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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olee Nov 06. 2024

27_운명을 가르는 출간 기념회

탐정 유강인 18편 <검은 자서전과 악의 비밀>

“음!”


백두성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단을 향해 걸어갔다. 느릿한 걸음이었지만, 흔들림은 없었다.


단 앞에 계단 네 개가 있었다. 백두성이 한발 한발 계단을 올랐다.


백두성이 단 위로 올라가자, 사회자가 허리 굽혀 공손히 인사했다.


사회자가 무척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두성 회장님, 여기 마이크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두성이 마이크를 받고 기자회견장을 꽉 채운 손님들을 살폈다.


손님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났다. 시골 밤하늘 별빛 같았다. 오늘의 주인공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는 거 같았다.


백두성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고령이었지만, 목소리에 여전히 힘이 넘쳤다.


“안녕하십니까? 과거 영화배우였던 백두성입니다. 지금은 조그마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백두성의 말에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네에? 조그마한 사업체라고요? 거대 기업이잖아요. 하하하!”


“역시 명불허전이네요. 말솜씨가 녹슬지 않았어요.”


“유머 감각은 여전하시네요.”


손님이 너도나도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그럴 만했다.


백두성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기업, DS 엔터와 두성 IT 솔루션의 창립자이자, 회장이었다.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난 명예 회장이지만, 그의 업적은 누가 봐도 찬란했다.


백두성이 씩 웃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비서를 찾았다. 그러자 단 밑에 있던 비서가 단 위로 올라왔다.


비서는 40대 남자였다. 키가 크고 말랐다. 오른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책은 백두성의 자서전 ‘찬란한 빛과 수렁 같은 어둠_진실의 기록’ 1권이었다.


현재 1권이 인쇄되어 출간 기념회로 배달됐다. 갓 만든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2권은 다음 주에 3권은 다다음주에 차례대로 나올 예정이었다.


백두성은 어제 가제본으로 자서전 1권, 2권, 3권의 내용을 모두 확인했다. 그가 OK 사인을 하자, 1권이 인쇄되었다.


“우와! 저 책이구나!”


손님들이 환호성이 질렀다. 오늘 행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서전 1권이 등장했다.


자서전이 조명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났다.


손님들이 군침을 꿀컥 삼켰다. 책을 당장이라도 사고 싶은 거 같았다.


자서전 판매는 행사 종료 후였다. 백두성 친필 사인과 함께 사은품도 증정했다. 사은품은 고가의 프랑스제 향수 비누였다.


백두성이 흐뭇한 표정으로 자서전을 받았다.


책 표지에 커다란 사진이 있었다. 백두성의 젊은 시절 사진이었다. 영화배우로 갓 데뷔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데뷔 때부터 미남의 대명사였다. 멜로와 액션에 모두 능통한 만능 배우였다. 그래서 한국의 007이라고도 불렸다.


책 표지를 바라보던 백두성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왼손으로 책을 잡고 오른손으로 책 표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증손자 얼굴을 쓰다듬는 거 같았다.


백두성이 피식 웃었다. 90살 노인이 돼서 20대 청년 시절 사진을 보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걸 느낀 듯했다.


백두성이 고개를 끄떡였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백두성과 손님들이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뒤에서 출입문을 조용히 여는 소리가 들렸다.


유강인이 문을 열고 기자회견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조수들도 들어왔다.


빈자리는 끝자리 몇 석밖에 없었다. 그것도 두 석에 불과했다. 유강인이 작은 목소리로 조수들에게 말했다.


“조수님들은 자리에 앉아.”


황정수가 정색하고 답했다.


“아닙니다. 탐정님이 자리에 앉으셔야죠? 제가 서 있겠습니다.”


“맞아요. 탐정님.”


황수지도 거들었다.


유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말했다.


“조수님들 말 들어. 난 서서 이곳 분위기를 살필 테니 ….”


유강인의 단호한 말에 조수들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정수와 황수지가 자리에 앉자, 유강인이 고개를 돌렸다. 출간 기념회의 분위기를 살폈다.


행사장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저 멀리에 단이 보였다.


단 위에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연설 중이었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딱 봐도 자서전 같았다. 연설하는 사람은 고령의 노인이었다.


유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주인공 백두성이 분명했다. 그가 귀를 쫑긋했다. 백두성의 말을 경청했다.


“1권은 철부지 시절 이야기입니다. 의욕만 앞섰던 젊은 시절이죠. 뭐든지 잘하고 싶었지만, 항상 서툴렀던 햇병아리 악전고투기입니다.”


많은 손님이 그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백두성처럼 연로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백두성의 젊은 시절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젊은 백두성은 패기가 넘쳤을 뿐 아니라 능숙하고 화려했다. 결코, 서투른 햇병아리가 아니었다.


백두성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90년 인생을 반추하며 마지막 피날레를 즐기는 거 같았다.


저무는 해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게 아니라, 웅장한 교향곡이 그 위세를 뽐내는 거 같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손님들이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노병이 과거를 회상하자, 인내심을 갖고 그를 기다렸다.


1분 후


백두성이 고개를 내렸다. 눈가가 촉촉했다. 차렷 자세를 취하더니 허리를 굽혔다. 그렇게 손님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두성!”


“백두성!!”


백두성을 연호하는 소리가 기자회견장을 꽉 채웠다. 이 소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유강인이 생각했다.


‘역시 백두성은 대단한 인물이군.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하고 있어. 90살이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 여전히 건재한 인물이야. 연예계와 재계의 거물이야.’


박수 소리와 환호성이 잦아지자,


백두성이 허리를 펴고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자서전의 백미는 … 1권이 아닙니다. 1권은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2권 말미부터 진짜가 시작됩니다. 3권에서 모든 게 밝혀질 겁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자서전에 담았습니다.

저는 사실 … 죄인입니다. 이 자리에 빌어서 그 죄를 사죄하고 싶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두성이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을 보고 유강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밀이라고?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분명 심상치 않은 말이었다. 비밀이라는 말에 유강인이 긴장감을 느낀 듯 양 입술에 침을 묻혔다.


현재 50년간 봉인된 비밀 하나가 폭로된 상황이었다. 바로 JS 그룹의 송해성 회장한테 혼외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비밀을 누설한 사람은 송회장의 친구인 영화감독 천일수가 유력했다. 천일수는 그 비밀을 누설한 대가로 죽은 거 같았다.


천일수는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인 백두성과 관련이 있었다. 둘이 짜고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비밀 하나를 폭로한 거 같았다.


그 폭로로 JS 그룹의 후계자가 바뀐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었다.


유강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백두성이 모든 것을 말하겠다고 단언했다. 이는 뭔가를 폭로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대단한 걸 폭로할 거 같았다.


백두성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연예계와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많은 정보를 얻었을 게 뻔했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 거 같았다. 이 비밀들은 단순 가십 거리일 리 없었다.


앞서 천일수가 폭로한 비밀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송상하 부회장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비밀을 누설한 천일수를 죽이고 이복동생과 아버지까지 죽이려 했다.


거물 백두성이 자서전을 통해 대단한 비밀을 추가로 폭로한다면 한국은 커다란 소용돌이에 휩싸일 게 뻔했다.


“목이 마르네요. 매실차 좀.”


백두성이 갈증을 느끼고 단 아래 서 있는 비서를 찾았다.


“알겠습니다.”


비서가 귀빈석으로 향했다. 백두성이 앉았던 귀빈석 테이블에 잔 하나가 있었다.


음료가 가득 찬 잔이었다. 매실차였다. 매실차는 백두성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였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잔을 들고 단위로 올라갔다.


매실차를 본 백두성이 환하게 웃었다. 잔을 받고 그 향을 음미했다.


그가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향이 어느 때보다도 좋네요. 매실차! 참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료입니다. 여러분들도 꼭 드셔보세요. 매일 같이 먹으며 건강에 좋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너도나도 생각했다. 백두성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매실차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흐뭇한 표정을 짓던 백두성이 말을 이었다.


“저는 죽을 때도 … 매실차를 꼭 먹고 죽을 생각입니다.”


백두성의 말에 손님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


분위기가 유쾌해졌다. 백두성이 입맛을 다시더니 잔을 입에 댔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이 난 듯 잔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혹, 잔에 독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 말을 듣고 손님들이 깜짝 놀랐다. 백두성이 난데없이 독을 얘기했다. 잔에 독이 있다는 말은 오늘 누군가가 그를 독살한다는 말과 같았다.


“설마, 그럴 리가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 좋은 날에 그런 일이 있겠어요. 회장님은 120살까지 너끈하게 사실 겁니다.”


손님들이 그럴 리 없다고 손사래 쳤다.


백두성이 지긋이 웃었다. 그가 말했다.


“농담입니다.”


“하하하!”


“하하하!”


“역시 회장님은 재미있으셔!”


손님들이 박장대소했다.


백두성이 활짝 웃었다. 두 눈으로 잔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살 만큼 살았고 잃을 건 다 잃었습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입니다. 90 평생 잘 놀다가 갑니다.

모든 건 자서전에 있습니다. 할 말은 모두 자서전에 남겼습니다.”


백두성의 말을 듣던 유강인이 갸우뚱했다. 뭔가가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두성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죽음을 예견한 듯했다.


“이거 불길한데 ….”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유강인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그리고 두 눈이 잘 익은 사과처럼 커졌다. 그가 생각했다.


‘그래, 놈들이 백두성씨도 죽일 수 있어. 천일수씨라ᆖ갈 죽였던 것처럼! … 사람의 마지막 예감을 무시할 수 없어. 막아야 해! 어서!!’


유강인이 급히 움직였다. 단까지 가려면 한참 걸어야 했다. 이에 뛰기 시작했다. 그가 급히 외쳤다.


“백회장님!”


백두성이 잔을 높이 쳐들었다. 유강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유리잔이 조명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안돼!”


유강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잔을 높이 쳐든 백두성이 잔을 내렸다. 그리고 매실차를 마셨다. 꿀꺽꿀꺽 소리가 들렸다. 잔에 가득 찼던 매실차가 식도를 지나서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모습을 보고 유강인이 걸음을 멈췄다. 백두성을 막을 수 없었다.


“좋군.”


백두성이 만족한 표정으로 잔을 비웠다. 그러다 한 사람을 내려다봤다. 단 앞에 한 사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백두성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유강인 탐정님이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두성이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빈 잔을 비서에게 넘기고 단에서 내려왔다. 거침없는 행보였다.


말없이 서 있는 유강인을 향해 백두성이 걸어갔다.


둘 사이 거리가 십 보가 됐을 때


운명의 여신이 백두성을 찾아왔다.


여신이 그 아름다우면서도 냉정한 얼굴을 비췄다.


“윽!”


갑자기 백두성이 비틀거렸다. 오른손을 급히 들더니 검지로 유강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 유강인 탐정님!”


“억!”


이윽고 비명이 들렸다. 백두성이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90 평생 굳건했던 다리가 이제 힘을 잃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유강인이 놀란 나머지 아!! 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앞에 거목이 쓰러졌다.


비극을 예견했지만, 그걸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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