더 했다. JS 모토의 최고가 차량인 에코 3 다이너스티였다.
오전에 쏟아지는 햇볕을 받자, 검은 광택이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검은색 차가 서울청 주차장에 주차했다. 운전사가 차에서 내렸다. 뒷좌석으로 달려가 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문이 열리자, 무척 긴장한 표정의 남자 둘이 내렸다. 한 명은 50대 초반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50대 후반 남자였다.
50대 초반 남자는 JS 그룹 부회장 송상하였고 50대 후반 남자는 회사 고문인 최민호 변호사였다.
송부회장이 옷매무새를 고쳤다. 서울청 강력범죄수사대 건물 앞에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잠시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앞에 계단이 있었다. 계단 10개 위에 출입문이 있었다.
*
조사실에 불이 켜졌다. 정찬우 형사의 안내를 받으며 송상하 부회장과 최민호 변호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조사실 안에 두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강인과 백정현 형사였다.
“자리에 앉으세요.”
백형사의 말에 송부회장과 최변호사가 자리에 앉았다. 이제 조사를 시작해야 했다.
유강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탐정 유강인입니다. 송상하 부회장님과 고문변호사이신 최민호씨가 맞습니까?”
송부회장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유강인 탐정님, 다 알면서 뭘 물어보시나요?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부회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JS 그룹 경호 2팀과 오태환씨에게 천일수씨와 박재영씨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나요?”
최민호 변호사가 급히 답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우리 의뢰인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조사실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이를 감추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됐다.
송상하 부회장이 이를 악물더니 유강인을 째려봤다. 둘은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JS 그룹 NEW & FRESH 행사장이었다.
그때 유강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한마디로 불청객이었다. 그 불청객이 잘 진행되던 행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를 생각하자, 송부회장은 화를 참기 어려웠다.
송상하 부회장은 분명 김돈국 비서한테 박재영이 곧 죽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박재영이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에 나타난다. 곧 죽을 몸이 아니라 곧 일어날 몸이었다.
‘유강인, 이 교활한 놈! 아주 재수 없는 놈이야.’
송부회장이 잠시 씩씩거렸다. 그러다 허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렇게 앞에 있는 유강인을 압박했다.
유강인이 물끄러미 송상하 부회장을 쳐다봤다. 화난 얼굴이 분명했다. 그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회장님께서 비밀리에 박재영씨 유전자 검사를 한 번 더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아시나요?”
송부회장이 놀라지 않았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유강인만 노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유강인이 생각했다.
‘보아하니, 그 결과도 아는 거 같군.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회장님이 비서실을 불신하고 윤동규씨에게 비밀리에 검사하라고 지시한 건데 ….
아! 그렇다면 가능하겠군. 회장님이 두 개 조사 결과 중 비서실 결과가 조작됐다고 판단하고 부회장을 부른 거야. 그래서 부회장이 이 사실을 아는 거야.
그때 회장님이 부회장한테 역정을 냈을 게 분명해. 그 와중에 쓰러진 거고 ….
갑자기 쓰러진 게 좀 이상하긴 한데. 혹 부회장이 회장님한테 몹쓸 짓을 한 게 아닐까? 그래서 회장님이 쓰러진 건가? ’
의심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유강인이 부회장의 두 눈을 유심히 봤다. 아들의 두 눈에서 진실을 찾았다. 눈망울에서 커다란 분노가 보였다.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래, 분노군. 화가 많은 사람이야.’
유강인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부회장님, 회장님이 말씀하셨나요? 비서실이 보고한 유전자 검사가 조작됐다고.”
“뭐, 뭐라고?”
송상하 부회장이 깜짝 놀랐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최민호 변호사가 의뢰인을 말렸다. 섣불리 말하지 말라고 손짓했다. 이에 송부회장이 화를 꾹 참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최변호사가 유강인에게 말했다. 강경한 어조였다.
“그런 일 없습니다. 유전자 검사는 조작되지 않았습니다.”
유강인이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과연 그럴까요? 회장님과 박재영씨 유전자를 어제 채취했습니다. 세 번째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오면 모든 게 드러날 겁니다.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으으으~!”
최민호 변호사 신음을 흘렸다. 정곡이 찔린 듯했다. 세 번째 유전자 검사 결과에 따라서 모든 게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박재영이 회장의 아들인지 아닌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유강인이 말을 이었다.
“최변호사님, 회사 입장을 알고 싶습니다. 어서 말해주세요. 경호팀이 유전자 검사 결과를 착각해서 이 모든 일을 벌인 건가요?
불일치를 일치로 오인한 건가요? 회장님한테 돈을 뜯어내려고 박재영씨를 납치한 건가요?”
“맞습니다. 이 모든 일은 부회장님과 관련이 없습니다. 모두 경호팀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회사에 책임이 있다면 그자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알겠습니다. 현재 경호팀과 오태환을 조사 중입니다. 모두 묵비권을 행사하지만, 곧 진상이 드러날 겁니다.”
“진상이라나요? 진상은 이미 다 드러났습니다. 모두 경호팀과 오태환이 짜고 벌인 짓입니다.
자체 조사 결과, 경호팀장과 오태환은 고향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검사 결과를 착각해서 벌인 일입니다.
만약 박재영씨가 회장님 친자가 맞는다면, 유전자 채취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거나 분석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부회장님은 범죄 행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연구소가 보낸 결과를 받았을 뿐입니다.”
유강인이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송상하 부회장이 모든 범죄를 주도했다고 시인할 리 없었다. 그가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부회장님이 말씀하시길, 회장님은 JS 병원 특급 병실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보니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외모가 비슷한 사람이 회장님 행세를 했습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유강인의 말에 최민호 변호사의 입이 쑥 들어갔다. 송상하 부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유강인이 말을 이었다.
“조사 결과, 회장님은 다른 곳에 계셨습니다. JS 그룹 산하 요양 병원이었습니다.
거기 지하 창고에 의식불명 상태로 혼자 계셨습니다. 그곳은 아주 더러운 곳이었습니다.”
“젠장!”
송상하 부회장이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가 급히 말했다.
“착각입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깜박깜박합니다. 그래서 잘 못 말한 겁니다.”
“위중한 아버지가 계신 곳을 헷갈렸다고요? 그 말을 믿으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합니다.”
송부회장이 화를 참지 못하자, 최민호 변호사가 급히 의뢰인을 제지했다. 최변호사가 말했다.
“지금 부회장님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회장님이 쓰러지신 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셨습니다.
현재 심신불안 상태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의사의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착각하신 겁니다. 몇 달 전 JS 병원 특급 병실에 회장님이 입원하셨습니다. 그 일과 헷갈린 겁니다.”
유강인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심신이 미약하신 분이 행사장에 오셔서 당당한 모습으로 연설하셨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그때는 힘을 내는 약을 드셨습니다. 그래서 반짝 힘을 낸 거뿐입니다. 예정된 행사를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회장님이 쓰러지셨는데 부회장님마저 불참하면 행사에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NEW & FRESH 행사는 회사의 비전을 선보이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참, 말을 잘하시네요.”
“그럼요. 저는 변호사입니다. 그것도 유능한 변호사입니다.”
최민호 변호사가 말을 마치고 씩 웃었다.
유강인이 생각했다.
‘역시 변호사랑 말싸움할 필요가 없군. 청산유수야. 이길 수가 없어.’
유강인이 한번 헛기침했다. 앞에 있는 물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질문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부회장님은 회장님이 요양병원에 있는데 JS 병원에 있는 거로 착각하셨군요.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왜 JS 병원에서는 회장님이 특급 병실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겁니까? 병실 안에는 가짜 환자가 있었습니다.”
최변호사가 서둘러 답했다.
“그건, 병원장님이 임의로 조치한 겁니다. 대외에는 JS 병원에 회장님이 있다고 알리고 실은 요양 병원에 모신 겁니다.”
“왜 그렇게 했죠?”
“그야. 기자들이 JS 병원으로 몰려올 거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병원장님이 말씀했습니다.”
“그렇다고 회장님을 더러운 지하 창고에 모셨나요?”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지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또 직원 타령인가요?”
“아닙니다. 직원이 실수한 겁니다. 병원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VIP 병실에 모시라고 지시했답니다.”
“끝까지 우기겠다는 거군요. 잘 알겠습니다.”
“우기는 거 아닙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말만 합니다.”
“진실하다?”
유강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최민호 변호사가 뻔뻔한 태도를 일괄했다. 부회장은 아무것도 몰랐고 모든 건 직원과 연구소에서 실수했다고 잡아뗐다.
유강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생각했다.
‘좋다. 꼬리를 자르겠다는 심산 같은데 그런다고 진실이 가려지지는 않아.
증거를 반드시 잡아서 그 죄를 묻겠다.’
유강인이 손목시계를 살폈다. 백두성 자서전 출간 기념회에 가야 했다. 그가 둘에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유강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송상하 부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0초간 유강인을 무섭게 노려봤다.
유강인이 고개를 돌려 그 무례한 시선을 회피했다.
송부회장이 등을 휙 돌리더니 출입문으로 향했다. 최민호 변호사가 그 뒤를 급히 따랐다. 부회장의 심기를 살피려 안달했다. 딸랑거리는 종 같았다.
유강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프레스 센터로 출발해야 했다.
**
프레스 센터 기자 회견장에 불이 들어왔다. 오늘 오후 2시에 백두성 자서전 출간 기념회가 있었다. 불이 들어오자, 센터 직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한 직원이 커다란 입간판을 들고 왔다. 출입문 앞에 입 간판을 세우자, 다른 직원들이 화려한 화환을 들고 와 출입문 옆에 세웠다.
기자 회견장 안은 더 바빴다. 많은 직원이 의자와 책상을 정렬하고 단을 청소했다. 100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준비됐다.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기자를 비롯한 손님들이 하나둘씩 회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시각 탐정단 밴은 도로를 달렸다. 서울 중구로 들어서자, 저 멀리에 프레스 센터가 보였다. 20층 높이 건물이었다.
유강인은 어제 백두성과 약속을 잡았다. 출간 기념회가 끝나고 근처 커피숍에서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탐정단 밴이 프레스 센타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 안전하게 주차했다. 차에서 내린 유강인과 조수 둘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현재 시각은 오후 2시 20분이었다. 출간 기념회는 벌써 시작했다.
20층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강인이 서둘러 내렸다. 저 앞에 기자 회견장이 보였다.
출간 기념회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한 사람이 단 위에 있었다. 축하연설 중이었다.
70살이 훌쩍 넘은 여인이 얼굴에 웃음꽃을 띠며 축하사를 낭독했다. 그녀는 영화배우 전나숙이었다. 감초 연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70년대에 이름을 날렸던 여배우였다. 키가 작고 몸이 통통했다. 허연 백발을 곱게 위로 올렸다. 그녀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백두성 회장님은 타의 모범이 되시는 훌륭하신 분입니다. 오늘 90세 생일을 맞아 자서전이 출간됐습니다.
자서전 안에는 백회장님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인생사입니다. 젊은이들한테 귀감이 되는 내용입니다.
어떤 역경이 닥쳐도 굴하지 않는 백회장님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 같습니다. 역시 천상 영화배우이십니다.
조만간에 자전 영화가 제작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으로 축하사를 마칩니다.”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 앞에 귀빈들이 앉아 있었다. 출판사 직원과 과거 유명했던 영화배우와 제작자, 영화감독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 백두성도 있었다.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축하사를 마치고 오늘의 주인공인 백두성 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럼, 열화같은 박수로 백회장님을 환영해주세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손님들이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90살 노인 백두성이 귀빈석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서가 부축하려 하자, 한 손을 흔들었다. 그는 허리가 꼿꼿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은 필요 없었다.
백두성이 정정한 모습을 보이자, 손님들이 참 다행이라고 여겼다. 여전히 건강하시다며 100살까지 너끈하실 거라고 덕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