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생님, 선생님, 친구님, 후배님

by 이삼오

학원 출근. 응? 원장님이 일찍 와 계시네. 수업 중 이신가? 옆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 대학생인가?




(내 레슨 후)


'어? 이 피아노는 누가 연주 하는 거지? 장난 아닌데?'


아까 원장님과 수업하던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Hiromi의 The Tom and Jerry Show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주하는 게 아닌가. 난이도가 상당한 곡인데...


옆에 키보드 형님을 쓱 본다. 굉장히 심각한 표정이다.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이 드나 보다. 한참을 보더니 자리를 뜬다.




원장님: 인사하세요. 여기는 기타 선생님 삼오, 여긴 작곡 전공 하는 000입니다.


(원장님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나에게 존대를 하신다.)



나: 안녕하세요. 연주 잘 들었어요. 원래 피아노 전공 하셨어요?



피아노맨: 아니오. 지금 대학원에서 심리 상담 전공 중인데, 이거 마치면 제대로 음악 전공 해보려고요.



나: 오호, 아까 그 곡 정말 어려운데, 연습 많이 하셨겠어요.



피아노맨: 제가 제일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분인데, 몇 년 뒤 그분이 다녔던 학교에 저도 유학을 갈 계획입니다.


(난 그분을 실제 가까이에서 봤는데...)



나: 아, 그렇군요. 돈 많이 들어갈 텐데... 그래도 좋은 학교이니 갈 수 있으면 꼭 가세요.



피아노맨: 그렇잖아도 원장님께서 선생님도 거기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저랑 나이도 같다고... 제가 궁금한 거 있으면 이것저것 여쭤봐도 될까요?



나: 저야 뭐, 잠깐 다닌 거라서... 도움이 크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나이도 같은데 말 편하게 하시죠... 가 아니라 편하게 할까?



피아노맨: 아... 아.. 그럴까?





학원생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피아노맨은 원장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수강생인 동시에 강사가 됐다. 친절하고 꼼꼼한 성격에 학생들도 잘 따랐고 모두와의 관계도 원만했다. 그러나 이 상황을 곱게 보지만 않는 이가 있었으니...



키보드 형님: 야, 걔 플레이는 어떤 거 같아?



나: 잘하네요. 뭔가 '날 것'의 느낌은 살짝 있지만 이것저것 다 잘하는 거 같아요.



키보드 형님: 터치가 좀 별로인 거 같아. 표현력도 부족한 거 같고. 박자도 여기저기서 나가고.



나:....



키보드 형님: 야, 왜 대답이 없어? 내가 한 말이 맞는 거 같지 않아?



나: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가 보죠.



키보드 형님: 아니, 아까 뭐 연주할 때 들어보니까... 어쩌고... 저쩌고...



나: 그냥, 형님이나 잘하시죠. 멀쩡한 사람 깎아내리지 말고.



키보드 형님: 나도 잘해야지... 그런데 넌 뭐 말을 그렇게 하냐?



나: 그거야 뭐, 형님이 더 잘 아실 테니...




피아노맨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친해진다. 주로 음악 얘기지만 때론 아무 의미 없는 시시껄렁 한 얘기들도 곁들인다.



말투와 이미지가 매우 착하다. 딱 어린이집, 유치원 선생님 같다. 덥수룩 한 머리에, 키 184cm, 등산 바지를 즐겨 입고 해맑은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유치원 선생님...



피아니스트지만, 안타깝게도 다한증이 심하여 연주나 레슨 후 항상 피아노 건반을 닦아 줄 수건을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시간 초과로, 안타깝게 피아노 조율사 자격증을 통과 못했지만 꽤 괜찮은 실력으로 학원 피아노도 조율하는 만능맨이다.




공강 시간에 종종 피아노맨과 합주를 한다. 언제 행사 섭외가 들어올지 모르니 그에 대한 대비도 있지만, '합'이 잘 맞는다. 음악 취향이 조금씩 다르지만 서로 같이 좋아하는 것도 많아서 레퍼토리도 차차 늘려간다. 여러 사람과 연주해 본 바, 실력이 다 가 아니다. 서로 소통이 잘 되는 게 중요하다.



*눈 빛 교환 중



(피아노맨: 내가 솔로 너무 많이 돌리고 있나? 끊을 까?)



(나: 아니. 하고 싶은 만큼 해. 오늘 연주 빨 좀 받나 보네. ㅎㅎ)



(피아노맨: 오랜만에 손가락이 좀 돌아가네. ㅎㅎ 그럼 한 코러스만 더 하고 네가 넘겨 받어.)



(나: 오케. 나 솔로 끝나면 바로 멜로디 들어갈게.)



(피아노맨: 콜.)



*입모양



(나: 엔딩은 마지막 네 마디 두 번 돌릴게.)



(피아노맨: 그럼 나도 멜로디 같이 돌릴게. 마지막 음에서 딱 끝내자.)



*연주/합주 알차게 끝.




이렇게 피아노맨과 둘, 혹은 여건이 되는 다른 뮤지션들이 때때로 합류하여 각종 행사를 치른다.



결혼식, 기업 송년회 및 이벤트, 지역 축제, 학교 축제, 레스토랑 이벤트, 와인 파티 등 돈 되는 행사, 안 되는 행사 가리지 않고 즐겁게 연주한다.




키보드 형님이 은근 신경 쓰인다. 합주나 연주 때 도저히 참다 참다 안 돼서 다시는 같이 뭘 안 한다고 했지만, 정이라는 게 무서운 건지... 슬쩍 얘기해 본다.



"형님. 이번에 결혼식 하나 있는데 같이 하실래요? 두 곡이면 된다는데."



"난 이제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 집중하려고."



"그냥 간단한 가요 두 곡인데요? 페이도 괜찮은데."



"그냥, 너희 해라."



(하아... 역시나... )



간단한 곡 반주만 하면 되는데 이것도 안 되니... 이제 더는 없습니다.






피아노맨은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어 간다. 원장님 께 수업받은 내용을 착실히 공부하고, 본인도 가르치면서 더 늘고, 학생과 선생님 둘 다 윈윈이 되는 좋은 그림이다. 원장님이 피아노맨에게 슬쩍 제안을 하신다. 전공생도 맡아보면 어떻겠냐고. 극구 사양한다. 본인은 아직 음악 전공자도 아니고 한 참 모자라다고.



그런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무대나 합주 경험도 풍부하고 실력도 좋고, 몇몇 전공생들도 조언이나 수업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는데... 심지어 간단한 가요 반주도 못하는 사람도 전공생을 혼내는 촌극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이 친구는 비교적 일찍 결혼 후 제대로 유학 준비를 시작한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



그리 심하지 않은 적당한 건망증과 어딘가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어리바리해 보일 때도 있는 이 친구가 내심 걱정됐다. 뭐랄까, 호구되기 좋은 조건이 좀 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가자마자 중고차 덤탱이 맞고 또 그걸 바로 도난당했으니...ㅠ)



그래도 나름 재밌게 잘 지낸 거 같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카톡으로 꾸준히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나는 친구를 통하여 나에게 많은 추억과 아쉬움이 있던 보스턴에서의 기억을 전달받기도 했다.



한국으로 컴백 후 활발한 작업 활동과 강의를 이어나간다. 나와 이 친구, 비지 형님 이 셋은 좋은 동료이자 술친구로 좋은 관계를 숙성시켜 나아간다.



피아노맨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겨 지내지만 음악인으로 여전히 바쁘게 지낸다.



며칠 전에 톡이 왔다.





"조만간 감자탕에 소주 한 잔 하면 좋겠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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