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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노아 Nov 20. 2024

낙관적 염세주의(上)

돈키호테

누군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나 무의미한 눈 맞춤이 아니라, 그 눈이 지닌 무언가를 진정으로 마주한 적이 있는가? 마치 한순간이라도 더 머물면 당신의 자아마저 그 안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은 심연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구덩이가 존재하는 눈동자를 말이다. 눈은 종종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만, 그런 흔한 말로는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어딘가 비정상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눈동자. 그 눈 속에 담긴 무언가는 단순히 감정이거나 사고를 넘어선, 마치 우주 그 자체와 닮아 있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의 눈이 바로 그러했다. 나는 처음 그녀의 동공을 보았을 때 단순히 미적인 아름다움만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눈 속 어딘가에서 붉은 액체가 천천히 피어오르는 듯한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피어오름은 너무나 섬세하고도 미세한 것이어서, 처음엔 그녀가 작업하던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붉은 물감의 흔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그것은 그저 외부 세계가 비친 것이 아니라, 그녀 눈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눈동자 속에서 은밀히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은 그녀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것은 인간의 눈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움과 고요함, 그리고 동시에 섬뜩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서 붓질한 물감의 흐름과 달리, 그녀의 눈 속에서 펼쳐지는 이 붉은빛은 더욱 생명력 있고 매혹적이었다. 붉은 물감의 자태는 어느새 녹색과 황금빛이 덧입혀지며, 마치 대자연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광활한 오로라의 춤사위가 되어갔다. 그 빛들이 무수히 겹쳐지며 그녀의 눈 속에서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키는 것 같았다. 초점 없는 그녀의 시선은 그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공허하게 떠돌았고, 주변의 건물과 사물이 일렁이며 그녀의 눈 속에 파묻혔다. 그녀의 눈은 단순히 외부 세계를 반사하는 거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 아니, 우주 그 자체를 품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눈 속을 채웠던 그 빛의 향연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더욱 기이하고 섬뜩한 이미지였다. 그녀의 눈 속은 마치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찍힌 흑백 사진처럼 빛을 잃고 칙칙한 색감만이 남아 있었다. 그 검고 낡은 색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고 녹슬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홍채의 중앙에는 끝없이 깊어 보이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나락처럼 끝을 알 수 없었고, 그 구멍은 잔잔히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는 듯했다. 빛도, 소리도 없는 그 공간은 고요했지만 동시에 그 안에 무언가 끔찍한 진실이 숨어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코즈믹 호러 소설에서 등장하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그 눈동자는, 결코 사람이 지닌 눈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인, 그 무엇이었다. 그 속에 담긴 진실은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함과 저주를 동시에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 속을 가득 채운 새까만 동공은 마치 영원을 집어삼키듯 확장되어 있었고, 그 주변의 회백색 띠는 희미하게 번지며 끝없는 여백을 연상시켰다. 그 회백색은 단순한 색감이 아니라, 어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그녀의 눈가에는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올라왔다. 그 붉어진 눈시울은 그녀가 어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지 암시하는 듯했지만, 그것을 묻기에는 그 눈이 너무나도 낯설고 두려웠다. 회색빛 흰자에 선명히 드러난 실핏줄은 마치 네온사인처럼 붉게 달아올랐고, 그 선들은 그녀의 감정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감정이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둑어둑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며, 그녀의 얼굴 아래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늘은 단순한 피로의 흔적이 아니라, 어쩌면 그녀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마치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경계에서, 그녀는 점차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나는 한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 무저갱 같은 동공 속에서 나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공포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눈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도 느꼈다.


"하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그녀의 숨 하나에 살갗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느적이는 움직임으로 이젤을 접었다. 그녀가 이 칙칙한 회색의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도 여러 날이 되었다. 그녀는 이 근방의 아파트에 살았다. 나 역시 동일한 아파트의 회색 벽돌로 된 그곳의 더 낡은 방에 세를 들었다. 먼지가 잔뜩 날아드는 방 안에 백열전구 하나가 유일한 광원인, 그런 방이었다. 그녀가 이젤을 끌고 가며 발생하는 바닥과의 마찰음이 째지는 소리를 내며 부산스레 퍼졌다. 그러다가 아스팔트의 구멍에 걸리며 더욱더 날카로운 소리로 울어댔다. 그녀는 이젤을 따라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를 덮고 있던 한 겹의 얇은 스타킹은 무릎의 올이 다 나간 채로, 붉고 진한 액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한켠, 그 가장 은밀한 깊이에서부터 은밀하게 맺히기 시작한 습기가 서서히 작은 물방울로 변해갔다. 그 물방울은 어느덧 한 알의 유리구슬이 되어 눈가에서부터 광대뼈를 타고 내려와 쇄골을 따라 흘렀고, 이윽고 마치 상처를 덧나게 하는 차가운 비수가 살을 파고드는 듯, 차가운 촉촉함을 주위로 흩뿌렸다. 그녀의 눈에 담긴 투명한 액체는 마치 한 편의 비극을 그려낸 고요한 그림자처럼 새로운 감정을 드러내었다. 그 시선의 중심, 어두운 동공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무저갱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두운 해구가 펼쳐졌으며, 그 속에는 시퍼런 비애와 삶의 고통이 불가해하게도 응어리져 있었다. 그것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생명의 물이 아니라, 마치 언젠가 예수가 언급한, 모든 인간의 종말을 불러올 그런 저주받은 물과도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를 적시고 빛을 반사하며 잠깐씩 떨리는 눈물방울은, 눈꺼풀의 미세한 떨림과 함께 기묘한 파문을 일으키며 고요한 전율로 나의 심장에까지 파고들었다. 그 떨림은 마치 가시로 가득 찬 면류관이 내 머릿속 깊은 곳을 찌르는 듯,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통증과 함께 오묘한 고통을 내 마음 구석구석으로 퍼뜨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눈물도, 감동을 자아내는 그런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축축하고 한기 어린,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질긴 회녹색 곰팡이를 피어나게 할 듯한 냉랭한 눈물이었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 눈꼬리를 높이 치켜들었으나, 어느새 눈물의 무게에 굴복하여 차갑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마치 마지막 전선을 지키려는 듯 그 얇은 속눈썹 위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으나, 결국 견디지 못하고 포기한 듯 백기를 든 채 자유롭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 또한 이미 눈물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음을 인지한 듯 자리 위로 무너져 내리며, 끝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충혈된 눈두덩과 광대뼈 위로 흘러내린 눈물 자국은, 그 눈물이 이미 깊이깊이 스며들어 그녀의 영혼을 침식하고 있는 듯한 비수 같은 회한을 드러내고 있었다. 행인들은 그녀의 모습을 잠깐 훑어볼 뿐,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기보다 참으로 그저 지나쳐야만 할 인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녀의 눈물 속에 담긴 깊고 날카로운 회한이 이들에게도 다가온 탓일 것이다.

그녀의 푸른 눈물은, 오랜 밤마다 흘려온 눈물로 코 옆에 남겨진 붉은 자국과 대조를 이루며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어쩌면 그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했다. 매일 밤 가슴 깊은 상처 위로 알코올을 붓듯, 고통의 소독으로 얼룩진 눈물이기에, 마치 굳어버린 테라코타처럼 쉽게 그녀로부터 떨어지려 하지 않는 듯했다. 그것을 억지로 떼어내려 하면 그녀의 심지마저 함께 부서질 것이 명백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두덩이 벌게진 눈을 두 주먹으로 비비며, 흘러내리던 울음을 겨우 참아내려 애쓰는 듯 보였다.


"씨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젤과 캔버스를 집어 들고, 그녀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나도 그런 그녀를 따라 - 나는 그녀의 옆집에 살았다- 아파트로 들어갔다. 1층에서 그녀를 마주친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가볍게 목례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나는 그녀에게 한 마디를 넌지시 건넸다.


"울었어요?"


"..."


그녀는 시종일관 침묵뿐이었다.


"미르칼라던가요? 이름이."


"네."


"눈이 예쁘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다들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고통은 고통스러운 데로 흘려버리고,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남기자고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웃음이었다. 우리는 13층에서 내려 각자의 문 앞으로 향했다.


"아, "


그녀가 뒤돌아봤다.


"맥거핀이에요, 내 이름 말이에요. 옆집이니까 언제든 찾아오셔도 괜찮아요. 저도 당신과 똑같은 예술가고, 비슷한 고충을 가진 사람일 테니 도움이 필요하시면 찾아와 주세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맥거핀 씨의 고충과는 방향성이 다를 것 같아서요."


그녀는 아까보다는 한층 밝아졌지만, 여전히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몸뚱이를 간신히 수할, 그녀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공간은 그녀의 생각을 담기에 다소 부족해 보이는 공간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방 가운데에는 또 다른 캔버스 하나가 서있었고, 바닥은 수십 개의 물감 튜브가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에서 잠을 자지 않는 것일까. 작은 체구의 그녀임에도 몸을 뉘일 곳은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의 생각은 그 공간에 수납될 만큼 줄어들게 될 것인가. 생각이 줄어든다는 것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으로 -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어있는 상태에 수렴할 것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일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염세주의자였던 것일까.

그나저나, 나의 고충과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이 예술과 관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상하리만치 아는 게 많아 보이는 태도, 관조적인 시선은 그녀가 마치 전지한 존재인 마냥 행동했다.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붓 끝은 이제 더욱더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있었으며, 그녀가 그린 그림은 더욱 심연의 세계를 불러내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남은 붉은 흔적들, 그것이 핏자국인지, 혹은 단지 붉은 물감에 불과한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었으나, 그 모든 그림은 일관되게 아비규환을 묘사하고 있었다. 간혹 그 속에는 광기에 찬 인간이 비죽이 웃는 형상이 숨어 있었다. 마치 환멸에 찬 웃음의 표정을 지옥의 모습 위에 겹쳐놓은 듯, 그 광기 어린 미소는 눈에 띠지도 않게 덧칠되어 있었다. 이젤 옆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그림들은 물감이 덜 마른 채로 회색빛 태양 아래 검붉은 빛으로 섬뜩하게 반사되었으며, 그 모습은 그녀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변화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무심한 미소를 띤 그녀의 표정은 전보다 부드럽고 차분해 보였다. 이전에 삭막한 수평선처럼 길게 뻗어 있던 눈꼬리는 이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완만한 포물선을 이루었고, 그 눈매는 마치 비극과 미소가 겹쳐진 양면성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역시 전과는 다르게 생기가 돌았다. 그 연분홍빛 입술은 혁명가처럼 단호하게 다문 모습에서 이제는 살며시 떨리는 움직임을 보이며, 보기 힘들었던 치아를 아주 조금 드러내었다. 그 미소는 묘하게도 한층 빛나 보였다. 그녀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일까?

그녀는 여전히 염세주의자였으나, 그 속에 어딘가 은은한 낙관이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인생의 심오한 비밀이라도 깨달은 사람처럼,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을, 또 한편으로는 독특한 희망을 품은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조명으로 채워진 음침한 인화실로 자주 들어가, 자신의 세상을 담은 사진들을 하나씩 인화해 나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재구성하듯, 자신의 그림을 인화하고, 그것을 분해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조립하고 또다시 지옥의 풍경을 그려내었다. 그녀는 그렇게 끝없이 자신의 작품을 재구성하고,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빚어내며, 끝내 사진 속에 자신만의 독특한 내면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묘하게도 낙관적이었다. 어쩌면 유쾌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를 염세주의자라 확신했던 것은 그녀의 동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구렁텅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 아니 차라리 묘한 마력을 품고 있는 듯, 주변의 모든 시선을 끌어당겼다. 이제 그녀의 눈에서 번득이던 선홍빛 불꽃은 물감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반짝였고, 어둠 속에서 은근히 빛을 내는 지옥의 불길처럼 보였다. 칠흑 같은 무저갱에 빛과 색채가 스며든 듯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린 그림과 닮아 있었다. 예술이란 자기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것임이 틀림없다. 그녀는 말하자면 광기 어린 미소를 마음 깊은 곳에 숨긴 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미소가 비록 광기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그 안에 담긴 행복만큼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옥도—표면적으로는 그저 가상의 장면이었으나, 열여덟 남짓한 그녀에게는 아마도 현실 그 자체였으리라—그 장면들은 그녀가 직면한 현실처럼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그 해탈자 같은 미소는 그녀의 아름다움이 깊어졌음을, 혹은 진정한 해탈에 다가섰음을 암시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밤이 다가왔다. 그녀는 어두운 골목으로 향했다. 여전히 터덜터덜거리는 발걸음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지친 듯한 발걸음으로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가 1년 사이 얻은 작업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 길은 오래된 도심의 한복판에 숨겨져 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기 힘든 음울한 회색의 골목이었다. 그곳의 공기는 차갑고도 건조했으며, 벽돌 사이사이엔 세월이 켜켜이 쌓인 검은 때가 고여 있었다. 마치 시간조차 멈춘 듯한. 이내 붉은빛 노을이 골목을 물들일 준비를 하며 마지막 남은 햇살이 퇴색된 벽 위에 아스라이 걸쳐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느릿하고 무거워 보였지만, 그 눈빛 속에서 꺼져가는 마지막 불꽃이 한 가닥 남아 반짝이는 듯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주위를 가득 채우던 잿빛 침묵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였다. 방 안의 조명은 마치 마지막으로 꺼져가는 백열전구처럼 간신히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것은 황혼의 마지막 한 줄기 빛이기도 했다. 주위는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창문 너머로부터 스며드는 흐릿한 달빛이 바닥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벽에 걸린 낡은 액자들 속에 있는 인물들은 희미하게 바래져 있었고, 그들과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숨겨진 비밀이 깃든 듯한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방 한편에 이젤을 세우고 천천히 팔레트를 집어 들었다. 팔레트 위엔 짙은 검은색부터 적갈색, 그리고 짙은 청록색까지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 색들은 마치 깊은 숲 속의 나무껍질과도 같은 갈색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흔적을 닮은 짙은 녹색, 그리고 차갑고도 고요한 바닷속을 연상시키는 청색까지 이르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스치듯 발려지는 색채들이 캔버스를 물들이며 어둠 속에서 환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붓을 움직일 때마다 팔레트 위의 붉은 기운은 더욱 짙어졌고, 그것은 마치 그녀가 감추고 있던 고통과 상처가 폭로되는 순간처럼 강렬했다.

그녀의 붓끝에서 내려진 붉은 물감은 캔버스 위에서 서서히 번져가며, 가슴속 깊은 곳에 맺힌 피비린내 나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붉은 물감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캔버스에 펼쳐졌고, 이내 검은 물감과 뒤섞여 뭉근한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작은 빛의 흔적을 만들어냈다. 흘러내리는 붉은 기운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으며, 점차 그녀의 붓이 움직일 때마다 푸른빛과 은은한 보랏빛이 캔버스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치 억눌린 기억 속에서 피어나는 망각의 꽃처럼 서서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캔버스 위에서 멈출 때, 한동안 그 방 안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빛이 바래진, 벽에 걸린 초상화들과 그녀가 방금 완성한 그림이 서로를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 그림을 바라보았고, 그 눈에는 어떤 연민과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며, 그녀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어딘가 먼 곳으로 향하는 듯한 낯선 향기를 실어왔다. 그 향기는 마치 오래된 책장의 먼지 내음과도 같았으며, 그 속에는 그녀의 잊고자 했던 모든 기억들이 어슴푸레 남아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캔버스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 손가락은 가느다랗고 창백했으며, 마치 한순간이라도 그 빛바랜 색감의 그림 속으로 스며들어 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캔버스를 가만히 스치자, 그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손끝에 서려왔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캔버스의 일부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그녀와 작품이 하나로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저 희미하게 떠오르다 이내 사라지는 고통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캔버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엔 짙은 남색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속에 흩어져 있는 별빛들은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하늘은 마치 깊고도 거친 바다와 같았다. 그 속에 떠오른 달빛은 부드러운 은빛을 띠며 천천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고, 그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한순간 빛과 어둠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림을 바라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의 전등을 껐다. 캔버스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남겨졌고, 그 속에 담긴 어둠과 빛의 흔적들은 오직 그녀만이 아는 비밀로 간직될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자 했던 그녀의 고독한 여정은 그렇게 밤의 정적 속으로 조용히 스러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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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인터뷰 응해주신 이번 작품의 뮤즈, 밴드 나노말( insta : @band_nanomal)의 백노루양( insta : @100_noru)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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