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도 보아하니 영어를 못하는 거 같은데... 그런데 학교에서 가장 인싸로 보이는 형들과 풋 하키 (테니스 공으로 하는 축구)를 하면서 웃고 즐기는 게 아닌가.
좋은 성격과 붙임성으로 사람과 친해지는 건 언어와 별개의 문제인가 보다.
그런 성격의 형이니 나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형네 집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고 이민 오자마자 한인 성당 복사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복사. 미사 때 신부님 곁에서 보조하는 일을 수행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부님의 비서다.
"야. 복사단에 함 와볼래?"
"어... 나 가도 돼?"
"그럼. 와서 형들한테 잘하고, 신부님, 수녀님 한테도 깍듯이 해."
솔직히 나는 어릴 때 복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어차피 매주 가는 미사, 신부님 옆에서 멋진(?) 사제 옷 비슷한 거 입는 게 별 이유 없이 멋져 보였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 내심 복사는 나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잦은 이사와 전학, 나이도 애매하고, 막상 한국에서 어디 한 군데 쭈욱 엉덩이 붙이고 살일이 없었던 내게 마침 캐나다에 와서 기회가 생긴 것이다.
"복사단 모임은 매주 토요일이야. 장소는 성당 회관."
성당과 성당 회관은 보통 같이 있기 마련이지만 여기 한인 성당은 세 들어 있는 상황이기에 성당 건물, 성당 회관은 서로 멀지 않게 떨어져 있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 전차를 타야 하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오히려 집에서 먼 게 나한테는 다른 의미로 더 이득이었다.
집구석에 있어봐야 내가 종일 공부를 하지 않는 이상, 집이란 나에게 그렇게 유쾌한 공간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집은 쉼터 이자 기댈 수 있는 안식처이지만 나에게는 때론 전쟁터 같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고, 며칠 째 이어지는 냉랭한 침묵, 언제 또다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안고 사는 느낌.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서로 안 맞으면 굳이 같이 살게 있나...라는 생각을 꽤나 오래전부터 했으니, 나에게 집은 그냥 추위와 더위, 야생 동물이나 짐승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매우 단순하고 원초적인 공간이다.
복사 모임 첫날이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형 셋, 두 살 많은 형 둘, 한 살 많은 형 하나, 그리고 나까지 포함하여 총 일곱 명이었다. 몇명 더 있지만 매주 나오지 않고 들쑥날쑥 하단다.
복사 단장은 대학생 형이었는데 아주 어릴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서 캐나다로 또 이민 왔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지리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 아닌가. 궁금하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마라도나, 탱고, 후안과 에바 페론,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사도....
조금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캐나다에는 남미에서 2차 이민을 온 한인들이 제법 많았다. 60, 70년대 남미 경제가 호황을 누릴 때 갔다가 분위기가 꺾기고 어려울 때, 북미가 호황인 틈을 타 이민을 온 것이다.
한 번 고국을 떠나 이민을 결심했으니 북미로 이주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당에도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볼리비아, 페루, 브라질로 이민 갔다가 또 캐나다로 이주해 온 형들 누나들이 있았다.
가끔 이 형, 누나들이 모여 있을 때 서로 스페인어로 얘기하는 게 정말 신기했다.
모임의 취지는 내일 복사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와 성경 공부를 비롯해 인성교육 같은 게 진행 됐다. 대부분은 복사 단장 형 아래 진행 됐고 수녀님도 중간쯤부터 참여해서 지도하셨다.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 피자 파티.
모임이 공식적으로 끝나고 나면 수녀님과 신부님의 넉넉한 지원 아래 피자를 먹는 것이다.
맥도날드 피자가 나에게 큰 임팩트를 주었다면 복사단에서의 피자는 제대로 된, 성숙한 본 게임에 들어선 것이었다.
피자가 오고 박스가 열렸다.
푸짐했다. 피자를 보고 오금이 저렸다. (이게 그렇게 까지 그럴 일인가?) 온갖 토핑이 다채롭게, 무질서하게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동그란 턴테이블 위에 누가 제대로 의도한 행위 예술을 한 듯, 원판 위에는 별의별 색깔의 토핑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양이 엄청 많았다. 나 혼자 7 조각 정도 먹은 거 같다.
복사단에서 피자 먹는 규칙이 있다. 첫째, 꼬다리 (크러스트)까지 다 먹는다. 둘째, 절대 남기지 않는다.
그런데, 양이 많아도 남을 일은 없을 거 같았다. 한창 클 나이의 아이들 7명씩이나 모였으면, 남아나질 않았다. (실제로 모임 마치고 햄버거나 다른 간식을 더 먹을 때도 있었다)
복사단 형들의 개성은 다들 강했다.
나와 H형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민 온 지 3,4 년 정도 됐다.
다들 한국 음악, 드라마, 멋 부리는 거와 이성에 관심이 많은 전형적인 사춘기 소년들이었다.
공통적으로 야구와 하키보다는 농구를 좋아했고 실제로 복사 모임이 마치면 인근에 있는 학교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즐겨했다.
이들은 나에게 친절하고 잘 대해 줬을 까?
뭐, 전반적으로 그럭저럭 잘해줬다.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그렇다고 쌀쌀맞게 대한 것도 아닌, 같은 '복사단'이라는 공동체 멤버로서 나름 프로페셔널(?) 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도 애교 많고, 먼저 다가가 엥기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형들은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들 같아도 미사 때 복사를 설 때면 누구보다 진지했다.
무대(?) 위에서 모습과, 연습 때와, 또 백스테이지 때 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카리스마였다.
한국에서는 보통 동네마다 성당이 있으니 미사 때 참여하는 신자들의 수가 거기서 거기라면, 여기는 어지간한 한인 천주교인들이 다 모여있으니, 규모가 엄청났다.
내가 어린 나이에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이 강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부모의 강제성도 없었던, 영적으로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신앙생활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동안 소속감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던 공동체 생활을 함으로 써 내가 이제 어딘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하나만으로도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