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일 좀 하면 안 될까요?

by 이삼오

"형님 바쁘세요? 이거 악보 뽑았는데 수정해야 할게 몇 개 있는 거 같아서요."



"어. 거기 놔둬. 이따 볼게."



"뭐, 재밌는 거 보세요?"


(형님 컴퓨터 하단에 있는 툴바를 본다. "1박 2일 OO 편")


"아니. 그냥 잠깐 쉬는 거야."



"원장님 오시면 또 한바탕 하시는 거 아닌가요?"



"걔는 예전에 안 그랬는데, 너무 까탈스러워진 거 같아. 툭하면 짜증이고. 여기저기 강의 다니고 해서 피곤하고 스트레스받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나한테 그런 식으로 짜증 내고 하면 안 되지."




원장님은 강의 때문에 바쁘셔서 보통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 오셔서 전공생 수업을 하시고 학원의 전반적인 업무보고를 부원장을 통해 전달받았다. 그러나 매주 오실 때마다 표정이 썩 좋지 못하다.



사무실에서 부원장과 둘이 회의 중이다. 원장님 표정이 좋지 않다. 가뜩이나 미간에 난 11자 주름이 더욱 뚜렷해진다. 100원짜리 동전도 끼워 넣을 수 있겠다. 목소리 데시벨이 살짝 높아진다. 얼굴을 감싸 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나는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눈치만 볼 뿐. 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이 종료되려면 학생이든, 학부영이든, 광고 업체 직원이든, 정수기 업체 직원이든, 누구든 와야 한다.



엇. 누가 왔다.



"이번달 관리비요. 여름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전기요금이 좀 많이 나왔네요."



망했다. 건물 주인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관리비 청구서를 본다. 큰일이다. 전기세가 작살나게 나왔다. 학원은 80평 정도 규모에 중앙에어컨 하나다. 비효율적이다. 각 교실, 연습실에 딱히 사람이 없다면, 소수의 사람은 선풍기로 버텨야 한다. 그러나, 부원장은 혼자 있을 때도 에어컨의 시원함은 포기할 수 없었다.



원장님이 추궁한다. 레슨이나 연습하러 온 학생도 없을 때, 혼자 있을 때, 폭염 주위보 같은 게 뜬것도 아닌데 꼭 저 커다란 덩치를 종일 틀어놔야 하냐고.



"넌 이제 내가 에어컨 트는 것도 꼴 보기 싫으냐?"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하아, 답답해."



"야. 넌 어떻게 생각해? 내가 너무 한 거야?"



(왜 나한테 그러시나?)



"그냥 창문 열고 선풍기 키시죠."



"뭐?! 넌 누구 편인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굳이 물어보셨으니.. 원장님 편이요."



"하아, 답답해."



(한 대 태우기 위해 퇴장)




비공식 흡연 장소에 간다. 부원장은 쉴 새 없이 연기를 뿜어댄다. 옆에 합류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생 다루듯이 좋게 타일러 본다. 얘기도 들어준다. '우쭈쭈. 아, 그랬쪄여. 우리 00이 많이 서운했겠어요. 그래도 그건 좋지 못한 행동이니까 다음엔 이렇게 해봐요.' 단순하다. 좋다고 헤벌쭉 한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뉘우치는 기색은 일도 없다. 그냥 애다.



조금 풀렸는지 두 분 다 화해로 마무리한다. 문제는 이게 매주 반복이다. 계속 이러다가 한 번 제대로 터질 것 같다.



원장님은 숙소를 아직 안 구하셔서 연습실 한편에 라꾸라꾸를 갖다 놓으셨다. 옆에 보면 커피 포트와 사발면 한 박스, 행거와 칸막이 용 커튼이 쳐져있다. 뭔가, 좀 짠하다.




"형님. 며칠 전에 드렸던 악보 훑어보셨어요? 수정할 곳 체크했는데 보셨나요?"



"아, 맞다. 그거. 그게 어딨 더라...?"



(한참을 여기저기 뒤진다)



"하나 더 뽑아주면 안 될까?"



"직접 뽑으세요. 내 수업자료도 아니고 본인이 쓸 건데, 알아서 하세요."




사람은 털털하고 서글서글해서 좋아보인다. 그러나 주어진 업무를 하지 않는다. 상담 때도 왜곡된 사실이 너무 많다. 밑천 다 드러났지만,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대단한 뮤지션이라고 한다. 수강료 관리도 안되고, 전반적인 행정 업무가 되어있지 않다. 하나에서 열까지 뭐가 제대로 되는 게 없다.



도저히 안 되겠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이 학원은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자빠질 거 같았다. 처음부터 뭔가 꼬였다. 엉뚱한 사람을 자리에 앉히면 대참사가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다. 나를 비롯하여 멀리서 오시는 선생님들도 뭔가 이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시작한다. 한 번 붙잡고 얘기해봐야겠다.




"형님, 요새 많이 힘드시죠?"



"집에 가면 와이프는 내내 잔소리고, 수업하랴, 관리하랴, 연습하랴,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미치겠다 아주."



"일이 많이 버거우시면 그냥 강사로 근무하시는 게 어때요? 관리나 학원 행정 업무 전반적인 건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야, 그게 무슨 말인데? 그걸 왜 니가 정하니 마니 하려는 건데? 니가 00이(원장님)한테도 이렇게 얘기했어?"



"아니오."



(실은 원장님은 나에게 이런 얘기를 여러 번 하셨다.)



"내가 강사만 하든, 부원장을 하든 니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일 좀 하시면 안 될까요?"



"나 일 하잖아. 도대체 왜 들 난리지?"



"그럼 원장님이 왜 매번 오실 때마다 오만상 한 가득이시죠? 뭘 대단한 걸 요구하시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걔는 뭘 잘 모르면서 억지 부리고... 자기 스트레스를 나한테 푸니까 나도 안 열받겠나? 그리고 일주일에 한 두 번 오는데, 나 없으면 학원이 아예 안 돌아갈 거라는 것도 알텐데."



"그만하시죠. 수업 때 본인도 못하는 곡들을 학생들한테 던져주고 못하면 나무라고, 연습 안 한다고 혼내고... 본인부터 연습 좀 하시죠. 근무 시간에 예능, 드라마, 영화도 그만 보시고요."



"내가 언제 그랬는데?!"



"매일요. 원장님도 다 아세요. 그런데 옛정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시는 거 같던데..."



"야, 니는 쪼르르 가서 다 일러바치냐?"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보는 눈이 있고 말도 많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개선하시지 않으면 답이 없겠죠."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원장님은 전문 경리 직원을 고용하고 부원장이란 타이틀을 없앴다. 부원장... 아니, 키보드 형님은 이에 노발대발했지만 딱히 뭘 해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이 바닥에 자기를 받아 줄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으니.





누구든 허점은 있다. 누구든 게으를 때가 있다. 누구든 일하기 싫고 퍼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선'이라는 게 있다. 그 선을 넘어 한참을 가게 되면 다시 되돌아오기까지 정말 어렵고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나.





선을 넘어선 키보드 형님은, 선에서 더 멀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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