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의 할로윈

by 이삼오

10월 말 무렵 토론토는 제법 쌀쌀했다. 언제 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날씨였다. 공기는 산뜻했고 길가와 공원의 단풍은 날이 바뀔 때마다 진한 오렌지 물감을 덧칠한 것 마냥 색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괜히 단풍국이 아니다.



아이스하키가 거의 종교인 국가, 극성팬이 가장 많기로 악명 높은 토론토는 엉뚱하게(?) 야구 열풍으로 가득했다.



전년도 우승 팀이 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것이다.



하키시즌이 갓 시작한 토론토는 하키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보다 야구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캐나다 하면 빨간 단풍잎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공교롭게도, 하키팀인 메이플립스, 야구팀인 블루제이스 둘 다 파란색이 메인 유니폼 색이다.





아버지는 일이 있다며 또 한국에 갔다.



'이럴 거면 캐나다에 왜 온 거지?'라는 생각을 이때부터 했다. 그렇게 몇 년간, 조금 과장 되게 말하자면 아버지는 일 년의 절반 가까이 한국에서 지낸 거 같은데... 아직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궁금해서 물어본다고 해도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으니.






월드시리즈 6차전은 토론토의 홈구장인 '스카이돔'에서 열렸다. 5만 명이 넘는 관중은 빈틈없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티브이로 보는 거지만 상당한 열기가 느껴졌다.



동생은 방에서 자고 있고, 어머니랑 둘이 봤다.



난 실제로 내 의지로 티브이 앞에 앉아 야구 경기를 첨 봤다.



어머니도 야구를 좋아하나? 그냥 중요한, 어찌 보면 역사적인 순간일 수 도 있기에 보는 거 같았다.



그렇게 서로 아무 말, 반응 없이 나란히 야구를 봤다.






9회 말, 1점 뒤지고 있을 때 조 카터(Joe Carter)가 타석에 들어선다.



3점 홈런을 때린다.



역전의 순간, 다시 한번 월드 챔피언이 된다.



조 카터가 베이스를 돌 때마다 깡충깡충, 거의 춤을 추다시피 하면서 홈플레이트로 들어온다.



감격적이다. 이 순간 밖에서 온 동네 방네에서 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뭐라 할 거 같지 않았다.



솔직히 난 큰 야구팬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팀이 챔피언이 되니까 뿌듯했다.






10월이 시작되고부터 주택가의 집들은 희한하고 괴기스러운 장식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이미 핫한 주제였던 할로윈.



이게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이날은 분장하고 동네에 사탕 얻으러 다닌다고 한다. 다만, 어린이들만. 다행이다. 난 아직 어린이니까.





얼마 후, 할로윈 당일.



어머니 친구 댁에 놀러 갔다. 어머니와 어릴 때 동향 친구란다. 발도 넓다. 친한 친구였다면 캐나다 오자마자 만났을 텐데, 아닌걸 보니 친한 친구는 아닌가 보다.



나보다 한 살인가 두 살 많은 누나와 고등학생 형이 있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2세들이다. 신기했다. 한국사람인데 한국말을 잘 못하는. 못 한다기보다는, 유치원생들이 말하는 거 같다. 어쨌든 이 둘은 나에게 매우 친절했다.



아주머니가 형과 누나에게 나를 데리고 'Trick or Treating'에 나가라 했다. 분장할 거나 의상이 딱히 없어서과 입만 뚫린 겨울 모자를 뒤집어쓰고 나가라고 줬다. 누가 물어보면 멕시코 프로 레슬링 선수라고 그러란다.



'멕시코 프로 레슬링은 또 뭐야?"





밖이 어둑해질 무렵, 동네에 아이들이 한가득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초인종을 누르고 누가 문을 열면, trick or treat이라고 말하면 사탕을 준다고?'



첫 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와 할아버지 중간쯤 돼 보이는 분이 반갑게 맞아준다.



"츄릭 올 츄륏!" (영어는 못 하지만 발음은 좋다.)



"넌 정체가 뭐냐? 도둑인가?"



진짜 도둑 같네...



"멕시칸 뤠쓸럴."



"오! 글쿠먼!"



와... 진짜 준다. 작은 투명 봉투 안에 이것저것 담겨 있다. 대박...





동네를 한 시간 정도 빡쎄게 돌았을까.. 들고나간 큰 비닐봉지 두 개가 가득 찼다. 무게도 제법 나갔지만 무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정도 양이면 일 년은 족히 먹고도 남을 거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봉지 안에 있는 내용물을 다 쏟아 본다.



거의 대부분은 처음 보는 것들이다.



각종 감자칩, 초콜릿, 별의별 희한하게 생긴 젤리들, (제일 좋아하는) 껌...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이 간식들을 펼쳐 놓은 채 멀뚱히 구경하면서 뿌듯해했다.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한마디 한다.



"그거 다 담아 갖고 식탁에 올려놔."



한꺼번에 폭주하지 않도록 나눠서 주려나? 딱히 그런 건 아닌 듯하고.



이 중 상당량은 동생에게로 갔다.



뭐, 나눠 먹는 게 당연하지... 그런데, 씁쓸하다.



(나중에 동생을 데리고 Trick or Treating 다니면서 대부분 환수하게 된다.)




다음 날 학교, 떠들썩하다. 아직 할로윈과 월드시리즈 우승의 온기가 그대로다.



아이들은 전날 자기가 받은 것들을 한가득 가져와서 자랑하기도 하고 서로 물물 교환도 했다.



말 문이 트이지는 않았지만 귀는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거 같다.



다음 시즌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못 할 거 같다는 둥, 이번 시즌 메이플립스 우승은 어려울 거 같다는 둥, 할로윈 때문에 돼지가 될 것 같다는 둥.





11월에 들어서니 해도 정말 짧아지고 (학교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4시쯤인데 밖이 어두웠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됐다.



티브이에서 립스 아이스하키 경기 중계를 빼놓지 않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 경기들과 선수들의 인터뷰 밑 다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나는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정말 해보고 싶다.



스케이트를 자유자재로 타면서, 몸을 이리저리 부딪쳐 가며, 스틱으로 멋진 슛을 때리고 현란한 기술을 구사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거 같으면 뭐든 극구 반대하는 아버지가 이 운동을 시켜줄 가능성은 제로다.



하키는 포기하더라도 스케이트는 꼭 타야 할 거 같다.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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