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인 개인에 주목해야 할 때(최종)

by 자체발광

영어는 사람이면 사람, 사물이면 사물 대상 그 자체를 본다. 한국말은 사람과 사람, 대상과 대상, 혹은 사람과 대상 두 대상 사이의 관계를 본다. 영어는 대상을 보기 때문에 그 대상의 이름을 궁금해하지만, 한국말은 두 대상 사이의 관계를 보기 때문에 그 관계를 어떻게 부를건지를 따진다.


예전에 EBS 다큐 프로그램에서 동양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에게 어떤 그림을 보여주고 뭐가 보이는지 그림을 설명해 보라고 했던 걸 봤다. 서양 사람들은 보이는 물건이 무엇인지를 나열하는데, 한중일 사람들은 특정 사물을 기준으로 주변을 설명했다.


한국 사람들은 세상을 독립된 개체들의 집합으로 보는 서양 사람들과 달리 세상을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장으로 보는 동양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갖고 살다 보니 세상을 거대한 장 속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으로 파악하게 되고, 사람 관계도 개인을 개인 개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나와 상대방이 어떤 관계인가를 주목하는 거 같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그 관계 설정을 함에 있어 상대가 나이가 어리면 무시하고, 여자이면 더 무시하고 이런 형태를 취하다 보니 호칭과 지칭 체계가 개판 오 분 전이 된 거다.


언젠가 인터넷상에서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라는 시리즈 기사 중 마지막 편이 올라온 걸 봤다. 댓글이 아주 예술이었다. 그깟 호칭이 뭐가 중요하냐, 혼자 살지 결혼은 왜 했냐,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바뀌는 데 시간이 걸린다, 언어는 흐르는대로 둬야지 인위적으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 여자 하나 잘못 들어와서 남의 가정 파탄냈다는 말에다 욕설까지 난무하며 언어폭력이 가해졌다. 이기사뿐만이 아니고 호칭관련 기사에 달리는 댓글은 지금도 대개 이런 식이다. 누군가의 정체성 고민은 본의 아니게 또 다른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되나보다. 어느 정도의 반감은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정도면 상상초월이다.


호칭 문제를 제기한 그 기사에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한번이라도 고민해봤을까? 내가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그런 험악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내 가족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내 가족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타인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면 이 호칭과 지칭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힘들다.


1. 남성 지칭어는 인간을 총칭한다.

2. ‘아들’은 사람을 총칭한다.

3. 한자에는 '딸'에 해당하는 글자가 없다.

4. 부부(夫婦)란 남편과 여편이 아니라 남편과 며느리다.

5. 형제자매는 형, 아우, 누나, 남자의 여동생만 반영되어 있다.

6. 형제자매는 지칭이고, 형/언니/누나/오빠는 호칭이고 동생(?)은 이름으로 불린다. 지칭과 호칭이 따로 놀고 있으며, 그렇다고 지칭만 취한 상태에서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해 이름으로 부르는 형태도 아닌 일관성이 결여된 형태.


7. 동생은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8. 한국어 호칭과 지칭에서는 나이와 출생순서가 열일한다.


이런 사실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7번과 8번을 뺀 사항들이 여성 차별을 반영한 흔적이다. 7번과 8번이 더해져 한국말 호칭과 지칭은 그야말로 흉측한 괴물이 되었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내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 영혼이 자유로우려면 타인의 존재 범위를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게 호칭과 지칭이 새로 태어나야 되는 이유다.


한국말 호칭이 가족 간 호칭에 머물러 있고 사회적 호칭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없음을 눈 떴으면 좋겠다. 이 나라가 가족이라는 틀에 갇혀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했으면 좋겠다. 제도적 차별이 제거되고 개선된다 한들 일상에서 오고가는 언어가 민주적이지 않은데 내가 사는 사회를 어떻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교는 상하를 지향하고 남녀를 구별한다. 민주주의는, 상호를 지향하고, 남녀를 가르지 않는다. 상하를 따지는 사회에서 상호 간 존중을 아무리 외친다한들 먹히지 않는 배경에는 유교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라는 그릇을 들여와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마치 서당을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가 들어와 덮어씌워졌던 것처럼. 유교라는 음식을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위와 아래를 따지는 유교 문화에 상대와 내가 대등하다는 인식이 바탕인 민주주의가 덮어씌워졌으니 호칭에 대한 혼란을 겪는 건 이미 뻔한 일이었다. 다만, 그게 언제 터질 거냐의 시간 문제였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건 호칭, 지칭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보면 이건 서열을 중시하고, 여자를 인간 취급하지 않는 유교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충돌인 거다. 유교와 민주주의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그릇에 담겨있는 음식인 민주주의 정신을 같이 가져오지 않고 그릇만 가져다 유교라는 음식을 담아내고 있는 현실을 졸업하지 않는 이상 엉망진창 호칭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상을 언제까지고 누려야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무서운 건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는 거.


옷을 사러 가면 '손님'인데 '언니' 소리 듣기 일쑤고, 결혼하기도 전부터 조카만 데리고 나가도 졸지에 '어머니'로 등극하기 바빴고, 식당에서 음식 주문할 때도 '사장님'이라고 부르고(물론, 난 절대 이 호칭을 쓰지 않는다.), 전화기 바꾸러 통신사에 가면 '사모님' 소리 듣고, 선생님 소리는 허구헌 날 듣고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현실은 한국사회가 사회적 관계를 가족 호칭 안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한 나라의 언어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인데 특정 부류에게 특권을 주는 건 말이 안 된다. 나이 따라 춤추는 언어 환경을 손보려면 각자가 나이를 포기해야 한다. 내 나이를 죽여야 한다. 우리가 나이에 예민한 건 나이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내 안의 권위의식을 죽이고 상대와 내가 대등한 존재라는 걸 인식하고 인정해야 답이 보인다. 가 대등한 존재로 만날 수 있는 언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상대방과 내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코드로 접근한다면 나이를 벗어버릴 수 있다.


여성이 부재한 호칭과 지칭, 나이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호칭과 지칭, 사회적 관계가 가족 호칭에 담보잡혀 있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은 한국사회가 개인을 개인으로 대접하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얘기다.


호칭과 지칭을 정리하면서 제일 눈에 들어왔던 사실은 남녀차별적인 관점 혹은 여성 비하 관점 이런 것보다 허망하게도, 부를 말이 없으니까 그때그때 막 가져다 붙였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일관성 없음이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반영해서 오빠의 아내, 언니의 남편, 형의 아내, 누나의 남편, 남편의 형, 남편의 누나, 남편의 여동생/남동생, 아내의 오빠, 아내의 언니, 아내의 남동생/여동생 등등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적용하면 되는데, 조상님들은 그랬다쳐도 대안 호칭을 찾는 작업에 이걸 반영하지 않으니까 이상한 단어만 자꾸 만들어내고 있다. 무엇보다, 상대를 나와 대등한 존재로 보면 답이 간단한데 본질은 놔둔 채로 왜 자꾸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낼 궁리만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현재 언론에서, 여성계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여성이 한수 접고 들어가는 호칭들을 남녀 대비되는 호칭으로 바꿔야한다는 관점이다.


본질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여성차별에 대한 발끈이 아니라 가족에 갇혀 ‘개인’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아가씨, 도련님 이런 말을 아무리 고상한 말로 바꾼다한들 나이와 서열을 벗어던지지 못한 표현이라면 어설픈 호칭일 수 밖에 없다. 각자의 이름을 두고 대안 호칭을 고려하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가져야 된다. 남녀를 떠나 나이라는 권력을 버리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저 복잡한 호칭, 지칭에 대한 고민은 쓸데없는 고민이 되겠다. 너를 너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니까 대안이 되는 말을 찾고 있는 거다.


호칭에 예민한 이유가 시댁과 친정의 차별적인 호칭 때문에 바뀌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안 된다. 무엇이, 왜 그렇게 다양한 호칭을 낳았는지를 봐야한다. you 하나만으로도 인간관계가 탈없이 잘 돌아가는 사회랑 너, 당신, 형, 언니, 누나, 오빠, 선배 등등 이렇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호칭을 달리 해야만 인간관계가 돌아가는 사회, 이 두 사회의 차이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이걸 언어 차이, 문화 차이로만 여겨버린다면 갈 길이 멀어진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2019년 2월) 인터넷에 <도련님 호칭 성차별 vs 단순한 관습일 뿐>이라는 기사가 올라왔고 댓글난에는 별걸 다 가지고 시비라는 댓글이 많이 보인다. 누군가들의 고통을 관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괴로움을 호소해도 귀를 막으면 안 들리게 마련이다.


언어의 부재가 내 삶을 걸고 넘어지는데 아프다는 말조차 할 줄 모르고 오히려 끌어안고 가야할 운명으로 여기는 삶은 가엾다 못해 초라하다. 아무리 개떡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입다물고 살라는 주문은 인간이길 포기하라는 얘기랑 같다.


초등학교 때 옆집에 살던 할머니는 나를 '언년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남자애들은 깔깔깔 웃어대고 놀려대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린 맘에 속상해서 이름을 가르쳐드려도 매번 똑같은 일 반복이었다. 이름이라는 걸 갖고 있지 않던 시대에 태어나 살아오신 분이라 여자에게 이름이 있다는 거 자체에 익숙하시지 않은 분이었다. 다른 두 할머니들은 그나마 좀 떨어진 거리에 살아서 자주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세 할머니에게서 나는 내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없다. 역사 강연에 갔다가 1930년대인가 그때 선교사로 왔던 분이 시골에 가서 200여명이나 되는 여자들에게 이름을 물어봤는데 이름을 갖고 있던 여자가 없더란 얘기를 들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나라 여자들은 이름조차 없었던 거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위스 같은 나라의 여성이 선거권을 획득한 지가 불과 얼마 안 됐다고 얘기하지만, 이 나라 여자들은 선거권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자는 남자 집안에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애낳는 도구였을 뿐이었던 거다. 그런 존재로 살았으니 호칭과 지칭이 이 모양 이 꼴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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