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
종종 그랬다. 아니, 꽤 자주 그랬다.
나는 지구를 깎아지르는 광자의 초속 삼십만 킬로미터 운동을 망막으로 받아내며 소스라치게 경기하듯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깨어난 장소는 결코 현실의 풍경이 아니었다. 흉곽의 펌프가 미친 듯한 속도로 박동한다. 마치 폭발하는 가솔린을 통째로 삼킨 기분이다. 오늘 아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퍅한 섬광이 눈꺼풀을 찢어내듯 내리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광경은 이끼로 뒤덮인 서고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꿈속에서 조증 환자처럼 꼴사납게 걷고 있었다. 광활한 서고 사이로 책 두세 권이나 들어갈까 싶은 작은 책상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서고에 꽂힌 책들은 제각각이었다. 알 수 없는 글씨가 적힌 평범한 책부터, 스스로 발광하는 청록색 나무덩굴 같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책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B612를 떠나온 어린 왕자처럼, 서너 시간 걸은 끝에 나는 수백 권의 책을 바벨탑처럼 쌓아둔 녹이 슨 노인을 발견했다.
그는 책상 위에 책 대신 녹색빛 유리 조각들을 줄지어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째서 책들을 가득 쌓아두고는 그 중 한 권도 읽지 않습니까?"
"나는 내가 내킬 때 그 책들을 탐할 것이다."
이제야 그가 쌓아둔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왼편에 놓인 책들은 모두 너덜너덜해지고 젖어 있었다. 반면 오른편에 놓인 책들은 아직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접힌 흔적조차 없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녹색 유리병 하나를 꺼내 그 안의 액체를 책 위에 쏟아내고 있었다. 그것이 젖은 책들의 이유일 것이다. 나는 어린 왕자의 감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무가치감이 밀려왔다. 나는 환멸을 느끼며 그 자리를 떴다.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반대쪽을 바라보니 또 한 명의 알 수 없는 인물이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알 수 없는 괴상한 구토감을 억누르며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느리게 걸어갔지만, 차라리 기어갔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을지도 모른다. 이곳이 나에게 얼마나 비이상적인 공간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매번 누군가를 볼 때마다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곳의 사람은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마임 배우 같았다. 나는 그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성별조차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중성적인 외모였다.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는 나보다도 더 느리게 움직이며 새까만 입술 사이로 검지를 갖다 댔다. 나는 자동적으로 그 동작을 '닥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것이 그의 진짜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눈 밑에 그려진 검은 눈물 분장을 강조하듯 우는 시늉을 했다. 그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독서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책을 보는 듯한 흉내만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슬픔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허공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손에는 연필이나 펜 같은 필기도구가 없었기에 그저 허우적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마도 내가 그의 기대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가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의 태도를 통해 그 말이 무척 모욕적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비웃으려면 비웃어보시지.
나는 뒤를 돌아 그 사람을 떠났다.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는 듯 했으나, 나는 그저 무시하고 걸었다.
끔찍한 기시감과 함께 긴 서고를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의 출처를 알아보기 위해 걷기를 멈추었다. 정적이 흐른다.
몇시간이 지났을까. 헝겊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뚫고 나온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의 근원을 응시한다.
여섯명의 아이가 이상한 헝겊 가면을 뒤집어쓰고 서있었다. 그들은 거울 앞에 일렬로 서서 그저 거울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눈동자마저 같은 빛을 띠었으나, 이들은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닮았을 뿐이었다. 어쩌면 닮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의 이음새가 어긋난 틈 사이로 솟아오른 듯한, 그저 이질적인 존재감이었다. 형상은 같되, 영혼은 달랐다. 하나는 어딘가에서 자라난 나무의 가지처럼 고요하게 세상을 등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땅 속 깊은 곳에서 파고든 뿌리처럼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들의 침묵은 울림이었고, 서로의 그림자는 길게 끌리며 교차하듯 이어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진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현실은 금이 간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우리는..."
하나가 입을 열었다.
"...너를 안다,"
나머지 아이들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여섯이었지만 마치 하나의 목소리인듯 공명했다. 거울과 그들의 가운데에는 두꺼운 책들이 불타고 있었다. 불은 책 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옮겨붙어있었다. 아이들의 발 앞까지 불이 번져있었으나,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두 여섯인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멈춘 것이 아닌,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아니."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마침내 그 거울이 보이는 거리까지 도착했다. 거울 안에도 그 아이들이 있었다. 거울 안의 아이들은 거울 밖의 아이들과 동일한 듯 보였으나, 미묘하게 달랐다.
"그럼 열둘이군."
"아니, 열 셋이다."
나는 이제여 비로소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키는 이상하게 작았다. 그리고 손도 너무나 작았다. 내가 걷기 힘든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주변 환경도 어느새 변해있었다. 예배당 같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서있는 곳은 제단과 유사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에배당 맨 앞줄 의자의 헝겊 가면을 주웠다. 익숙한 기시감에, 나는 그 가면을 뒤집어쓰며 재단을 향해 서서히 걸어갔다. 마침내 나는 거울 앞에 도달했다. 거울 앞의 나는 새파란 헝겊 가면을 뒤집어쓰고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아이가 웃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나를 찾았다. 끝에 있었다.
"이제 열 네번째로군."
순간 내가 거울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종종 그랬다. 아니, 꽤 자주 그랬다.
나는 지구를 깎아지르는 광자의 초속 삼십만 킬로미터 운동을 망막으로 받아내며 소스라치게 경기하듯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깨어난 장소는 결코 현실의 풍경이 아니었다. 흉곽의 펌프가 미친 듯한 속도로 박동한다. 마치 폭발하는 가솔린을 통째로 삼킨 기분이다.
나는 퍼런 헝겊가면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반신에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나는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차가운 강바닥이었다. 쭈글쭈글해진 피부도, 굽은 등도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보이는 것이라면, 내 눈 앞에는 아까의 그 열셋의 아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이다. 나는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분명히 꿈에서 깨있었다.
'달려'
그들의 말이 내 머리속에 맴돈다. 나는 길거리로의 질주를 준비한다. 안전한 길은 없다. 도로로의 질주는 세상에 맞서다 치룬 선택이었다. 꿈속의 나는 반성과 반복을 통해 마땅한 까닭을 얻고 이제 마땅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14번째 아해가 도로로 질주한다.
제14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린다.
14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 그렇게뿐이 모였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중에 1명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다.
그 중에 1명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다.
(길은 뚫린 도로라도 적당했다)
14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웅장한 경적소리가 고막을 강타한다.
나는 하염없이 웃었다.
종종 그랬다. 아니, 꽤 자주 그랬다.
나는 지구를 깎아지르는 광자의 초속 삼십만 킬로미터 운동을 망막으로 받아내며 소스라치게 경기하듯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깨어난 장소는 결코 현실의 풍경이 아니었다. 흉곽의 펌프가 미친 듯한 속도로 박동한다. 마치 폭발하는 가솔린을 통째로 삼킨 기분이다.
녹아내리는 질주에 나는 미처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고 세상을 껴안았다. 세상은 더 이상 상관할 것이 없었고, 시간으 저절로 가 있었다.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간단한 설명
사실 이 작품은 크레딧을 보면 알 수 있듯, 기본적인 플롯은 어린왕자를 따라가지만, 세부적인 부분은 이상의 글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묘사의 부분도 그렇고, 후반부에 오감도 시제 1호를 인용한 것도 이상의 글을 참고한 것이죠. 그렇기에 해석이 다소 필요한 글입니다.
날개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끝없는 의심을 건내는 부분을 따왔습니다.
우선 광활한 서고는 주인공의 내면세계입니다. 그리고 책들은 그의 기억이죠. 주인공이 자신의 책들을 알아볼 수 없던 이유는,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이기 때문이죠.
그가 첫번째로 만난 남자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글의 시간선에서는 이미 죽은 존재이지요. 주인공은 나이를 먹고, 자신의 기억을 모두 잊었지만, 아버지만은 기억속에 잔존하는 것이지요. 녹색 유리병은 술을 나타내는 것이며, 유리병과 함께하는 그 남자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알코올과 폭력으로 주인공의 책, 즉 기억들을 끔찍한 기억들로 물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만난 사람은 주인공의 어머니입니다. 그녀 역시 주인공의 기억에 남아있는데, 그녀가 마임맨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결국 좋은 어머니를 흉내만 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녀가 주인공에게 조용히 하라 한 것은, 폭력에 얼룩진 주인공을 부정하는 행동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목소리가 주인공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은, 그녀 역시 폭력을 앎에도 그 사실을 묵인하며 알리지 않는 것을 나타냅니다. 허공에 끄적인 글은 주인공에게 전달하고픈 말이었지만, 결국 전달되지 않은 말들입니다. 그 말이 전달되지 않은 까닭은, 그녀 역시 폭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녀가 기대에 찬 얼굴로 주인공을 바라보는 것은, 그녀가 주인공에게 행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에게 건 과한 기대입니다.
열 세명의 아이는 주인공의 페르소나입니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맞이한 존재이지요. 그의 기억 속에서, 그의 자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은 마지막 '질주'를 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는 늙었지만, 그의 자아는 모두 아직 어린 아이였던 것입니다.
항상 이상의 오감도를 보며 왜 13명이어야만 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14번째 아이가 있다면 어떤 인간일지 떠올렸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열 네번째는 열 셋 아해들 전부였죠.
그럼 이제 어린왕자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린왕자는 어린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린아이의 생각을 하는 노인이죠. 그렇기에 저는 어린아이의 시각과 동시에 나이있는 남성의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실재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사실 이 글은 이전에 올린 두 작품보다도 빨리 기획된 작품입니다. 쉽지 않더라고요. 다른 작품(이전작들도 포함해서요)들은 잘하면 하루이틀, 길어도 이삼주 걸리는 편입니다마는, 이 글은 두세달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그 두세달의 의미가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credit
참고한 텍스트
앙트완 드 생텍쥐페리 - 어린왕자
이상 - 날개
이상 - 이상한 가역반응
이상 - 오감도
이상 - 최후
Gonggonggoo009 - ㅠㅠ
Gonggonggoo009 -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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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 -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테시가하라 히로시 - 타인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