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양의 눈이 쌓인 채로 봄을 맞이했다. 말이 봄이지 체감상 겨울이었다. 날씨가 너무 변화무쌍하여 가벼운 스웨터만 걸쳐도 되는 날이 있는가 반면 어느 날은 한 겨울 때처럼 중무장을 하고 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부터 나에게 생긴 습관은 일어나자마자 날씨부터 챙겨 보는 것이다.
이민 오고 계절이 몇 번 바뀔 때쯤 되니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영어가 들리고 말문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엄청난 노력을 했냐고? 그건 아니다. 그냥 좋아하는 만화 실컷 보고, 경준이 말 따라 하고, 말이 되든 안 되든 반 아이들에게 말 걸고, 담임 선생님 말 경청하고, ESL선생님이 하라는 거 하고... 애써 더 잘하려고 발버둥 치지는 않았다. 책에서 모르는 건 사전 찾아보고, 쓰기 과제는 한영사전 뒤져가며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을 나열하고, 지우고 고치고... 아니다. 잘하려고 발버둥 친 거 맞다.
몇몇 친구들은 참 고마웠던 게 내 언어 능력이 달리니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했다. 숙제 같은 거나 학교 소식이라던가, 그래도 내가 뭐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됐다.
담임 선생님은 내가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과제 수행이라던지 쪽지 시험 같은 거에 핸디캡을 주지 않고 공평하게 평가했다. 봐주는 거 없다. 선생님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답답한 건 나니까 내가 따라갈 수밖에..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들이 뭐가 있을까?
날씨, 날짜, 시간, 숫자, 색깔, 사물 이것저것... 정말 필수적인 것들, 그런데 필수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배워도, 외워도 끝이 없다.
그런데 그다지 큰 노력이나 머리를 쥐어짜듯이 공부를 안 해도 쉽게 습득되는 게 있었으니, 욕이다.
왠지, 나이가 어릴수록 욕에 관한 흥미가 높은 거 같다.
누가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는 영역이다. 어지간한 가정에서는 아기 때부터 예쁜 말, 고운 말을 가르치고 쓰게 하지만 실전 세계는 녹록지만 않은 게 현실이다. 아름다운 말을 쓸 상황이 훨씬 더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특히 낯선 환경에서는 경계심이 더 상승하게 된다.
나는 어리고 약한 존재이니, 욕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수단일 수 도 있겠다. 개가 미친 듯이 짖고 난리 치면 피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듯, 혹시 모를 무엇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지 않겠나.
학교에는 2개 국어, 좀 더 나아가 3개 국어를 하는 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나는 한... 1.2개 국어 정도 하는 수준인 거 같다.
가뜩이나 다른 동네 역사나 지리에 관심이 많은 나인데 그 언어들에 흥미까지 생겨버렸다.
쉬는 시간, 누군가 나에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온다. 같은 반 아이 '일라이'다.
지난번 인사한 레바논 패밀리 중 한 명, 선생님께 자주 혼나는 요주의 인물 중 하나다. 인상만 봐도 말 드럽게 안 들을 마스크를 지니고 있다.
나에게 다가와 뭐라 뭐라 하는데 영어는 아닌 거 같고 자기 나라 말 같은데, 나는 계속 'what?'만 연신 대답했다.
나의 어리둥절 한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이 깔깔 거리며 좋아라 한다.
'흠, 나를 놀리는 건가? 그런데 왜 굳이 영어가 아니라 아예 못 알아들을 말을?'
내가 잠시 멍 때리는 순간 나에게 다시 오더니 덥석 내 손을 잡는다. 그러더니 내 손으로 주먹을 만들더니 가운데 손가락만 쫙 펴준다.
"이게 레바논 말로 빠큐야. 큭큭큭큭. 하하하."
오, 그래? 나도 잘 알지, 빠큐. 한국에 있을 때도 동네에서 선풍적인 (?) 인기를 누렸던 그 미국욕...
뭔 뜻 인지도 모르고 다들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며 여기저기 빠큐 거리고 다녔지만, 막상 어른들도 저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겨운 엿을 자유롭게 날리곤 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의 가운데 손가락의 존재를 이 레바논 형제가 다시 깨워 주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나에게 한국어로 빠큐가 뭐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가만 보자... 흠, 뭐지? 직접적인 단어가 있나? 아, 이게 제일 가깝겠다.
'ㅆㅂ'
"ㅆㅂ! ㅆㅂ!"
오, 찰지게 잘한다. 욕에 특화된 민족인가? 얘네들도 고난과 역경, 설움을 제법 겪은 역사가 있어서 이런 찰짐과 경쾌함이 묻어 나오는 건가?
그런데, 보는 사람 마다 가서 18을 시전 한다. 조금 자제시킬 필요가 있겠다. 못 알아듣는다 해도 혹시나 유행을 타게 되면,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혹시 모르게 튈 불똥의 예방 차원에서다.
가서 적당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더니 나에게 영어, 자기 모국어, 한국어로 빠큐를 날린다. 그것도 쌍빠큐를...
얘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나도 웃기면서 욱 하는 감정이 동시에 올라왔다.
나도 빠큐와 18을 적절히 혼합하여 가운데 손가락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런데... 뒷 통수에 뭔가 싸한 기운이 느껴진다.
뒤를 돌아본다.
아, ㅆㅂ... 담임 선생님이다.
경멸에 가득 찬 푸른 눈동자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거 같았다.
"너희 둘 다 당장 따라와!"
쉬는 시간, 텅 빈 교실에 둘이 들어와 앉았다.
칠판에 무언가 쓰신다.
'I shall not use foul languages and disgusting gesture in school plus elsewhere.'
('나는 학교를 비롯해 다른 곳에서도 욕과 역겨운 몸동작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너희 둘 다 이거 200번씩 써서 교감 선생님 한테 제출해."
일라이: 집에서 써와도 되나요?
선생님: 당연히 안 되지! 학교 마치기 전까지. 아니면 교감실에서 남아서 다 쓰고 가."
하아, 왠지 모르게 억울하다. 다른 나라 '빠큐'를 배운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나? 아니지, 그렇게 주접을 떨었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캐나다 와서 영어로 이렇게 뭘 많이 써본 건 처음이다. 아주 진짜 제대로 글쓰기 연습을 했다.
애석하게도, 이 이후로도 나는 한국욕 대사가 되어 또 다른 나라의 '빠큐'를 배우고, 나도 가르쳐 주고, 그렇게 친구들과 서로 사이좋게 (?) 발음 교정까지 해주는 애프터서비스까지 제공했다.
활동이 너무 활발하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소리는 너무 크지 않게, 가운데 손가락은 서로서로 자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