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준이 왈
"야, 너 스케이트 있어?"
"아니, 없는데. 왜?"
"아마 더 추워지면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스케이트 타러 갈 거야."
정말? 진짜? 설렌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케이트를 타본 적 없다. 사촌형이나 누나 따라 롤러장에 몇 번 가봤어도 (나름 잘 탔다) 빙판 위에서 타는 스케이트는 아직. 그렇잖아도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말해 볼까 했지만 거절당할 거 같아서 말을 못 하고 있었던 중, 드디어 확실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타는 것이고, 스케이트 안 타는 아이들은 그냥 학교에 남아서 공부나 과제를 해야 하는 것. 항상 '각자도생'(?)을 실천하게 만드는 아버지이라 할지에도, 말도 안 통하고, 적응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더욱더 아웃사이더가 되는 걸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터이다.
"아빠, 겨울 되면 학교에서 스케이트 타러 간다고 하던 데..."
"근데?"
(근데라니...? 스케이트가 없잖아요.)
"그래서 스케이트가 있어야..."
"......"
(또 침묵의 시간인가?)
"그래. 며칠 있다가 알아보러 가자."
"네." (오예!!!!!!)
어떤 아는 분이 알려준 스포츠 용품점에 왔다. 규모가 어마무시하다. 1층에는 야구 글러브, 배트, 스포츠 의류부터 해서, 각 팀별 야구 모자, 온갖 액세서리들이 즐비했다.
오늘 나의 부푼 마음을 가득 채워 줄 공간인 지하 1층으로 향했다.
계단을 한 두 칸 내려갈 때마다 물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키 스틱부터, 글러브, 헬멧을 비롯한 각종 보호장비, 유니폼, 스케이트, 각종 운동화들... 정말 지릴 뻔했다.
"뭐뭐 필요한데?"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어머니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상하다. 한 해에 이런 날이 드물다. 길어야 총 다해서 손꼽을 정도다. 나에게는 둘도 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스케이트, 하키 스틱, 글러브, 헬멧 (은 내가 얘기 안 해도 사줬을 것이다), 인라인 스케이트 (응? 이건 왜? 그냥 찔러보는 거다)..."
"장갑은 있잖아."
하긴, 내가 생각해도 하키 글러브는 조금 무리수다. 시합용으로 나온 글러브는 가격이 스케이트만큼 헸다.
가장 중요한 스케이트.
굉장히 세련되고 한눈에 딱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는데 가격이... 내가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있지, 게다가 발도 클 것이니... 대의를 위하여(?) 한 보 후퇴, 그냥 대충 고른다.
처음 신어 봤는데 굉장히 어색했다. 뭔가, 걸음이 계속 뒤뚱거리게 된다. 딱 펭귄이 걷는 자세다.
스틱도 골랐다. 알루미늄으로 된 건 가격대가 높으니, 그냥 나무로 된 적당한 걸로 골랐다. 직원이 내 키 비율에 맞춰서 스틱을 잘라 줬다.
내색은 안 했지만 너무 신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 계산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른다. 왠지, 불안하다.
"야, 아까 이거 얘기했잖아."
헐, 롤러블레이드. (인라인 스케이트)
"아, 이거..."
"필요 없어?"
"아니 아니. 이걸로 신어 볼래."
이렇게 인라인까지 일사천리로 쇼핑을 마무리했다.
뛸 듯이 기쁘고 신났지만, 뭔가 꺼림칙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있는 더러운 기분 중 하나다.
좋은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뒤에 뭔가 구린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버지나 어머니 둘 다 하루에 여러 번을 싸우고 화해하고 하는 경우를 봐서, 좋은 무언가가 있을 땐 후다닥 해치우고 보는 게 이득이다.
우선 아직 까지는 좋다.
집에 와서 사 온 것들을 다 펼쳐 놓았다.
스케이트를 신고 방을 계속 걸어 다녔다. 나름 연습(?)이다. 스틱도 같이 들고 걸어 다녔다. 동생님의 연한 오줌 자국으로 얼룩진 카펫에는 마치 칼로 베어놓은 듯 한 자국들이 수백 개가 생겨났다. 손으로 몇 번만 비벼주면 없어지는 자국이니 맘 놓고 걸어 다녔다.
방에 있는 전신 거울로 내 모습을 본다. 헬멧에, 스케이트에, 스틱에... 눈을 살며시 감는다.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는 지금 누구?
-립스 최초의 한국계 선수이자 주장이다.
신체 사이즈는?
-185cm에 75kg (아이스하키 선수가 이 체중이면 경기 도중 사망 할 수도...)
유니폼 번호는?
-현 주장인 Wendel Clark의 계보를 이어 17번.
득점 능력은?
-공격수지만, 화려한 골잡이보다는 도움 능력이 돋보이는, 팀을 위해 뛰는 진정한 리더. 캬...
싸움 능력은? (프로 하키에서는 허용됨)
-Wendel Clark 만큼 잘 싸우지만 더 빠르고 양손을 더 자유롭게 쓰는.. (차라리 복싱 선수를 하지 그래?)
선수로서의 목표는?
-캐나다 국가대표 주장으로 올림픽 금메달 따기. 1967년 이후 우승반지가 없는 립스를 스탠리컵 챔피언으로 올려놓는 것. 내가 결승골의 주인공이자 MVP... 움 하하하!
아주 꼴값 대잔치다.
경준이 왈
"야. 너 스케이트 샀다고 했지? 이번 주 토요일에 스케이트 타러 가자."
동네 근처에 아이스링크가 있는데 내년 3월까지 주말 저녁마다 일반인에게 개장을 한다고 했다.
이런 알짜 정보를 주는 녀석이 너무 고마웠다.
드디어 결전의 날, 학교에서 타러 오기 전에 사전 점검도 할 겸, 너무 기대된다.
스케이트 줄을 꽉 묶고 헬멧을 장착한다. 불편했다. 그래도 나의 흥분과 기대는 불편함을 잊게 해 주었다.
스케이트 신은 발 한쪽을 빙판 위에 올려본다. 앞 뒤, 양 옆으로 문질러 본다. 뭔가 사각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용기 있게 양 발을 다 빙판 위에 맡긴다. 벽면 모서리를 잡고 서서히 링크를 돌기 시작했다.
몇 바퀴를 그렇게 돌고 난 후, 모서리를 떠나 사람들과 같이 합류한다.
'흠, 이거 탈만한데?'
그렇게 안 넘어지고 설렁설렁 링크를 수 바퀴 돌았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여자들은 대부분 피겨용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고 남자는 다 하키 스케이트였다. 이 중에 하키 선수들이 꽤 있는지, 정말 선수들처럼 타는 아이, 사람도 제법 됐다. 나도 조만간 저렇게 타리라고 다짐했다.
경준이가 타는 모습도 힐끗 본다. 타긴 타는데 뭔가 어설퍼 보였다. 안정감이 있어 보였지만 썩 잘 타는 거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본인도 인정한다. 그래도 하키에서는 골키퍼를 잘 보고, 야구에서는 나름 수준급 (우리 나이에서) 투수다.
나의 첫 스케이팅은? 한 번도 안 자빠지고 밑이 아닌 앞을 보고, 뒤도 한 번씩 힐끔 돌아보는 여유까지 보였으니 일단 대성공이다.
난 매주 한 번도 안 빠지고 스케이트를 타러 왔고 매번 실력이 눈에 띄게 늘었다.
드디어 학교에서 스케이트 타러 가는 날, 더욱더 설렜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주말 스케이팅 타임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 학교 몇 반만 타는 것이라 공간도 훨씬 여유로울 것이다.
자신 있게 링크 위로 올라가 처음엔 설렁설렁 타기 시작 헸다. 다른 아이들의 실력을 한 번 본다.
와... 몇몇 아이는 그냥 프로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정말 점잖고 샌님 (?) 같이 생긴 몇몇 아이가 링크 위에서는 마치 관우의 적토마보다 더 쌩쌩 매섭게, 카리스마 있게 달리는 게 아닌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나도 꼭 저렇게 타리라고 다짐한다.
속도를 점점 내어서 안정감 있게 링크를 돌았다. 선생님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선생님 특유의 차갑고 시크한 표정으로 뭐라고 외치면서 박수를 친다.
"나이스 스케이팅! 베리 나이스!"
오, 칭찬받았다. 힘이 난다. 더 속도를 내어 본다. 근데 문제는, 아직 멈출 줄 모른다. 속도를 주제 이상으로 냈다. 큰 일이다. 그냥 슬라이드를 하면서 넘어진다. 브레이크를 연마해야겠노라 다짐한다.
'난 꼭 17번 유니폼을 입고 하키를 할 거야!'
그러나 모든 게 뜻대로 되지는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