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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삼오

7학년을 끝으로 맞이하는 여름 방학, 이번 방학은 조금 특별할 예정이다.



드디어, 고대하고 기다리던 한국 방문이다.



아버지한테 7학년이 된 이후부터 넌지시 꺼내 봤던 내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할머니가 손주를 보고 싶어 해서 내가 한국에 갈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한국이 항상 그리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이놈의 집구석에서 두 어달 정도 떠나는 것만으로도 나를 충분히 들뜨게 하고도 남았다.



수많은 생각과 질문이 머리를 스쳐간다.



한국은 3년 간 얼마나 변했을까?



사촌 형, 누나, 동생들은 얼마나 바뀐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학교를 여기저기 많이 옮겨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를 알아보기나 할까?



나는 얼마큼 달라졌을까?



우선, 영어를 할 줄 안다. 키도 좀 컸다. 스케이트를 잘 탄다. 살짝 통통한 볼 살은 거의 그대로다.






나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여정이기에 에스코트 서비스를 신청했다. 공항에서 탑승전부터 도착해서 까지 안내를 받게 된다. 다행히 길을 잃거나 헤매는 일은 없을 거 같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엄밀이 따지자면 '델타'항공에 흡수 합병 된) '노스웨스트' 항공을 타고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갈아타는 여정이었다.



일본에 간다는 말에 살짝 설레기도 했지만 그냥 공항 탑승구 쪽에서만 움직이는 거라 별 감흥은 없을 것 같다.



공항에 도착 후, 탑승권을 받아 검색대를 통과했다. 짐은 달랑 배낭 한 개에 크로스백 하나였으니 복잡한 과정은 없었다.



'열 몇 시간 후면 한국에 도착하겠지...'





공항에 도착하니 고모부와 사촌 동생이 나와있었다. 나와 한 때 같이 살기도 한 이 녀석은 여전히 부끄럼 많은 또래 여자 아이와 비슷했다. 어색한지 내 말과 시선을 계속 피했다. 그래도 얼굴은 밝게 웃고 있었다.



도착해서 집 문을 연다. 할머니가 방 문틈에 앉아계셨다. 환한 얼굴로 한마디 하신다.



"왔능겨?"



감정에 크게 기복이 없는 할머니다운 인사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사촌형이 반갑게 맞이해 줬다. 마지막으로 봤던, 반항기 가득해 보였던 중2 짜리 남자아이는 오간데 없고 반듯한 이미지에 선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년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사제가 될 거란다. 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많은 우리 집안에서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러나 형은 결국 신부님이 되지 않았다.)





형을 따라 일요일에 성당을 갔다. 내가 어릴 때 다녔던 성당이지만 괜히 낯설었다. 아무래도 토론토에 있는 성당에 많이 익숙해져 있던 모양이다.



미사가 끝난 후, 나는 사촌형 친구들, 선후배들로부터 연예인(?)급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중학생인 내가 머리가 길어서도 그랬겠지만 영어를 잘하는 게 신기해서 그랬나 보다.



지금은 대기업과 그 계열사가 즐비하고 대학교 캠퍼스들이 널려 있는 동네가 된 '아산시'지만 96년 이 당시만 해도 그냥 지방 소도시, 온천으로만 유명한 관광지였다. 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반만 가면 되는 거리의 동네지만 사람들은 대도시의 사람들에 비해 많이 순박했던 거 같다.



나는 그저 형들 누나들이 물어보는 거 외에는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다. 토론토 성당 형들 누나들에 의한 예절 트레이닝(?)에 적응된 상태였다. 쓸데없는 말, 굳이 물어보지도 않은 말 좀 삼가라고.



그런데 조금 두리번거려 보니 낯익은 얼굴도 두 어명 보였다. 여기에서 짧게나마 학교 다녔을 때 친구였던 아이들이었다. 그 친구들도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서로 대뜸 다가가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로 내 캐나다 생활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다시 친해졌고 내가 온양에 머무를 땐 주로 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서울에 또 다른 친척집에서 당분간 지내기로 했다. 신촌에 사촌형과 누나가 둘이 자취하고 있었고 봉천동에는 여전히 큰고모가 수년간 해온 슈퍼를 그대로 지키고 계셨다. (이 슈퍼는 42년간의 역사를 뒤로하고, 2021년에 정리하셨다.)



어느 날은 신촌, 어느 날은 봉천동, 그 외에는 대부분 온양에서 시간을 보냈다.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모든 게 다 변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건물들이 많이 생긴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알던 동네에는 업종이 바뀌거나 아니면 새로운 상점들이 정말 많이 생겼다.



어릴 때는 3년이란 시간은 정말 길게 느껴졌던 거 같다. 그만큼 시간이 더디게 갔다는 건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느끼고 접했다는 게 아닐까...





신촌에 사는 사촌형, 어찌 보면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아서 삼촌처럼 느껴질 수 도 있는 형이지만 어릴 때 바로 한 집 건너 살아서 전혀 거리감 없는 형이었다. 어릴 땐 가끔 무섭기도 했지만.



형이 잠실 야구장에 데려갔다. OB와 쌍방울의 경기였다. OB가 홈런 몇 개에 크게 이겼던 걸로 기억한다. 막상 메이저리그 우승을 했던 토론토에서 가지 못한 야구장을 한국에 다시 와서 가는, 나름 아이러니(?)한 경험이었다.



야구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형이 한마디 했다.



"나 곧 캐나다 갈 수도 있어. 어학연수 때문인데, 잘하면 너희 집에서 지낼 듯 해."



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우리 집 분위기 영 아닌데... 또 생각해 보면, 어머니랑 사촌들은 다 잘 지냈으니 크게 걱정스러울 건 없었지만 아버지가 관건이다. 항상 형, 누나들에게 엄하고 무뚝뚝한 삼촌인데 과연...





캐나다에서의 3년은 매우 더디게 간 듯 느껴졌지만 한국에서의 두 달은 쏜살 같이 지나갔다.



다시 돌아갈 날이 점점 다가오자 우울해졌다.



밝고 화목했던 분위기에 둘러 쌓여 있던, 나의 아주 어릴 때의 기억처럼, 이런 아늑함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에 울컥 올라왔다.



김포공항에 도착, 어른들 얘기로는 내가 다음에 한국에 올 때쯤이면 새로운 공항으로 올 수 있을 거 같다고 했다.



공항을 새로 하나 만든다고? 여기도 멀쩡해 보이는데? 뭐, 불과 3년 만에 많은 게 휘리릭 하고 변했으니 놀라울 일도 아니다.






이제 곧 8학년, 1년 뒤엔 고등학교를 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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