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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식처

by 이삼오

평화롭지 못한 나의 집에서 나에게 피난처처럼 제공되었던 성당은 내 인생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복사단 인원이 충당이 되질 않고 기존에 있었던 (나를 포함) 단원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모임에 소홀해져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복사단 해체 이후로도, 성당에서 매주 일요 미사 후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일요일 하루는 온종일 성당 관련으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렇게 성당이란 곳은 일주일에 한 번은 내가 온종일 집에 없어도 합당한 이유를 제공하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실용적인(?) 곳이었다. 영적으로나, 굳은 믿음이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치면 중2가 된 8학년, 실은 6학년 때부터 종종 가다가 7학년쯤부터 들어서 자주 가게 된 곳이 있다.



바로 도서관. North York Central Library.



버스를 타고 지하철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거리다. 작정하면 걸어갈 수 있지만 한 시간은 족히 걸어야 할 거리라서 정말 날씨가 좋거나 하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주변에 공원도 잘 되어 있고, 사무실 건물과 공공시설도 많아서 직장인, 학생이 많은 그런 동네에 도서관이 위치해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된 거대한 도서관이다. 평일에는 오전 9시부터 저녁 8시 30분, 토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 일요일에는 쉬는 이곳은 나만의 아지트이자 안식처로 자리 잡은 지 꽤 되었다.



그럼 내가 이곳에 와서 계속 공부하고 책을 읽냐고? 놉. 그건 아니다.



영화도 볼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에 나처럼 혼자 잘 놀 수 있는 학생들에게는 놀이터가 될 수도 있다.



이 때는 이제 막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시기라, 나는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 한 대를 예약해 놓고 한국 대중가요 순위를 체크하는 것부터 시작인 나만의 루틴을 만들었다.



페이지 하나 열리는데 짧게 1,2분을 기다려야 하는 어마무시했던 당시의 인터넷 속도를 감내해야 했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기다림이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한글이 깨져 나와도 앨범 재킷을 보면 대충 누구인지 알 수 있었고 나중에는 한 발 더 나아가 이 깨진 문자를 한글처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학습이 되었다.



도서관은 얼마나 자주 갔을까? 일주일에 적어도 서 너 번은 갔을 것이다. 내가 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학교 마치고 집 한번 찍고 도서관을 출퇴근하듯 다녔다. 다른 엉뚱한 곳 가는 것도 아니고 책과 공부와 관련된 곳이라 부모도 가지 마라고 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종종 불시에 데리러 오기도 했기에 다른 곳으로 새었는지 의심을 안 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 책도 읽고 공부도 했을까?



물론이다. 그냥 집이 싫어서 도서관에 온 게 주요 목적이었지만 원래 책 읽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책, 저 책 많이 접하게 되었다. 이제 영어도 별 이질감이 없으니(그래도 사전은 여전히 끼고 다녔다) 내가 관심 있어하는 다양한 분야의 책과 잡지를 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온 김에 숙제는 했다.



게다가 내가 도서관을 가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내 동생 녀석이다.



도서관 카드 하나당 총 3개의 비디오를 빌릴 수 있다. 어린이 도서 쪽에 어린이 비디오가 한편에 빼곡히 있다. 이 중에서 동생이 좋아하거나 아니면 좋아할 만한 비디오를 골라서 온다. 집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동생이 쏜살같이 내 앞으로 와서 무엇을 빌렸는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내 가방을 빨리 열어보라고 재촉을 했다.





그런데 도서관에 대략 4시에서 5시 사이에 도착해서 8시 반까지 있는다 치면..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냐 인데...



다행히도 도서관 지하, 그러니까 도서관은 아니지만 도서관 건물에 푸드코트가 있었다.



햄버거부터 해서, 일본 라면, 북미식 중식, 그리스 음식점(내 단골) 등 다채로운 메뉴의 점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면 또 다른 관건인 돈. 이 돈은 어디서 나오냐.



천만다행인 게 아버지는 용돈 개념으로 식비를 조금씩 챙겨줬다. 원하는 대로 이것저것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배를 채울 수 있을 만큼의 액수는 되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맨날 도서관 가서 공부하는(?) 기특한 아들을 굶길 수는 없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했었을까...



한 가지 재밌는 건 막상 일본 라면집은 한국 사람이, 햄버거와 핫도그는 중국 사람, 북미식 중국집도 중국 사람, 프랑스식 샌드위치 가게는 한국 사람... 그리스 음식 (여기는 진짜 그리스 사람) 빼고는 다 중국인 아니면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손님들은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하도 자주 들락 거리다 보니 규모가 제법 큰 도서관이지만 직원들과도 서로 인사하며 지내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내가 좋아하는 잡지 신간이 들어왔다며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냥 집이 별로여서 오게 된 도서관은 나도 모르게 영어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게 된 곳이다. 책이든 잡지든 뭐라도 읽으면 잡생각도 잘 안 하게 되고 지식도 쌓고 학습 능력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나에게는 참 고마운 장소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쭉 들락 거리던 이곳은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푸드코트는 없어졌다고 한다.



옛 추억을 떠올려 보고자 유튜브 영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여러 번의 리모델링을 거쳤는지 옛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더 세련되고 몇 층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탈바꿈을 했다.



그래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같은 건 크게 변한 게 없었다.



토론토에 다시 가게 되면, 꼭 다시 가봐야 하는 곳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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