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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삼오 Oct 22. 2024

작전명 "슈퍼 100"

방학도 슬슬 끝자락을 향해서 가고 있다. 심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머니가 어디서 구했는지 영어단어라도 외우라고 단어장을 줬다. 영한사전, 한영사전, 단어장, 공책과 연필, 지우개랑 시간을 보내는데도 한계다. 그렇다고 경준이랑 노는 것도 쉽지는 않다. 과외하느라 바쁘단다. 수학, 영어...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논술 일 테고, 숙제도 많단다. 역시, 강남 8 학군 출신답다. 한국이든 캐나다이든, 사교육이란 사슬은 태평양 건너 멀리까지 따라왔다.



친구가 많기를 하나, 말이 잘 통하기를 하나, 그렇다고 혼자 어딜 갈 만한 데가 있나... 그날이 그날이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다. 





"하아, 화장실 가서 좀 하라니까."



어머니가 한숨과 동시에 짜증 한가득 섞인 말투로 내뱉는다. 동생은 이제 슬슬 기저귀 떼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녀석은 기저귀를 채워 놓으면 여기저기 자유롭게 오줌을 갈긴다. 그렇다. 카펫에 그대로.



우선 물걸레로 박박 비비면서 닦고 세제를 뿌린다. 조금 기다린 후 마른걸레로 또 비빈다. 즉시 발견 했다면 별 얼룩 없이 카펫은 원상복구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골든 타임을 놓칠 때가 많다.



이 문제의 원인 제공자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것인지 오줌을 한가득 바닥에 지려놓고 해맑게 씩 웃는 게 아닌가. 꼭 '더 열심히 한 번 박박 문질러 보세요'라는 눈빛을 보낸다.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누구랄꺼 없이 사건 발견자가 수습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옆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고상하고 세련되고 아늑한 느낌을 주던 카펫은 점점 여기저기 이상한 얼룩들로 물들게 된다. 게다가 정체 모를 냄새도 동시에 베개 된다. 신선한 소변향으로 시작해서 찌린내와 세제 향으로 뒤 섞이고 또 이걸 덮기 위해 방향제 코팅을 한다. 끝에 남은 냄새는 악취도 아닌 가향도 아닌, 성숙하지 못한 암모니아와 오렌지 계통의 산뜻한 씨트러스가 마지못해 서로 동행할 수밖에 없는 냄새가 집안 한 가득이다. 



다행인 건, 이 횟수가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아버지가 한국으로 출국 전 필요한 게 있는지 목록을 만들어 보라 했다. 어처구니없는 리스트다. 


-야구 배트

-야구공

-야구 글러브

-요요

-트렌드가 지났지만, 팽이들 (수박팽이, 호박팽이, 별팽이, 올림픽)


아버지는 한 번 쓱 보고는 별말 없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대략 한 달 후, 목록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그나마 현실성 있는 글러브다.



내 작은 손에 제법 잘 맞는다. 다행이다.






이제 글러브도 있겠다 경준이와 그동안 테니스 공으로 캐치볼을 하던 것을 진짜 야구공으로 바꿨다. 묵직했다. 정말 집중해야 한다. 딴청 피우다 이거에 맞으면 열라 아플 거 같다. 몇 번 놓쳐서 쇄골, 가슴, 어깨, 무릎에 번갈아 맞아본다. 역시, 예상대로 드럽게 아프다. 그렇다고 살살 만 던지면 재미없다. 





이제 곧 개학이다. 걱정보다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다. 아니면 이 심심한 준칩거 생활에 끝이 보여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들어온 지 얼마 됐다고 또 한국에 가봐야 한단다. 대체 무슨 일이 그리 있는 건지, 물어본다. 역시, 간단한 대답. 


"일이 있어서."





할머니는 요새 부쩍 말이 줄었다. 내가 먼저 재잘재잘 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라서... 그냥 그러려니 한다. 할머니 얼굴을 보면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근심도 아닌 그렇다고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 무언가 할 말은 많은 데 굳이 안 하려는 그런 표정이다. 



얼마 후 알게 된다. 아버지가 한국에 다시 가는 거는 할머니를 다시 한국으로 에스코트하는 미션 때문이다.



응? 그런데, 같이 살기로 한 거 아니었나? 갑자기 왜냐고 물어볼 수 도 있지만 묻지 않았다. 안 물어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일 것이다. 



실은 나도 어리지만, 왠지 할머니가 여기에 평생 살지 않을 거라고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안 갔으면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는 게 당신에겐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도 알고 있었다. 여기 환경이 할머니에게 많은 불편을 주고 있다는 것을. 



무뚝뚝 한 아들, 그나마 덜 무뚝뚝 한 큰 손자,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작은 손자, 살갑지 못한 며느리와 살갑지 못한 시어머니와의 냉랭한 관계, 대중교통으로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는 성당, 말이 안 통해도 통한다는 동네 어르신들과의 한계적 우정, 이 외에도 한 50가지 넘는 다른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할머니의 알 수 없는 표정은 우울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손자와 헤어짐이 다가온다. 




오 남매 중 유일한 아들, 또 그의 아들,  바로 나다. 



할머니 세대는 어쩔 수 없이 남아선호사상이 강하다. 모든 손자 손녀를 예뻐하지만 내가 항상 1순위다. 모든 게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 



서울에서 할머니와 살 때 다른 손자들과 손녀들이 오면 항상 야쿠르트를 줬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주지 않았다. 손자 손녀들이 다 가고 나면 그제야 냉장고 한편에 검은 봉지에 숨겨진, 그때 당시 신상인 떠먹는 요거트 '슈퍼 100'을 꺼내 줬다. 난 VIP다. 





이제 불은 국수는 누가 삶아 주지? 참치랑 들기름 넣고 지진 김치는 누가 해주지? 혹시라도 내가 또 처맞을까 봐 집 창문 밖을 매의 눈으로 감시는 누가 해주지? 자기 전에 별 거 없는 시시껄렁한 대화는 누구랑 하지? 드래곤볼이랑 지아이조 친구들?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할머니와의 작별 D-day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왔다. 



모두 공항에 안 가고 아버지와 할머니 둘 만 떠난다. 아쉽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니까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다. 



희한하다. 동생이 울기 시작한다. 그렇다. 지난 몇 달 사이 할머니와 부쩍 친해졌다. 이 녀석도,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꼬맹이어도 헤어짐의 아쉬움을 아는 모양이다. 나는 막상 덤덤하다. 이미 마음속에 준비를 오랫동안 하였던 터라, 그냥 무심하게 할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할머니는 별말 없이 아주 해맑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해맑다 못해 크게 웃는 모습으로 손을 흔든다. 아마 할머니가 이렇게 환한 웃음을 본 건 같이 '유머일번지'를 볼 때 이 후로 처음인 거 같다. 그리웠던 고국에 돌아가는 게 기쁜 걸까 아니면 슬프지만 손자 앞에서 내색을 안 하는 걸까?



그렇게, 허무하게 작별했다.





방에 누웠다. 옆에 아무도 없다. 그렇게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은 한 없이 크게만 느껴진다. 천장만 뚫어져라 본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이제 할머니가 없는 나의 삶, 나와 내 주변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화목하지 못한 가족으로 쭉 살아가야 하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예전처럼 눈치 볼 것 없이 맘 편하게 최선을 다해 싸울 건가?



할머니가 해줬 던 음식을 내가 좀 따라 해 볼까? 그럼 좀 위안이 될까?



무조건적인 나의 보호막이 사라졌으니 또 열심히 눈치를 살펴야 하나?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런데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너무 싫다. 난 아직 꼬맹이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 의견과 생각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학교를 가니 잡생각은 하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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