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의 첫겨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한국과 크게,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냥 한국이던 캐나다이던 추운 거는 똑같다. 눈의 양과 겨울의 길이 정도가 다르고, 또 간혹 폭설과 잦은 한파.. 아니다, 확실히 캐나다가 더 '겨울 겨울'하다.
그런데 캐나다 날씨를 정의하기엔 나라가 너무 크다. 겨울이야 뭐 어디든 다 춥겠지만 북극권에 가까울수록 더 추울 테고, 오대호에 끼여있는 토론토의 겨울도 매우 매서웠다.
한국에서 '추우면 좀 참지'라는 겨울바람이 토론토에서는 바람이 얼굴에 스칠 때마다 누가 제대로 귓 싸대기를 한 대 갈기는 느낌이었으니, 왜 도둑놈 모자가 핫템인지를 실감할 수 있게 했다.
아침에 학교에 도착하니 많은 아이들은 운동장에 수북이 쌓인 눈을 장난감 삼아 놀고 있었다.
한국이나 여기나 눈이 오면 애들은 다 똑같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조금 신기한 건, 보통 눈싸움도 많이 하는데, 정작 눈 싸움 하는 애들이 안 보였다. 흠, 왜지? 알고 보니 눈싸움은 '금지 놀이'였다.
왜? 눈을 무심코 뭉쳤다가, 혹시나 그 안에 돌이나 다른 게 같이 들어가 뭉쳐질 수 있으니 예방 차원에서 금지인 것이다. 실제로 눈덩이 안에 유리 조각이 들어간 걸 어떤 여자아이가 눈에 맞았는데 실명했다는 말이 있었다.
시간상 눈사람을 만들기는 어렵고, 조금 독특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한 아이를 자빠트리고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인정사정없이 눈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다.
일명 'snow job'.
아주 제대로, 확실히, 신속히 눈으로 묻어 버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 묻히고 나면 무덤 형태가 완성되는데 작품이 잘 완성된 거다. 얼마 안 있다가 묻힌 당사자는 순식간에 팍치고 일어난다. 꺄르륵 떠나갈 듯이 웃는다. 아주 신나 죽는다.
원래는 이 놀이도 금지이긴 한데 묻히는 당사자만 괜찮다면 그냥 묵인해 주는 분위기다.
내가 파묻히는 상황이면, 솔직히 기분이 별로일 것 같다.
그러던 순간...
'어?! 어... 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이 없었다. 애들 둘인가가 날 자빠트리고 난 준비도 없이 눈에 매장당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웃는 소리와 기괴한 조롱 섞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후에 알고 보니 나름 '인싸'들이 주로 묻히는 영광(?)을 누린단다. 이게 사실이냐고? 아니다. 내 추측이다. 그 후 얼마간 묻힌 대상을 보니 학교에서 제법 인기가 많아 보이는 애들이었다.
고작 눈에 파묻힌 거 가지고 뿌듯함을 느낀다.
학교에서 안내문을 나눠줬는데 도통 모르겠다.
나의 소중한 도우미 친구인 경준이... 가 안 보이니 성준이 형한테 물어본다.
'부츠 및 목도리, 겨울 모자 필수 착용, 내복 금지.'
엥? 내복을 입지 말라고? 이렇게 추운데?
겉옷이 방수 재질이 아닌 이상 내복을 입으면 눈에 젖어 마르질 않으니 저체온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때는 설명을 듣고도 이해를 잘 못했다. 잘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니까 형은 그냥 알아서 하란다. 설마 너 내복 입었나 안 입었나 옷을 들춰 볼 사람은 없다고.
주말 저녁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아이스링크로 향한다.
이제 브레이크 잡는 것도 능숙해졌고 슬슬 뒤로 타는 연습도 조금씩 해본다. 원래 뒤로 타기는 금지지만 조금 잘 타 보이는, 선수 느낌이 나면 별로 신경 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난 선수다. 지금도 하키를 하고 있다. 난 어제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희한하고 이상한 상상들을 내 의식에 계속 새겨본다.
이런 의식을 갖고 스케이트를 타니 어느덧 나는 선수 애들만큼 탈 실력이 됐다.
첨으로 무언가, 나의 의지와 의식 대로 이룬 거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항상 바닥과 밀착 되어 움직이던 나의 자신감이 바닥과 살짝 분리되어 가는 느낌도 들었다.
스케이트와 나는 향후 몇 년간 찰싹 붙어 다닌다.
성공적인 스케이팅 후, 5학년 짜리 아이한테 나름 늦은 시간인 9시 반 무렵, 경준이와 성준이 형과 집에 걸어가보기로 한다. 보통 경준이 부모님 차든, 누구 차이든 얻어 타고 오고 가고를 했지만 이 날은 모든 여건이 안 됐다.
성준이 형한테 걸으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봤다.
"아마 두 시간 정도 걸릴걸?"
왓?! 그게 말이 되냐고. 이 추워 빠진, 영하 10도는 될 거 같은 날씨에 걸어간다고?
그때 경준이가 성준이 형한테 영어로 막 뭐라 한다. 대충 듣기로는 웃기지 마라, 말도 안 된다, 무슨 두 시간이냐. 경준이는 눈이 제법 쌓이고 했어도 30분이 이내로 도착할 거 같다고 한다.
한 10분 정도까지는 그럭저럭 갈 만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겨울 부츠, 목도리, 겨울 모자 미착용 상태였다. 그나마 장갑은 껴서 손은 괜찮았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양쪽 손을 귀마개 삼아 걸어간다. 목이 너무 차갑다. 제대로 된 거북목 자세를 취하고 최대한 바람이 몸 안으로 안 들어오게 웅크려본다.
진짜 살을 면도날로 벤 다는 게 이런 것인가? 진짜 눈물까지 나왔다.
나보다 조금 더 앞서 가던 형제들은 괜찮은가 보다. 그런데 둘은 귀마개에 목도리에 부츠에... 겨울 채비를 단단히 하고 왔다. 역시 유경험자는 다르다.
그렇게 한 참을 걷고 (그래봐야 20분 정도 더 걸었나?) 집 건물이 보였다. 냅다 달려갔다. 1분 1초라도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경준이 말대로 한 30분 걸었나?
이때부터 느꼈지만, 성준이 형은 뭐든지 좀 과장해서 말한다. 그래서 적당히 걸러 듣는 데까지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빠른 구속이 전문인 투수가 거의 시속 *180km를 던질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아이스하키 선수는 **바디 체크를 당해서 사망했다고 까지 말한다.
(*실제론 시속 160, **바디 체크 당한 선수는 뇌진탕 증상으로 2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오름.)
1층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얼굴이 따가워졌다. 계속 칼바람을 맞던 내 볼때기는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다. 갑자기 따뜻한 공기가 닿으니 얼어붙어 있던 얼굴이 녹으면서 결려 오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이 전동 휠체어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할머니와 나름 하루 베프였던 어르신이 물으신다.
(이제 조금은 알아듣고 대답한다.)
"너 목도리랑 모자는? 설마 이 날씨에 이러고 다닌 거야?"
"네... 근데, 와... 장난 아니게 춥네요."
"호호호호. 그럼 겨울이 춥지 따뜻하니? 밖에 돌아다닐 때 준비 잘하고 다녀야지."
그렇다. 여기 겨울은 춥다고 징징대거나 겨울을 저주하는 발언 같은 건 일절 없다. 그냥 추우니 내가 알아서 잘 대비하자..라는 마인드다. 그런데,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