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삼오 Oct 25. 2024

안면인식장애

1993년 9월, 5학년의 첫날이다. 이제 더 이상 깍두기가 아닌 정식 멤버로 본게임에 들어왔다.



나의 성격은?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고집 세고, 까탈스럽지만 츤데레의 면모도 있다.


나의 사교성은? 하, 아니면 중


나의 외모나 전반적인 호감도는? 흠, 중?


나의 자신감은? 하


나의 운동 신경은? 중


나의 학습 능력은? 중


나의 영어 실력은? 극하


나의 특기는? 그림은 쪼금 잘 그린다. 세계 수도를 거의 다 외운다.



슬기로운 학교 생활을 하기엔 적합하지 못 한 이력이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 모든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 도착해 건물 앞,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



아이들은 서로 반가운지 쉴 새 없이 인사를 하고 끊임없는 수다의 장이 열린다. 손동작부터 표정까지, 표현력이 정말 풍부하다. 말을 아예 안 하고 표정과 손동작 만으로 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다.



누군가 나에게 온다.



'나한테 오는 건 아니겠... 하아, 그냥 오지 마. 영어도 못하고 할 수 있어도 안 할 건데.'



다행이다. 4학년 끝자락을 찔끔 맛볼 때 알게 된 '레니'다.



반가웠다. 나에게 긴 말을 건네지는 않는다. 그냥 익살스러운 표정, 몸 짓으로 소통한다. 어차피 나한테 말 걸어 봤자 원하는 답도 얻을 수 도 없고, 현명한 소통 방식이다. 짜쓱.






반배정 과정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누가 따라오라는 데로 따라간다. 그냥 아무 데나 앉는다. 교실이 아담하다. 책상도 한국처럼 모두 앞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분단 형태로 짜여 있다.



근데, 경준이는 안 보인다. 다른 반 인가 보다. 괜히 불안하다. 나를 도와줄 친구가 없다. 어쩔 수 없다. 언젠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 한국에서 5학년 1학기(생일이 빠르다)까지만 학교를 다녔지만 무려 네 군데의 국민학교를 다니지 않았는가, 적응의 아이콘이다. 말 수가 적은 아이지만 말 빨은 있다.



그런데, 젠장. 말을 못 한다. 벙어리 아닌 벙어리다.





선생님이 들어온다.



어? 4학년 때랑 같은 선생님이다. 올 해엔 5학년을 맡았나?



선생님이 자기소개를 한다. 뭔가 이상하다. 4학년 때 선생님은 잠깐 봤지만 이름이 길었던 거 같은데 이 선생님은 짧다.



혼란에 빠진다. 뭐지? 개명했나?



짧은 금발과 짙은 갈색이 섞인 곱슬머리? 파마머리에 흰 피부에 블라우스에 롱치마...



우선 잠정적 결론, 다른 사람이다. 눈썰미 좋은 내가 잘못 알고 있었을 거라고 쿨하게 인정한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차갑다... 목소리도 까랑까랑. 영어도 못 하지만 왠지 알아듣는 거 같다.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갑자기 나를 가리키더니 나오라는 손 짓을 한다.



'하아, 제발요...'



순순히 나간다. 눈치로 봤을 때 애는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니 잘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다.



박수를 친다. 아이들도 친다. 나도 모르게 꾸벅하고 인사한다.





얼핏 보니 4학년 때 잠깐 봤던 아이들도 더러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는 거 같다.



대략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거 같은데, 동양인도 보이고, 레니도 보이고, 금발 파란 눈도 제법 보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들도 보인다. 신기하다. 몇몇은 똑같이 생기고, 몇몇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아이들은 모두 영어로 소통을 하고 있으니...





점심시간이다. 얼굴 몇 번 봤다고 아이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얘가 우리 반 애 맞나? 이름을 붙여 인사해 본다.


"노! 댓츠 낫 미!"


어라? 아닌가? 다른 아이로 착각한 모양이다.


다른 친구가 인사한다. 나도 이름을 부르며 인사한다.


"노. 댓츠 낫 미. 댓츠 힘."


아, 또 실수. 왜 이 애가 저 애 같고 저 애가 이 애 같을까?



동양 아이들은 정확히 알겠는데, 서양사람들이 동양사람들을 보면 이런 느낌인가?





인사 전략을 바꾼다. 당분간 이름을 부르지 말자.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 호명할 때 집중하자.



그런데, 대부분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종이 한 장을 꺼낸다. 교실 도면과 책상 위치를 그린다. 아이들 이름 철자는 모른다. 그냥 한국어 발음대로 적기 시작한다. 절반쯤 완성이다.



내가 너무 초롱 똘망하게 집중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뭐 하고 있나 와서 본다.



종이를 한 참 보더니 나를 빤히 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고는 돌아선다.





ESL시간이다.



어?! 담임선생님이 왜 여기에...?



짧은 금발과 짙은 갈색이 섞인 곱슬머리? 파마머리에 흰 피부에 블라우스에 롱치마...



아니지, 아니지... 자. 숨은 디테일을 한 번 보자. 하아, 이거 뭐 틀린 그림 찾기도 아니고.



목소리가 다르다. ESL선생님은 저음에 허스키 한 톤이다. 그리고 눈 화장이 매우 짙다.



다행이다. 모양새는 구분 못해도 귀는 예민해서... 오히려 사람 목소리로 누가 누군지 구분하는 게 더 빠를듯하다.




별 탈 없이, 별 기억이 없이 몇 주가 지났다.



내가 그토록 우려했던 '억새 바람'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이다. 앞으로도 쭉 평화로운 학교생활을 기대해 본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언젠가부터 두 녀석이 나를 보는 눈 빛이 예사롭지 않다.

이전 11화 작전명 "슈퍼 10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