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도 갔다 오고 맥도널드도 먹어보고 하키 스틱도 잡아보고 동네 어르신들이랑 가벼운 대화.. 라기보다 인사도 해보고, 내 캐나다 생활에 자신감이 생겼다.
'흥! 뭐 별거 없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아무리 생각해도 만 10세가 할만한 생각은 아니다. 이제 꼴랑 두 어달 됐을까? 앞으로 이 낯선 곳에서 살아갈 1000 분의 1 도 경험 못 했는데.
어느 날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 흠, 우선 아버지는 한국에 있고... 동생과 어머니는 산책이든 외출이든 일 테고, 그럼 할머니는? 할머니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외출? 고든 램지한테 파인애플 피자 한 조각 잡숴보라는 것만큼 황당한 일이다. 뭐, 안 친하다는 얘기다.
불안하다. 할머니를 찾으러 집을 나섰다. 아파트 단지부터 돌아다닌다. 웬걸? 현관을 나서고 얼마 후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수영장 쪽에서 나는 소리 같다. 그쪽으로 향한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계신 할머니 두 분과 맥아더 파이프 담배를 물고 계신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인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할머니도 보인다.
왜 여기 계신 거지? 신기한 건 할머니를 포함 모두 해맑게 웃고 계신다. 무슨 상황이지? 조금 더 가까이 가본다. 할머니가 계속 뭐라 뭐라 얘기하는 거 같은데... 다른 어르신들도 주거니 받거니 모드인데... 그런데 할머니는 영어를 못 하는데... 더 가까이 가본다.
어이가 없다. 할머니는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한국말로, 다른 분들은 그냥 영어로, 각자의 방식으로 대화 중이다.
"일어난겨? 할머니 찾으러 냐온 겨?"
"할머니. 여기서 뭐 해? 빨리 가자..."
"가긴 워덜 가? 재밌게 놀고 있는디?"
"아.. 빨리 가자. 창피하게 뭐야?"
(갑분 내 소개)
"얘가 우리 손주유. 말 못 하는 바보는 아니구유, 아직 여덜 말을 못 배워서 그류. 제법 똘똘해유."
(놀랍게도 어르신들 알아들으신 듯...)
"아! 빨리 가자니까! 창피하게..."
"지 아베 닮아서 가끔 참 지랄 맞다니께 그려..."
"그런데, 할머니는 저 사람들 말 알아들어?"
"대충은 알겄어."
"어떻게? 영어 모르잖아."
"죽을 만치 살다 보면 뭐든 아능겨."
그렇다.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느낌과 말투만 진심이면 다 통한다. 유대인이 많은 동네라. 아마도 유대인 어르신들이 아닐까 한다. 한이 많은 민족이다. 그래서 통하는 걸까?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 학교에서 영문도 모른 채 한국어를 쓰면 안 됐고 읽고 쓰기는 일본어로 해야 했다. 대혼란의 유년기다. 세계 2차 대전이 한창 일 때 시집을 가서 해방 후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자식들 몇을 먼저 하늘로 보낸 뼈에 사무친 아픔도 있다. 먹고 살만 해지니 남편을 지병 때문에 재산을 병원비, 약 값으로 다 탕진하고, 또 먹고살만해지니 본인이 암으로 고생하고, 또 먹고살만해지니 엉뚱한 나라에 와 있고...
누가 문을 두드린다. 경준이다. 심심한데 나가 놀잔다. 그런데, 내가 집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몰랐단다. 그냥 집에 없으면 혼자 대충 놀다 부모님 식당에 가려고 했단다.
테니장 앞에서 캐치볼을 한다. 이 녀석은 자기 글러브를 들고 나왔다. 내가 글러브가 없는 걸 알고 성준이 형 글러브를 들고 나왔다. 배려남에 센스쟁이다. 젠장. 나한테 너무 크다. 성인용 글러브다. 배려남은 맞고 센스쟁이는 아니다. 경준이는 나보다 손이 훨씬 더 커서 대신 성준이 형 글러브를 쓸 수 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경준이는 왼손잡이다. 나는 그냥 맨손으로 하기로 한다. 그래도 다행이다. 테니스 공 이기 때문이다.
한참 재미있게 캐피볼을 하고 있는 중 저 멀리서 남자 애들 둘에 여자 애들 둘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보아하니 전에도 한 번 마주쳤던 애들 같다. 경준이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아무래도 여기 단지에 사는 애들 같은데 경준이랑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다.
남자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경준이는 계속 가라고 하는 거 같다.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서 뭐라고 계속 말을 건다. 경준이도 뭐라고 한다. 무슨 얘긴지 도통 모르겠다. 언성이 높아진다. 경준이가 이 아이를 밀친다. 서로 밀치기 시작한다. 경준이가 글러브를 벗어던지고 제대로 붙으려고 한다.
아... 이 상황이 너무 싫다. 그런데 보아하니 저 애가 계속 시비 걸면서 집적거리는 거 같다. 경준이 한테 물어보지만 별 대답은 없고 짜증만 낸다. 저 시비남은 갈길 가는 거 같더니만 다시 와서 우리의 캐치볼을 방해한다. 경준이는 또 글러브를 벗는다. 벤치클리어링 상황이다. 그런데 시비남은 호리호리해서 그런가 잘도 도망간다. 가만히 있는 우리를 건드린다는 생각에 나도 갑자기 욱한다. 하필.. 바닥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줍는다. 도망자에게 힘껏 던진다. 이 녀석 오른쪽 귀를 스치고 간다. 멈칫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나에게 향해 질주한다. 하아... 그냥 갈 길 가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그래. 너도 잘못했지만 나도 잘한 건 없지. 너한테 돌을 던졌으니. 그런데 정통으로 맞진 안았자... 흐억...!' 하고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다.
언제 내 앞에 도착했는지도 모르는 그 아이는 왼발 밀어 차기를 내 명치와 갈비 사이 어딘가를 제대로 명중시켰다. 순식간에 나는 옆으로 뻗었다. 숨이 막혔다. 열라 아팠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러나 나도 잘못을 인정했다. 옆으로 벌러덩 쓰러진 채 앞을 응시한다. 경준이가 이 녀석을 향해 여러 콤보를 날리는 중이었다. 좀 싸워본 솜씨였다. 시비남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도망가기 시작한다.
아직 푹신한 잔디 옆에 뻗어있던 중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 소리다. 아침에 들었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아니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들려온다. 할머니가 무서운 기세로 손짓과 고함을 지르며 빠르게 걸어온다. 누가 말릴 수 도 없는 기세로 말이다. 옆에 어머니도 보인다. 상당히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할머니가 내 상태를 본다. 티셔츠를 들춰 본다.
"뒤질 정도는 아닌가벼."
한마디 하고는 시비남이 도망가는 길을 따라간다. 시비남이 멈춘다. 할머니가 시비남에게 뭐라고 계속 고함을 지른다. 혼내시는 거 같다. 경준이도 옆에 합류한다. 나도 몸을 추스르고 합류한다. 어머니와 동생은 저만치서 구경한다.
할머니는 한국말로 혼내는 동시에 타이른다.
"니가 사람헌테, 그것도 내 손주한티 발길질 해대면 써~ 못 써? 잉?! 이런 쌍놈의 시끼. 사이좋게 지내야 할꺼 아녀~!"
얘도 억울한 듯 돌을 쥐면서 내가 자기한테 돌을 던졌다고 시늉한다. 할머니가 추궁한다.
"니 얘 헌티 돌 던졌능겨?"
"어.."
"맞아도 싸긴 하네 그려... "
어쨌든 나와 시비남은 화해했지만 경준이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 거 같다. 그냥 무시하고 돌아섰다.
각저 집으로, 밖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나니 허기가 졌다. 그런데 밥 냄새고 뭐고 없었다. 슬펐다. 내가 잘한 건 없지만... 눈물이 앞을 가린다. 별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막 서러웠다. 시간이 좀 지났다. 할머니가 내 옆에 와서 부른다.
주방 쪽으로 간다. 커다란 유리 냄비가 놓여있다. 뭐지? 국수다. 국물은 졸아서 있는 둥 없는 둥 했고, 불은 멸치 몇 마리가 보였고 김치도 보였고 표고버섯도 보였다.
"할머니가 했어?"
"그럼 누가 했겄냐?"
"재료들은 어디서 났어?"
"몰러. 집에 있든디?"
"그런데 국물도 없고... 면은 다 불어 터졌어."
"왜 그려? 맛이 읎어?"
"아니.... 정말 맛있어."
"왜 울고 그려? 자, 코 한번 킁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세 개는...
벌레,
탄 고기,
퉁퉁 불은 면...
그러나 할머니의 국수는 정말 맛있다. 가끔씩 끓여주던 라면도 퉁퉁 불은 라면이다. 내 손으로 하라고 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푹 불어버린 면을 먹을 바에 차라리 버리고 만다.
왜 이렇게 불어 터진 면을 싫어할 까...
꼬맹이가 무슨 미슐랭 혓바닥을 가지고 태어난 걸까 아니면 유독 식감에 예민함이 타고났던 걸까?
불은 면이 이 날을 기억하게 해서?
할머니의 사랑이 담긴 국수...
아픔과 고통이 있을 땐 별거 아닌 걸로도 치유가 되는 것인 가?
내 갈비뼈와 명치 중간 어디쯤엔 가에 붉게 까진 상처가 보였다.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불어 터져 버린 면발과 전분 가득한 짠 국물이 몸과 마음의 위로가 된 것일까?
쓸쓸하거나 우울할 때면 생각나는 게 똥 안 뗀 통멸치와 너무 쉬어버린 김치가 들어간, 불어 터진 국수다. 멸치랑 김치는 어떻게 든 해보겠다. 그러나 면은, 내 손으로 불릴 용기가 전혀 나질 않는다.
앞으로 평생, 면을 퉁퉁 불릴 용기가 안 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